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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개미들에게 보내는 편지(3)] / 반복되는 기축통화 붕괴의 역사(로마제국편)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는 탈중앙화와 초연결사회를 표방하며 달러로 대표되는 기존 화폐시스템에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나오게 된 시대적 상황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기축통화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았다.
로마제국 통화붕괴로 멸망하다
 
고대에는 정복전쟁이 곧 경제행위였다. 요새 국가가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과 무역을 지원하듯 옛날에는 국가가 농업을 장려하고 전쟁을 통해 국부를 늘려 나갔다. 정복을 통한 부의 수탈과 전쟁포로로 유지되는 노예경제가 국가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전쟁포로 이외에도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흑해 북안과 러시아 지역에서 지중해 세계에 슬라브인 노예가 많이 수입되었다. 오죽하면 노예 ‘slave’의 어원이 중세 라틴어 sclavus(슬라브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예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성적 노리개나 전투를 위한 용병으로 쓰였다. 
 
당시 노예는 가장 중요한 생산기반이었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는 노예경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노예경제를 기초로 그리스 로마에서는 민주정 사회가, 동방에서는 봉건주의를 기초로 전제국가가 출현했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은 동방과는 다른 기후조건으로 대규모 경작이나 목축이 불가능했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정복하여 토지와 식량을 얻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경제사는 곧 전쟁사를 뜻한다. 이러한 정복전쟁 와중에도 페니키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해상무역에 종사하며 다른 공동체가 생산한 상품과 거래를 통해 교환하는 상업행위를 했다. 약탈경제에서 거래경제로 진화한 것이다. 
 
노예경제 붕괴 
 
그 무렵 로마제국의 경제관은 오로지 농업이었다. 고대에 상업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직업으로 여겨져 경제가 제대로 싹을 못 피우던 시기였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은 노예나 상인처럼 천박하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 농업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 영향을 받아 로마 상류층들도 상업을 이방인이나 하층민이 하는 하찮은 것으로 경시했다. 
 
고대에 부국강병책은 두 가지였다. 바로 ‘농업과 전쟁’이었다. 자국의 농경지를 넓히는 것이 곧 부국이요 정복지에서 물자와 노예를 가져오는 것이 강병책이었다. 농업의 기본 노동력은 노예였다. 따라서 전쟁이 매우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에가스테리온’이라는 노예 수공업공장이 운영되었고 로마제국에서는 ‘라티푼디움’이라는 노예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해 곡물, 올리브, 포도 등을 재배해 해외 판매함으로서 막대한 농업자본을 축적했다. 
 
그런데 빈번한 전쟁으로 그때마다 보병으로 출정한 자영 농민들의 피해는 커져만 간 반면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과 귀족들은 새로운 영지를 늘려가며 더욱 부유해 졌다. 결국 자영 농민층은 몰락해가고 봉건영주 세력은 점점 더 커져 부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로써 중산층 농민들이 붕괴되면서 농업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촌만 아니라 도시경제는 타격이 더 심했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예부족이었다. 로마문명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노예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2세기 들어 트라야누스 시대부터는 더 이상의 정복전쟁이 없어 노예 공급이 끊겼다. 그 뒤 로마는 극심한 인력난에 빠져 라티푼디움 생산체제가 쇠퇴했다. 나중에는 아예 노예를 해방시켜 그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수확 일부를 상납케 하는 소작농제도가 출현했다. 게다가 2~3 세기에는 전염병이 창궐해 인구가 1/3 가량 줄어들어 농업노동력은 물론 외적과 싸울 병력조차 부족했다. 패배라곤 모르던 로마군대가 번번이 패배하게 된 이유였다. 
 
로마제국의 기축통화 데나리우스 은화
 
알렉산더 사후 그리스제국이 분열되면서 시장이 나뉘어졌고 교역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발행했던 경화는 그대로 남아 유통되어 물가가 뛰고 드라크마 구매력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로마인은 그리스 통화붕괴의 경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여신 주노(Juno) 신전에 '모네타(moneta)'라는 조폐소를 차려 돈을 많이 찍어냈다. 이 이름에서 'money'가 유래했다. 새 정복지가 로마제국으로 흡수될 때마다 먼 지역을 지키기 위한 군대유지비는 크게 증가해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이를 충당할 목적으로 돈을 많이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세기 로마제국의 기축통화는 데나리우스 은화였다. 이 은화는 로마 외에도 각지에서 다량으로 만들어져 지중해의 중요한 통화가 되었다.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두고 있던 로마제국이 발행한 데나리우스는 활발한 무역을 가능케 했다. ‘데나리우스’로부터 돈이라는 뜻의 ‘데나로’(이탈리아어)와 ‘디네로’(스페인어)가 유래되었다.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 시저 시대에 주화는 금, 은, 동 세 가지 종류로 만들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금화와 은화는 세계 어디에서든 기꺼이 환영받는 기축통화였다. 황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금 광산을 24시간 채굴토록 해 돈을 단기간에 너무 많이 찍어냈다. 당연히 화폐 유통량이 급속히 많아져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주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로마 화폐는 순도 100%의 금화와 은화였다. 
 
