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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개미들에게 부치는 편지(5)] 암호화폐 비트코인과 기축통화 미국 달러화의 트리핀 딜레마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

글에 앞서 알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 글은 역사적 팩트를 알려드리는 게 목적이며 가급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블록체인기술은 여러 부분에서 우리의 미래를 바꿀 겁니다. 물론 통화시장과 스타트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겁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은 현재의 암호화폐 시장은 몹시 과도기적이자 비이성적으로 심각한 버블이 끼여 있다는 점입니다. 버블이란 거품입니다. 거품은 꺼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환상이고 환영입니다. 한마디로 허상이자 허깨비입니다. 현재 나와 있는 2000여 암호화폐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1%도 안 될 겁니다. 나머지 99%는 버블입니다. 허상입니다. 이 가운데 사기성 ICO(암호화폐공개)도 많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시장이 정리되면서 심하게 털릴 수 있습니다. 이점 명심하시면서 제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913년에 설립된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을 본 따 만들어졌다. 당시 제이피모건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했다. 따라서 우리가 연준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란은행의 설립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1689년 네덜란드 윌리엄 공의 영국 왕위계승, 유대 금융자본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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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공)
영국에서 제임스 2세 때 영국의 귀족들은 왕이 가톨릭을 회복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 2세가 전제정치와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회파가 주도해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그들은 네덜란드 총독인 윌리엄 공을 영국 왕으로 추대하여 불러들이는 공작을 진행했다. 의회에서는 토리당·휘그당의 양당 지도자가 협의한 끝에 1688년 6월 말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 부처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윌리엄 공이 영국 찰스 1세의 딸 메리의 아들로 외가 쪽으로 영국 왕실의 혈통을 이어 받았고 또한 그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왕실의 적통을 이을 수 있는 제임스 2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기실 윌리엄도 미리부터 영국 입성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용병을 모으는 한편 윌리엄은 유대인 금융가 프란시스코 수아소로부터 은화 2백만 길더를 빌려 군자금을 확보했다. 바라는 게 무엇이냐는 윌리엄의 질문에 수아소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만약 폐하께서 이긴다면 반드시 갚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진다면 그야 내 손실로 감수할 밖에 없겠지요."
심지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까지 숙적인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 윌리엄에게 자금을 빌려주었다. 그가 모은 총 비용은 7백만 길더였으며 그 가운데 4백만 길더는 국채로 발행되었다. 대부분을 유대 금융가들이 사 주었다.
 
그해 11월 윌리엄·메리 부처는 1만 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영국 국내 귀족과 지방호족들도 잇달아 윌리엄·메리 부처의 진영에 가담했다. 사위 부부가 장인을 공격하는 얄궂은 판이었다. 권력은 혈육도 상관하지 않았다.
 
제임스 2세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1688년의 사건은 피 한방을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무혈혁명 곧 ‘명예혁명’이라 한다. 윌리엄 부처에게 1689년 2월, 의회는 ‘권리장전’을 제출하여 승인을 요구했다. 부처는 그것을 승인한 다음 공동 왕위에 올랐다.
 
그 해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간 인원이 호위 병력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었다. 민간인 가운데 반 이상이 유대인들로 세파라디 유대인 3천명과 아쉬케나지 유대인 5천명 등 8천여 명이 이때 영국으로 옮겨갔다.
 
맨 앞에서 유대 금융인들을 이끌었던 페레이라의 아들 이삭은 영국 병참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1690년 9월부터 1년간이라는 짧은 시기에 막대한 선박 건조비용과 군수품 조달을 무난히 성사시켰다. 그리고 그 비용 9만 5천 파운드의 돈도 무사히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유대인의 이동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의 빌렘 공이 영국 왕 윌리엄이 되자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막대한 인적자본과 금융자본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윌리엄의 경제관과 금융에 대한 시각을 잘 알고 있는 유대 금융업자들이 대거 옮겨 간 것이다.
 
이미 그 이전에 크롬웰과 물밑협상에 성공한 네덜란드계 유대 무역상들이 먼저 입국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참에 유대 무역인들이 진취적인 유대 금융업자들과 함께 네덜란드를 부흥시켰던 현대적인 ‘사업방식’이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로써 영국은 짧은 시간에 선진적인 무역망과 금융 산업 토대를 짧은 시간에 구축할 수 있었다.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국제금융과 해상국가의 바통 넘겨받아
 
명예혁명 이전 영국은 오랫동안 종교 간, 민족 간 전쟁이 벌어지던 각축장이었다. 윌리엄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통과시켰는데, 왕권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은 가톨릭교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도록 했고, 의회가 자주 소집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관용법은 가톨릭교도를 제외한 비국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법이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법률들은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영국은 그 후 200년이 넘도록 지구상에서 가장 관대한 나라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관용정책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산업혁명과 금융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토대로 영국은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비상했다.
 
