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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으로 부흥한 베네치아 이야기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 photo 뉴시스

소금으로 부흥한 베네치아 이야기

 

훈족의 침입으로 생겨난 해상도시,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훈족의 침공으로 생겨났다. 훈족의 왕 아틸라의 워낙 기세가 워낙 맹렬해 그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훈족은 아시아 흉노의 후예들이다. 유목민족인 그들은 초원의 먹거리가 모자라면 약탈과 정복전쟁으로 먹고 살았다. 중세의 전형적인 부의 획득 수단이었다. 

훈족은 452년 이탈리아 동북부를 침입해 아길레야를 3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켜 철저히 파괴했다. 아틸라는 이어 포강 유역으로 진출해 겁에 질린 밀라노, 파비아 등에 무혈 입성했다. 그 뒤 이들은 파죽지세로 파도바·베로나·브레시아·베르가모 등 7개 도시를 휩쓸었다.

 그 무렵 베네치아 주변 베네토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주교좌 교회가 있는 아퀼레야가 훈족에게 비참하게 파멸되었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훈족의 공격에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항복하더라도 학살당할 것 같은 공포에 떨었다. 그 일대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몇 개의 하천에 의해 생긴 평야 지대로 멀리 있는 산으로 달아나려 해도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붙잡힐 것 같았다. 앞은 바다였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것은 갈대가 전면에 우거져 있는 갯벌이었다. 갯벌로 도망가 섬에 숨는 길만이 유일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갯벌을 지나 섬으로 피난 갔다.

 훈족은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일파로 바다하고는 거리가 먼 민족이었다.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예상대로 바다건너 섬은 건드리지 않았다. 훈족의 기마대들은 말이 늪지대에 빠져 더 이상 난민들을 추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몽고 침입 당시 강화도로 피신해 항쟁한 경우와 비슷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무사히 섬에 도착하여 베네티암(Veni Etiam !,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베네치아는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백향목으로 만든 인공섬,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처음 갯벌이 적고 땅이 단단했던 토르첼로섬에서 시작했다. 차츰 피난민들이 늘어나면서 다른 섬들로 옮겨가게 되고, 레알토섬을 비롯하여 12개 섬까지로 영역을 넓히면서 베네치아는 도시로서 기반을 닦게 되었다.


이후 외침이 잦아 피난민들이 더 늘어나자 그들은 섬을 개간해서 넓힐 궁리를 했다. 그들은 물에 썩지 않는 전설의 ‘백향목’ 곧 해발 2000미터에서 사는 거대한 레바논 삼나무를 수입해 4미터 높이의 말뚝을 만들어 이를 갯벌에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을 얹어 인공 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 석조건물을 지어 삶의 터전을 점차 넓혀나갔다.


주민들은 인공 섬들 사이로 배가 다닐 수로를 파서 이 운하들이 도로 역할을 하게 했다. 그리고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400개를 놓아 주민들이 이 섬 저 섬으로 왕래할 수 있게 했다.


백향목은 솔로몬 왕 시절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민들 때 쓰였던 최고급목재인데,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을 지을 때 이런 백향목 말뚝 110만 개를 갯벌에 박아 그 위에 지었다. 베네치아 전체 122개의 섬 중 90%가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 섬들이다. 

7세기 이후 해수면이 내려가 소금이 생산되다 

원래 베네치아는 석호에서 나는 숭어와 장어, 소금 이외에는 별 생산물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소금이 큰 효자 노릇을 한다. 6세기까지만 해도 어촌이었던 베네치아는 7세기 이후 해수면이 내려가 소금 생산에 호조건이 마련되었다.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1미터 이상 낮았다. 7세기와 9세기 사이에 베네치아에서 오늘날과 같은 천일염 제조기술이 개발되었다. 여러 개의 염전을 만들고 펌프와 수문을 이용해 바닷물의 염도가 점점 높아지면 다음 단계 염전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그 무렵 중국 역시 바닷물을 토기에 넣고 불을 지펴 소금을 생산할 때였다. 우리나라는 자염이라 하여 어느 정도 갯벌에서 바닷물을 증발시키고 써래질로 염도를 높인 후 마지막에 가마솥에 넣고 끊여 소금을 만들었다. 중국 보다는 앞선 기술이었다. 문제는 바닷물을 끓이는 소금가마에 쓰는 연료였다. 조선시대 내내 목재 말고는 마땅한 연료를 구하지 못했다. 때문에 염전 주위는 민둥산이 돼버렸다. 우리나라에 천일염 제조기술이 들어 온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일이다. 일제는 1907년 인천 주안에 처음으로 천일염 염전 시험장을 설치했다. 베네치아 천일염 제조 방식이 오늘날 우리나라 염전에서 쓰는 방법이다. 