카이사르의 혁명적 경제개혁
 
카이사르 시저는 천재였다. 정치와 전쟁에서의 천재적인 재능 뿐 아니라 경제의 본질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기원전 59년 수석집정관으로 취임한다. 당시 로마는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겪고 있었다. 특히 토지의 양극화가 매우 심했다. 카이사르는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집정관에 당선된다. 농지개혁법의 골자는 국가에서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 곧 중산층 양성이 골자였다. 그리고 그는 이 어려운 농지개혁작업을 큰 무리 없이 해냈다. 그것도 집정관 임기 1년 안에 이루어낸 가히 혁명인 성과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 8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을 마치고 돌아와 내전 승리 후 종신집정관이 되자 그는 그간 마음먹었던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정치개혁과 사법개혁을 단행한 후 경제개혁을 밀어붙였다. 먼저 원로원 의원들이 많이 하는 고리대금업의 이자를 대폭 낮추었다. 나중에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의 경우는 연 48%의 고율의 이자를 받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속주 전역에서 6%의 이자율을 권고했으며 이자율 상한선을 12%로 제한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일정 금액 이상의 현금 보유도 금했다. 장롱예금을 금지해 돈이 바깥으로 돌도록 한 것이다. 이자율 인하와 장롱예금 금지는 돈의 흐름을 촉진해 경제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더 나아가 카이사르는 서민의 빚을 3/4으로 탕감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탕감된 채권의 회수도 활발해 돈의 흐름이 더 좋아졌다. 
 
카이사르는 조세정책에서도 파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세율을 절반으로 낮추었다. 로마는 물론 정복지에 대해서도 관대한 세금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이 걷혔다. 세금을 피해 도망 다니던 피정복민들의 자진납세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의사와 교사 등 전문직에는 인종과 민족을 가리지 않고 로마 시민권을 내줬다. 
 
그는 화폐제도에도 손을 댔다. 그 무렵 로마에 금과 은이 많지 않았다. 전쟁 군비로 바닥난 것이다. 그는 로마 전역 신전의 봉납물을 공출하여 그것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화폐의 뒷면에 카이사르의 얼굴과 카이사르 황제라는 문자를 새겼다. 날마다 보고 만지는 화폐를 선전매체로 활용한 최초의 로마인이었다. 유다 왕국과 아테네 같은 자치권을 인정받은 속주는 그곳 화폐가 계속 통용되었다. 따라서 환전상이 번창했다. 당시 로마에는 오랫동안 은화와 동전밖에 없었다. 이때 최초로 금화를 찍어내 통화로 편입시킨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로마 화폐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금화와 은화의 교환가치가 고정되어야 했다. 당시 그가 정한 금과 은의 교환비율 1: 12는 이후 유럽에서 19세기까지 쓰였다. 
 
화폐주조권 다툼이 암살로 이어져 
 
그밖에도 카이사르는 북부 이탈리아와 스위스 지역에 거주하는 속주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갈리아 지방 같은 그 밖의 속주에도 라틴 시민권을 주어 선거권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로마 시민권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그리고 해방노예 제도를 만들어 능력있는 노예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공직의 문을 개방했다. 
 