1609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은행은 17세기 중후반 70~80여 년의 황금기를 마감하고 국제금융 중심지의 바통을 영국에 넘겼다. 이에 따라 그 뒤 네덜란드에서와 같은 ‘저리’로 대규모의 금융지원을 받은 영국 제조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무역 확대와 식민지 개척도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 뒤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세계 최고의 해상국가로서의 지위까지도 넘겨받았다. 그 뒤 영국은 사상 최대 규모로 세계의 상업과 식민 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네덜란드의 전성기와 유대인들의 네덜란드 체류기간이 무섭도록 일치한다.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참고; 제국의 미래,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비아북)
 
 
민간소유의 중앙은행 탄생
 
17세기 영국 상인들은 여유 자금을 정부 기관인 조폐창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돈이 궁해진 찰스 1세가 '대부'라는 명목으로 조폐창에 보관 중인 상인들의 돈 20만 파운드를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상인들은 조폐창에서 돈을 빼서 골드스미스(Goldsmith, 금세공인),곧 금장(金匠)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금에 대한 이자도 지불했고 보관영수증도 발행했다. 이들이 발행한 보관영수증은 마치 은행권처럼 통용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몰려 온 17세기 후반 이후 영국의 대외무역 팽창으로 상인과 해운업자들의 자금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금융기관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영란은행의 설립 배경은 또 있었다.
 
그럼에도 1689년 윌리엄 왕이 영국 왕위 계승 이후 처음 부닥친 난제가 재정적자 문제였다. 심각했다.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영국은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50여 년에 걸친 전쟁 수행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세금을 올렸다. 정부는 17세기에 국민소득의 2-4%를 세금으로 걷어 들였는데 전시에는 6%까지 올라갔다.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된 1689년에는 12%까지 뛰어 올랐다. 국민들의 혈세만으로는 전비를 조달할 수 없었다.
 
전비가 모자라자 1692년에 국채발행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재정혁명이었다. 그간 엉성하고 군주의 변덕에 달려 있던 대부방식을 효과적인 정부채권 체계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또 국채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재정 악화를 어느 정도 견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의회가 재정 운용권을 가지게 되자, 의회가 그 전처럼 증세에 반대하지 않았고, 1693년에는 국가채무에 대해 지급을 보장했다. 이런 몇 가지 사정 덕택에 국채의 신뢰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국채 발행조차도 한계가 있었다. 국채 발행이 한계에 다다르자 더 이상 재정적자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왕으로서 가장 화급한 문제는 당장 눈앞에 닥친 전쟁을 위한 전비 마련이었다. 특히 영국이 비치 해드 해전에서 프랑스에게 대패한 뒤 강력한 해군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전함 제작에는 철강산업 육성이 선결과제로 막대한 자본조달이 필요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시절 활용했던 ‘전쟁기금 모금기구’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네덜란드 시절부터 친했던 유대 금융가들에게 긴급 협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왕이 요청한 돈은 너무 큰 금액이었다. 120만 파운드였다. 어느 몇 명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큰돈을 마련하여 왕에게 빌려준다 해도 이렇게 재정적자가 날로 심해지는 형국에 돈 받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고 왕의 부탁을 모른 채 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우선 윌리엄 패터슨 등 스코틀랜드인들을 끌어들였다. 이른바 신디케이트 대출을 구상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 금융가들은 커튼 뒤로 숨었다.
 
 
유대자본, 민간소유 중앙은행 설립하다
 
이때 유대인들은 또 한 번의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된다. 유대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주축이 된 금융가들은 왕에게 큰 딜을 제안한다. 돈을 모아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왕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들의 제안은 상인들이 120만 파운드의 자본금을 모아 ‘주식회사 은행’을 세우고 이때 모은 자본금인 금괴를 모두 국왕에게 금화로 만들어 대부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상인들은 출자액만큼을 은행권 곧 지폐로 교부받아 지불수단으로 통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금괴를 맡기고 그 만큼의 은행권을 받는 것이어서 밑질게 없는 장사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최초로 은행권을 찍어 낼 수 있는 발권력을 쥐게 된다는 점이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유대 은전의 발권을 통해 발권력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주화와 금장들이 발행한 금괴나 은괴 보관증은 많이 통용되어도 은행이 정식으로 발권한 은행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게다가 당시 윌리엄 왕은 전임 제임스 2세의 왕위 탈환 움직임을 공공연히 지원하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왕은 의회에 세금징수권을 내주는 통에 세금을 거두지 않고 전쟁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의회도 국왕이 다시는 조세권에 접근치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왕의 차입을 적극 지원했다.
 
