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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개미들에게 보내는 편지(4)]반복되는 기축통화 붕괴의 역사(스페인제국편)...스페인제국, 국가부도로 쓰러지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는 탈중앙화와 초연결사회를 표방하며 달러로 대표되는 기존 화폐시스템에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나오게 된 시대적 상황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기축통화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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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실 휘장을 앞세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세계의 금과 은, 스페인으로 몰리다
 
16세기 스페인은 세계 최초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신대륙 발견과 중남미 식민지, 필리핀 등 동남아 식민지, 결혼동맹으로 오스트리아 등 합스부르크 영토합병,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왕국 등이 모두 스페인제국의 영토였다. (참고로 필리핀은 ‘필립 왕자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스페인제국의 이러한 외형적 팽창과는 달리 내실은 곪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재정충당을 위해 신대륙 식민지에서는 금은 채취와 제련을 위해 현지 인디오들을 강제노역시켰다. 그렇게 하여 식민지 개척자들이 채굴한 금은의 5분의 1을 본국 왕에게 바치도록 했다. 이를 오일조(五一租)라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중남미에서 약탈하거나 채취한 황금의 5분의 1만 스페인 왕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질 수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원주민 남자들이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은을 제련하다 수은중독으로 대부분 죽은 결과, 정복자인 스페인남성과 원주민여성 간에 태어난 새로운 혼혈 ‘메스티소’가 출현해 중남미 최대 인구층을 이뤘다.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 국가 가운데 볼리비아와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이 넘칠 듯이 밀려들어왔다. 1503년부터 1660년 사이에 300톤 이상의 금과 3만 톤 이상의 은이 세비야 항구로 들어왔다. 스페인은 16세기 중에 전 세계 금은 총생산량의 83%를 차지하는 최고 부국이 되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은 빼고 모든 것이 비싸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고 경제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그의 저서 <15~18세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유입량만큼이나 막대한 은이 유럽 여러 나라로 빠져나갔고 그 은은 다시 국제 무역망을 통해 투르크와 페르시아, 인도와 중국까지 전 세계로 흘러나갔다. 스페인 은화는 엄청난 물량을 앞세워 국제 화폐경제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했는데, 그 가운데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곧 ‘8레알 은화’는 사실상 당시의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팽창정책으로 인한 대규모 재정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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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

문제는 이렇게 식민지로부터 금은보화가 쏟아져 들어와도 스페인은 과도한 팽창주의와 방만한 재정으로 적자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금융이 붕괴되자 그 무렵 스페인과 교역량이 많았던 제노바 금융가들이 자금을 대출해주었다. 
 
당시 교황청까지 정복하며 천하를 호령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 때부터는 재정이 바닥나자 미래에 들어올 세입을 담보로 미리 선대출을 끌어다 썼다. 곧 아메리카 식민지 광산에서 채굴될 금, 은을 담보로 제노바 금융가에게서 미리 돈을 빌려 프랑스와의 전쟁자금으로 쓰기도 하고, 네덜란드 반란진압 전비로도 사용되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은 국가수입의 70%를 전쟁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대규모 재정적자가 계속 늘어났다. 카를로스 5세의 경우, 재위 기간인 1516~1556년 40년 동안 부채만 4000만 두카트를 남겼다. 같은 기간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보화 3500만 두카트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두카트는 당시 기축통화격인 베네치아 금화다. 그 뒤 1568년부터 80년간의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일 때는 이보다 더 많은 적자가 났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식민지의 은이 거쳐 가는 단순한 경유지로 전락해 국내 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속지인 네덜란드에 징세와 통제를 강화하자 독립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스페인 독주에 도전하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했다. 
 
1492년 유대인 추방 직후부터 손실이 나기 시작한 국고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와야 했다. 주로 제노바, 독일 금융가로부터 신대륙에서 가져 온 금과 은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국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543년 경우 경상수입의 65%가 이미 발행된 정부공채의 이자상환에 지출되는 실정이었다. 1550년경 스페인은 외형상으로는 부국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 유대인이 빠져 나간 후유증으로 산업은 급속히 침몰했고 전쟁으로 돈은 무한정 빨려 들어갔다. 더구나 영국 해적선들은 스페인 배들을 공격하여 금은보화들이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약탈했다.
 
 
1557년 국가부도,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먼저 깨져
 
스페인 제국은 당시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여파로 북부 독일 군주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발전하여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 등 사방의 적들과 싸우는 처지가 되었다. 카를로스 5세는 지나치게 광범한 영토가 사방에 적들로 둘러싸이자 그것도 한 곳에 모인 영토가 아니라 흩어진 영토를 가지고서는 하나의 왕조가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해 155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도하고, 이듬해에는 스페인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카를로스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펠리페 2세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와 더불어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았다. 그가 등극하여 보니 1561년까지의 국고수입이 모두 저당 잡혀 있었다. 결국 등극 다음해인 1557년에 최초의 파산선언(디폴트)을 했다. 현대적 의미의 첫 국가파산이었다. 이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하기 31년 전의 일이었다. 제국의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먼저 깨진 것이다. 한때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지역까지 합병하고 4개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운영했던 스페인제국이 사실상 파산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뽐내던 스페인 제국은 종교 이데올로기에 갇혀 유대인을 추방함으로써 경제기반이 무너졌다.
 