그는 로마제국의 질서뿐 아니라 시간의 질서까지도 확립해 놓았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전격적으로 한해의 날수를 445일로 정해 버린다. 오랫동안 사용됐던 당시의 공식 달력은 오차가 누적되면서 실제 태양력과 너무나 어긋나 춘분이 달력상 겨울에 올 지경에 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실제 태양력과 사용하는 달력 간 격차를 해소한 사람이 카이사르였다. 그는 단숨에 새로운 달력을 도입해 과감하게 실제 태양력과의 차이를 없애버렸다. 대신 한해가 80일 가까이 늘어나버린 기원전 46년은 ‘혼란의 해’라는 별명이 붙어 버렸다. 이처럼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도입한 역법개혁 이후 한해는 365일이 됐고, 하루가 더 많은 윤년을 4년 마다 두도록 했다. 이 ‘율리우스력’은 이후 1500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표준달력 역할을 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달력과 흡사하게 일 년을 12달로 나누고 윤년을 만들어 이를 그의 이름을 따 율리우스력이라 부른다. 7월(July) 또한 그의 이름(Julius)을 따서 불렀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화폐주조권을 국가로 귀속시킨 것이다. 국립조폐창을 만들어 원로원의 주조권을 가져온 것이다. 예나 제나 이것은 기득권의 거센 반발을 무릅쓴 혁명적인 조치였다. 화폐주조 차익을 빼앗기고 고리대금업의 수익이 낮아진 귀족들의 불만은 독재자로부터 공화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결국 카이사르 암살로 이어졌다. 이유는 원로원의 반발이었다. 카이사르의 친서민 정책이 원로원의 경제적 이권을 많이 빼앗았기 때문이다.
 
네로 이후, 저질주화 대량유통으로 화폐경제 무너지다
 
로마제국의 돈 값이 본격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네로 시절부터였다.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64년 네로는 하지 말아야할 짓을 하게 된다. 곧 로마 대화재 재건을 위한 재원확보를 위해 은화에 구리를 약간 섞어 유통시켰다. 처음에는 구리 함량이 적어 시민들이 별로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금화 아우레우스는 계속 주조되었다. 로마재정이 완전히 고갈되자 네로는 금화와 은화 순도를 이번에는 10%씩 낮춰버렸다. 인위적인 못된 평가절하였다. 화폐 공급량은 늘었지만 화폐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올랐다.
 
당시 은 부족은 중국과의 무역수지 적자에 원인이 있었다. 기원전부터 로마제국은 유대인에 의해 중국을 잇는 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로마인들은 중국 비단이나 인도 향신료 등을 구입하면서 주로 은을 사용했다. 중국이 은본위제였기 때문이다. 무역적자가 계속되면서 유럽에서 은이 고갈되어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로마 은화의 구리 함량은 점점 늘어나 가치의 3분의 2를 잃어버렸다. 그 뒤 알렉산더 세베루스 재위 때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유량은 25%정도였다. 이런 악순환은 지속되어 고티쿠스 황제 시절인 244년에는 데나리우스에 함유된 은의 양은 1/20에 불과했다. 이방인들은 상품대금으로 데나리우스를 받지 않았다. 로마군대가 이국에 주둔할 때 경비도 데나리우스로는 받지 않았다. 외국인들은 데나리우스를 돈으로 인정치 않았다. 
 
수입이 막히자 로마가 시도한 첫 번째 조치는 사치품 수입제한과 귀금속 소장 금지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패한다. 260년 갈리에누스 재위 시 환전상들은 로마 은화를 거절해 사실상 은행이 기능을 상실하고 문을 닫았다. 이로써 경제에 가장 중요한 피가 돌지 않아 화폐 순환이 멈추고 경제가 마비되었다. 
 
데나리우스는 가치가 너무 떨어져 심지어 이를 발행한 정부마저 이를 세금으로 받지 않고 순은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렇게 거둔 은은 다시 가치 없는 데나리우스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나중엔 은의 함유량이 1/5000까지 떨어졌다. 화폐가 아닌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네로를 로마제국 몰락의 원흉으로 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이런 화폐가치 하락에 불을 댕겨 로마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늪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이다. 로마제국 후기의 ‘경화주조의 가치저하’는 통치자의 공적인 부패행위였다. 도덕적 타락의 전형이었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로마시민들이 화폐를 불신하고 물물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로마 사람들은 재수 좋게 예전 금화와 은화를 갖게 되면 내놓지 않아 로마에서 유통되는 돈은 가치 없는 데나리우스 뿐이었다. 이 현상은 토마스 그레샴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를 공식화하기 천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시민들이 화폐거래 대신 물물거래를 선호하자 화폐가 완전히 기능을 잃었다. 겉으로는 태평성대라 불리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200여 년 간 지속된 로마팍스나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인류 최초의 가격통제, 시장기능 상실로 도시경제 몰락
 
3세기 말 폭발적인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화폐조세에서 물납조세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제국의 경제체제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바뀌어 각 지역마다 자급자족 폐쇄경제가 형성되었다. 301년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인류 최초의 가격통제를 실시했다. 그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최고가격을 정하고 그 가격 이상으로 거래하는 사람들은 엄벌에 처했다. 물론 시민을 보호하려는 ‘선한 의지’였지만 혼란에 빠지면서 시장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로써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화폐가 기능을 잃자 군인들의 녹봉도 소금 등 현물이 지급되었다. 
 