상인들의 제안은 왕에게도 솔깃했다. 무엇보다 상인들이 출자금만큼을 은행권으로 가지고 가기 때문에 왕은 빚을 구태여 갚지 않아도 됐다. 왕은 120만 파운드를 연이자 8%로 빌리는 대신 이자만 지급하고 원금은 영구히 갚지 않아도 되는 영구채무로 하기로 유대인들과 협상했다. 은행권 발권력 부분만 제외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상이었다. 이때부터 유대 금융권력이 주도하여 세운 민간은행이 은행권에 대한 독점 발권력을 소유하고 중앙은행으로 진화하게 된다. 설립 초 영란은행은 대출 업무만 하고 개인예금은 받지 않다가 18세기 초 예금은행 기능을 갖게 된다.

 
이상한 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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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은행)

이때부터 영란은행은 국가에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짭짤한 이자 수입을 챙기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 이상한 점은 유대인들은 은행 설립 때 출자한 금괴만큼의 은행권을 되받아 갔거나 은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대출해 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빌려 준 돈이 없었다. 그래도 국가로부터 받는 이자는 매년 꼬박꼬박 챙기는 것이다. 참 이상한 셈법이다.
 
윌리엄 왕은 영란은행에 은행권 발행 독점권을 주는 칙허장을 교부했다. 군비조달을 위해 이렇게 자금을 영구히 빌리는 대가로 유대인들에게 화폐 주조권을 넘겼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를 대표하는 왕과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탄생한 것이 영국 중앙은행이다. 화폐 주조권을 손에 넣은 유대인들은 은행을 설립했고, 이것이 민간 중앙은행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영란은행이다. 세계 최초의 ‘민간소유’ 중앙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현재에 이르는 국제금융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영국 중앙은행도 여느 개인기업과 마찬가지로 주식공모를 통해 설립자금을 모집했다. 당시 영국 정부가 요구한 120만 파운드가 필요했으나 투자자들인 런던 상인 1286명에게서 주식 공모 형태로 거둬들인 돈은 8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그 무렵 상인(Merchant)이라 함은 유대인과 동의어였다. 그럼에도 다급한 영국 정부와 의회는 1694년 7월 의회 입법을 통해 영란은행의 창립을 허가했다. 근대의 은행권은 영란은행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유대인 금융가들은 네덜란드로부터 영국에 건너 온지 얼마 안 되어 17세기 말 영국 중앙은행을 탄생시켰다. 그들이 주주가 되어 설립한 것이 영란은행 곧 잉글랜드은행(BOE; Bank of England)이다.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어 첫 대출로 정부에 8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을 때, 이 금액의 일부는 은행권 형태로 정부에 지불되었다. 정부는 이 은행권을 이용해서 루이 14세와 싸우기 위한 전쟁의 보급품을 사들였다. 최초의 지폐는 손으로 제작되었고 인쇄된 지폐는 1725년 이후에나 가능했다. 이 최초의 은행권들은 기업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돈처럼 유통되었다. 이것이 영란은행 지폐의 원조이다.
 
덕분에 프랑스는 전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은 쉽게 전비를 마련했다. 영란은행은 주주들 가운데 2000파운드 이상 응모한 상인 14명에게 이사 자격을 주었다.

 
화폐 발행과 국가 부채를 묶어놓은 괴상한 구조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의 재정적자는 수직 상승했다. 쉽게 돈을 빌릴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1670~1685년에 영국 재정수입은 2480만 파운드였고 그 뒤 1685~1700년의 정부 수입은 두 배 넘게 증가한 5570만 파운드였다 그런데 같은 기간 재정 지출은 더 늘어나 영국 정부가 영란은행에서 대출한 액수는 17배나 급증해 80만 파운드에서 1380만 파운드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화폐의 발행과 영구적 국채를 묶어놓는 구조였다. 그래서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고 이자도 갚아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 수밖에 없다. 그 돈을 다시 은행에서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해서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다. 실제 영국 정부는 그때부터 채무를 갚지 않았다. 1783년의 국채 발행 누적액은 세금수입 20년분이었다.
 
이처럼 정부가 신뢰도 높은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하자 영국의 금융업은 크게 발달했다. 런던 금융시장의 유통자본이 늘어나고 국채의 신뢰도가 높아지자 이자율이 하락했다. 영란은행은 런던 상공업자를 대상으로 대출해 주었고, 런던 이외에서는 지방은행이 설립되어 소액 은행권을 발행하거나 대부했는데, 18세기 말에 런던의 이자율은 연 6~8%였다.
 