귀한 소금으로 동방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베네치아는 귀한 소금을 기반으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갔다. 베네치아의 유일한 희망은 바다를 통한 대외 교역이었다. 게다가 베네치아는 대단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 안쪽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해적들로부터 비교적 쉽게 방어할 수 있으면서도 바다를 통해 레반트(동방) 지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가져 간 소금은 고가에 동방 물건들과 교환되었다. 당시 가장 큰 교역물품은 목재와 노예로 이를 가져다 중개무역을 했다. 

게다가 내륙과 연결되는 해안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강의 지류들이 베네치아를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베로나로 흐르는 에취강, 롬바르디아 지방을 가로지르는 포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은 이탈리아 내륙지방과의 교역관계를 창출해 냄으로써 해상교역을 뒷받침했다. 해상교역의 성황으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여타 도시국가들과 비잔틴의 통치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동맹상대자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당시의 세계도시이자 공예수공업의 본거지인 비잔틴, 발칸반도의 슬라브 세계, 그리고 서방 세계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 기막힌 위치에 있었다. 

베네치아, 소금으로 일어나다

 베네치아는 소금과 절임생선으로 동방과 북아프리카에서 향료와 직물을 사들여 다른 곳으로 수출했다. 또 서방의 금속제품과 슬라브 여러 국가와 이스트리엔의 노예와 목재를 사들여 이를 다시 동방으로 수출했다. 

베네치아는 알프스의 여러 협로들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독일과도 가까워 중개무역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로써 7세기 중엽 이후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으로 침체되었던 중세 유럽의 경제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0세기경부터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안가 염전에서 만든 천일염을 알프스 지역에 대량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들에게는 소금을 절반 가격에 파는 가격 차별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로마가 썼던 수법이었다. 

당시 소금을 팔아 유대인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은 한 필당 금 한 덩어리에 거래되었다. 이렇게 동방무역이 번성하자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은 유럽 대륙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을 불러들였다. 유대인들이 베네치아에 몰려들면서 무역업 이외에도 모직물, 유리제품, 가죽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독일 광산의 은이 유입되었고 이 길을 따라 동방 물건이 북유럽으로 전해졌다. 

소금 독점 전쟁 

이렇게 소금의 중요성을 일찍 깨우친 베네치아인들은 소금채취 경쟁 상대들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후에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들에게 독점적 계약을 강요하는가 하면 13세기에는 소금세를 거두었다. 

염전이 있는 곳에서는 소금의 독점권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 확보를 위해 120년 동안 으르렁거렸다. 강력한 무역과 해상의 라이벌인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1250년부터 약 120년간에 걸쳐 4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결국 1380년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지중해 소금의 독점권을 두고 다시 맞붙었고, 승리한 베네치아는 이후 100년간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14~15세기에는 베네치아 해안의 해수면이 올라와 자체에서는 거의 소금 생산이 안 되자 베네치아는 주변 아드리아 연안과 키프로스 및 북부 아프리카의 소금을 독점했다 이를 유럽 대륙과 동방에 내다 팔고 동방무역도 독점하여 중세 유럽 최강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십자군 전쟁 때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했다. 이후 제노바와 피사의 기독교 상인들은 영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꺼리지 않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종교적 적대자인 이슬람교도들과 상거래를 하지 않았다. 이 틈에 유대인들은 어부지리를 얻어 계속 동방무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122개 섬과 96개 운하와 400개의 다리로 연결된 베네치아)

 

 

입력 : 2019.12.04 | 조회 :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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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세상만사

서울고와 외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KOTRA 입사하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무역관 근무를 거쳐, 경남무역관장, 뉴욕무역관부관장, 파나마무역관장, 멕시코무역관장, 마드리드무역관장, 밀라노무역관장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배재대학에서 서비스산업의 역사와 미래’, 유대인의 창의성’,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 바 있으며 현재는 세종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32년간 수출전선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도 제조업 보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서비스산업에 있다고 보고 그는 10년 전부터 유대인 경제사에 천착해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 10권을 썼다. 그 축약본 유대인 이야기가 2013년 초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예스24 네티즌 투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출간한 세 종교 이야기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2년 연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같은 해 화폐금융시리즈 곧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동시 출간했다. 최근에는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를 펴냈다. 그는 종이책 이외에도 금융산업 등 각종 서비스산업에 대한 이야기와 한민족 이야기 등 103권을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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