5년 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새 금화 솔리두스를 주조해 사실상 유통에서 사라진 아우레우스를 대체했다. 그러나 솔리두스는 아우레우스보다 더 빠르게 로마를 빠져나갔다. (참고; 이후 솔리두스는 동로마제국의 기축통화가 된다.) 
 
이와 함께 로마제국의 불행한 운명은 시작되었다. 이국땅에 주둔한 로마군대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별 수 없이 그들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어 방대한 서로마제국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귀국한 군인들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과 은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걸 사용하는 것을 꺼렸다. 사실상 화폐공급이 중단되어 통화시스템이 붕괴되었다. 
 
게다가 국제교역이 위축되면서 유통상품이 줄어들자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졌다. 해적들이 다시 등장했고 상업이 쇠퇴하자 거래가 중단되면서 시장은 사라졌다. 더 이상 군인들에게 봉급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마지막에는 용병이었던 바바리안들이 로마 시를 침략해 약탈했다. 그리스처럼 로마제국의 멸망도 전적으로 잘못된 통화정책 때문이었다.
 
경제가 순환되지 않아 자급자족 원시경제로 되돌아가다
 
해적 출현으로 그나마 존재했던 무역활동도 쇠퇴하고 도시인구가 감소하면서 대규모 영지는 자급자족 시대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 결과 로마문명의 상징이었던 도시는 황폐화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로써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로마 도시문명이 끝나고 암흑의 중세 장원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로마의 경제적 몰락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진 것은 17세기에 서기 439년에 제정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로마제국 말기의 경제적 취약성, 과중한 과세 부담, 중간계층의 몰락, 산업의 파탄, 경작지의 황폐 등의 요인들이 자세히 밝혀졌다. 훗날 막스 베버는 로마제국의 멸망은 물물교환 경제를 이루고 있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화폐경제로 이루어진 정치적 상부구조가 더 이상 적응 못하고 붕괴됐다고 본 것이다. 곧 시장경제의 파탄이 정치적 붕괴로 연결되었다. 
 
로마제국이 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나라와 다양한 인종들을 정복한 뒤 로마제국에 편입시켜 포용력 있는 동화정책을 추구한 덕분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로마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 체재 안으로 흡수해 활용했다면 로마제국이 경제적인 문제로 그리 쉽게 무너졌을까? 역사의 의문점이다.
 
로마제국 몰락의 교훈
 
로마의 몰락은 현대인에게도 몇 가지 교훈을 알려준다. 첫째, 부의 원천이 오로지 농업과 노동에 있다며 상업을 경시하여 시장경제를 무시한 점이다. 결국 상업이 쇠퇴하고 시장경제가 무너져 로마제국이 쓰러진 것이다. 
 
둘째,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이다. 불량화폐의 대량 주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화폐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실물 선호도를 높임으로써 통화경제가 몰락해 경제에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도 순식간에 몰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도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을 알아야 할 이유이다. 
 
셋째, 어떤 국가나 정부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치도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역사가 확실히 보여 주었다. 로마제국 몰락 이후에 제국이 다른 나라로 대체되지 않고 한 동안 무정부 상태의 암흑세계에서 지낸 중세의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입력 : 2018.01.02 | 조회 : 1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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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세상만사

서울고와 외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KOTRA 입사하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무역관 근무를 거쳐, 경남무역관장, 뉴욕무역관부관장, 파나마무역관장, 멕시코무역관장, 마드리드무역관장, 밀라노무역관장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배재대학에서 서비스산업의 역사와 미래’, 유대인의 창의성’,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 바 있으며 현재는 세종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32년간 수출전선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도 제조업 보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서비스산업에 있다고 보고 그는 10년 전부터 유대인 경제사에 천착해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 10권을 썼다. 그 축약본 유대인 이야기가 2013년 초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예스24 네티즌 투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출간한 세 종교 이야기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2년 연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같은 해 화폐금융시리즈 곧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동시 출간했다. 최근에는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를 펴냈다. 그는 종이책 이외에도 금융산업 등 각종 서비스산업에 대한 이야기와 한민족 이야기 등 103권을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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