국채는 주로 전시에 많이 발행되었는데 1814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는 국채의 이자 지급액이 국가 세입의 56%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이후에도 국채는 계속 발행되어 2010년 초 현재 영국 정부의 채무는 1694년의 80만 파운드에서 8천900억 파운드로 늘어나서 영국 GDP의 62%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미국이 따라 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도 민간 소유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기존 금세공인 등 다른 사적 금융기관들 중에도 돈을 주조하는 데가 있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영란은행이 독점적인 발권은행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뒤 영란은행에 맞서 1716년 브리스톨 은행을 필두로 지방은행들이 설립되어 왕권에 맞서며 은행권을 발행했다. 그러자 600여 개로 불어난 다른 지방은행들도 우후죽순으로 은행권을 남발했다. 그러다 공황이 들어 닥치자 지방은행들 반 이상이 망하여 크게 사회 문제화 되었다. 1844년 당시 수상이던 로버트 필경이 ‘은행허가법’’을 제정하여 이러한 금융 상황을 정리했다. 골자는 지방은행권 발행을 금지시키고 영란은행의 은행권만을 법정화폐로 선포했다.
 
1694년 당시 자본확충을 위한 영란은행의 주식 공모는 청약개시 2~3일 만에 마감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배정 받은 영란은행 주식은 20%의 프리미엄을 받고 팔려나갔다. 주식 발행으로 영란은행의 자본금이 확충되자 이 돈은 계속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영국 정부에게 대출되어 졌다. 영국 정부는 그 뒤에도 계속 영란은행으로부터 돈을 꾸어 통화량을 늘려 나갔다.
 
처음에 120만 파운드의 빚이 4년 후인 1698년에는 무려 1700만 파운드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는 전체 영국 경제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때부터 정부 통화량의 증대는 정부가 경제 상황을 감안하여 그 증감 정도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로부터 기인하는 이상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비록 정부부채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시중에 돈의 유통량이 늘어나니 자연히 경제 사정도 호전되었다. 윌리엄 왕은 이 돈을 프랑스와의 전쟁에 썼다.
 
 
트리핀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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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트리핀 교수)

‘트리핀 딜레마’란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이 주장한 내용으로, 국가부채와 연결되어 있는 달러 발행과 무역적자에 의해 해외로 유출되는 달러화에 관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지칭한 말이다. 이는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현행 국제금융시스템의 근본적 모순을 뜻하는 용어다. 트리핀 교수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심각해진 1960년, 달러화 기축통화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했는데, 이후 ‘트리핀 딜레마’라는 이 용어가 널리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1944년 출범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기축통화라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기존의 금 대신 미국 달러화를 국제결제에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달러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대외거래에서 적자를 발생시켜 국외에 끊임없이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적자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에는 유동성이 과잉돼 달러화 가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이 대외거래에서 장기간 흑자상태를 지속하게 되면, 달러화의 가치는 안정시킬 수 있으나 국제무역과 자본거래를 제약할 수 있다. 달러화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모순을 가리켜 ‘트리핀 딜레마’라고 한다. 이처럼 기축통화 달러화는 미국의 재정적자 곧 국가부채를 토대로 발행되는 자체 모순을 안고 있다.
 
지난 글에서 그리스의 기축통화 붕괴, 로마제국의 기축통화 붕괴, 스페인제국의 기축통화 붕괴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모두가 과도한 재정적자와 그로인한 방만한 통화 운용으로 인해 파탄난 것이다. 우리 인류는 과거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과연 배울 수 있는 존재인지 의문이 든다.

입력 : 2018.01.15 | 조회 : 9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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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세상만사

서울고와 외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KOTRA 입사하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무역관 근무를 거쳐, 경남무역관장, 뉴욕무역관부관장, 파나마무역관장, 멕시코무역관장, 마드리드무역관장, 밀라노무역관장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배재대학에서 서비스산업의 역사와 미래’, 유대인의 창의성’,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 바 있으며 현재는 세종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32년간 수출전선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도 제조업 보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서비스산업에 있다고 보고 그는 10년 전부터 유대인 경제사에 천착해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 10권을 썼다. 그 축약본 유대인 이야기가 2013년 초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예스24 네티즌 투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출간한 세 종교 이야기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2년 연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같은 해 화폐금융시리즈 곧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동시 출간했다. 최근에는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를 펴냈다. 그는 종이책 이외에도 금융산업 등 각종 서비스산업에 대한 이야기와 한민족 이야기 등 103권을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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