 
잇따른 파산 선언 
 
그럼에도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멈출 줄 몰랐다. 과도한 정치적 야망으로 전쟁을 계속 치르는 바람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실 전비 차입방식이 문제였다. 한번 데인 금융업자들은 스페인 장기채 ‘후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차입은 대부분 ‘아시엔토’라는 단기채 방식이었다. 단기로 빌리니 만기가 빨리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 만기가 되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계속 더 큰 돈을 빌려 빚을 갚는 악순환에 빠져 단기채 계약을 계속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국유지와 광산이 부유한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결국 펠리페 2세는 견디다 못해 1560년에 다시 파산선고를 했다.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직후이자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572년에는 군사비 지출이 재정수입의 2배 이상 많았다. 게다가 유대인을 주축으로 한 네덜란드인들이 그간 스페인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소금 생산지들을 봉쇄하자 펠리세 2세 통치하의 스페인은 또 다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왕에게 돈을 대주던 채권자들도 위험을 감지하고 이자를 천정부지로 올리기 시작했다. 1573년에는 이자가 40%로 뛰었다. 결국 1575년에 다시 파산선고가 있었다. 
 
1576년에 이르러서는 병사들에게 지불해야할 급료가 국가 수입액의 2.3배에 달했다. 이번에도 더 이상 막대한 부채를 해결할 길이 없었다. 이때 채무자들에 대한 지불중단을 선언하면서 등장한 것이 스페인 공채(juro)다. 채무를 장기융자로 전환한 것이다. 채무불이행 선언은 거의 20년을 주기로 5번이나 더 계속되었다. 메디치가보다도 돈이 많았다던 독일의 금융가문인 푸거가와 제노바 은행가들이 여기서 거덜이 났다. 
 
1581년 여전히 개신교 지역으로 남아있던 네덜란드 북부는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인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88년에 네덜란드 북부의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파병했으나, 오히려 칼레해전에서 영국에 대패했다. 이때부터 점차 쇠퇴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 작위나 영주권이 매매되었으며,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귀금속을 들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비 증대로 인한 국고 파탄은 막지 못했다. 결국 1596년에 또다시 대규모 파산선고를 했다. 게다가 약 3년에 걸쳐 페스트까지 유행하게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를 가져온 펠리페 2세가 1598년 암으로 서거할 무렵, 이미 스페인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세입원이 저당 잡힌 상태였고 신대륙에서 들어올 세입을 담보로 빌린 돈으로 국가재정을 꾸려야 했다.
 
 
정부 수입 70%가 이자로 빠져 나가
 
이후 1648년에 네덜란드가 80년전쟁 끝에 독립했고, 1640~1668년에는 포르투갈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분리해 나갔다. 1659년에는 프랑스 남서부와 북부 일부를 프랑스에 내주었다. 그러는 동안 국가채무는 더 늘어갔다. 1560년에 380만 두카트였던 국가채무는 1667년에는 900만 두카트로 늘어났다. 두카트는 베네치아공화국 화폐로 당시의 기축통화였다. 채무가 늘어나자 이자율도 높아져 정부수입 70%가 이자로 빠져 나갔다. 당시 차입금은 정부소득 10년치였다. 그리고 1678년에는 동부를 프랑스에 내주었다. 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직후인 1714년에는 시칠리와 나폴리 그리고 사르디냐와 네덜란드 남부지방을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다. 그 뒤 스페인은 세계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입력 : 2018.01.04 | 조회 : 1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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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세상만사

서울고와 외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KOTRA 입사하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무역관 근무를 거쳐, 경남무역관장, 뉴욕무역관부관장, 파나마무역관장, 멕시코무역관장, 마드리드무역관장, 밀라노무역관장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배재대학에서 서비스산업의 역사와 미래’, 유대인의 창의성’,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 바 있으며 현재는 세종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32년간 수출전선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도 제조업 보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서비스산업에 있다고 보고 그는 10년 전부터 유대인 경제사에 천착해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 10권을 썼다. 그 축약본 유대인 이야기가 2013년 초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예스24 네티즌 투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출간한 세 종교 이야기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2년 연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같은 해 화폐금융시리즈 곧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동시 출간했다. 최근에는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를 펴냈다. 그는 종이책 이외에도 금융산업 등 각종 서비스산업에 대한 이야기와 한민족 이야기 등 103권을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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