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간조선 로고     [2232호] 2012.11.19


시진핑의 걸림돌? 中共十老

▲ 지난 11월 8일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중국 공산당 원로들. 장쩌민, 리펑, 주룽지, 리루이환, 쑹핑, 웨이젠싱, 리란칭, 쩡칭홍, 우관정, 뤄간(왼쪽부터 의전 서열순).
지난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18대)는 중국 원로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8대의 시작도 당 최고원로들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됐다. 당대회 사회를 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위원장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주더, 덩샤오핑, 천윈” 순서로 소개를 했다. 우방궈가 언급한 인사는 중국공산당의 역대 최고위 원로다.
   
   생존해 있는 당 원로 10명도 주석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주목을 끈 사람은 유일하게 인민복을 입고 등장한 쑹핑(宋平·95)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다. 한때 위중설이 나돈 쑹핑은 천윈(陳雲)을 잇는 보수좌파의 본류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중앙조직부장으로 인사 실무를 총괄했다. 쑹핑은 간쑤성 서기로 있을 때 청화대 후배인 후진타오를 첫 발탁했다. 후진타오를 당총서기감으로 덩샤오핑에게 추천한 사람도 쑹핑이다. 쑹핑의 출현은 당총서기 퇴임을 앞둔 후진타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당 원로 10명 노익장 과시
   
   장쩌민(江澤民·86) 전 총서기에게도 관심이 모아졌다. 18대에서 장쩌민은 다른 원로들과 달리 주석단 한가운데인 후진타오 옆자리를 배정받아 특별한 위상을 과시했다. 장쩌민 1, 2기 정권의 총리를 지낸 리펑(李鵬·84)과 주룽지(朱鎔基·84)는 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으로 소개됐다. 장쩌민의 정적 리펑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다만 국유기업 개혁을 주도하며 ‘철혈재상’으로 불린 주룽지는 백발이 성성했다. 주룽지는 지난 10월 24일 모교인 청화대에서 열린 행사에 왕치산, 류옌동을 대동하고 나와 영향력을 과시했다.
   
   2003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을 끝으로 퇴진한 리루이환(李瑞環·78)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수 출신의 리루이환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계열로 리펑과 차오스가 연이어 퇴진한 뒤 장쩌민에 비판적 입장을 보여왔다. 1992년 남순강화 때 장쩌민을 못마땅히 여긴 덩샤오핑은 대중적 인기가 좋은 리루이환을 총리감으로 검토하기도 했다.
   
   기율위 서기를 지낸 웨이젠싱(尉健行·81)도 모습을 드러냈다. 차오스 계열의 웨이젠싱은 1995년 천시통(陳希同) 베이징시 당서기 축출 직후 베이징을 관할했다. 차오스는 자신의 퇴진 조건으로 웨이젠싱을 상무위에 넣었다. 장쩌민의 측근인 리란칭(李嵐淸·80) 전 부총리도 모습을 보였다. 리란칭은 한때 원자바오와 총리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다.
   
   이 밖에 장쩌민 정권 13년간 최대 실세로 시진핑의 정치적 후견인인 쩡칭홍(曾慶紅·73) 전 부주석, 쩡칭홍과 장시성 동향이자 후진타오와 청화대 동창인 우관정(吳官正·74) 전 기율위 서기, 구 동독 유학파로 리펑 아래서 국무원 비서장을 10년간 지내며 쩡칭홍과 자웅을 겨룬 뤄간(羅幹·77) 전 정법위 서기도 건재를 과시했다.
   
   
   1992년 폐지 이후에도 영향력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 원로정치는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78년 덩샤오핑 집권 후 당 원로들은 ‘중앙고문위원회’라는 일종의 원로회의를 배경으로 중국 정치를 실질적으로 좌우했다. 덩샤오핑, 천윈, 리셴녠, 양상쿤 등 소위 ‘중공팔로(中共八老)’라는 여덟 노인을 배출한 곳도 중앙고문위원회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은 덩샤오핑이었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덩샤오핑의 정적 천윈이었다.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원로정치를 사실상 주도한 인물은 보시라이의 부친 보이보(薄一波)였다.
   
   사실 덩샤오핑이 1982년 12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12대)에서 중앙고문위원회를 만든 것은 당의 고령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당 원로를 고문직으로 넘겨 정리코자 한 일종의 임시조직으로 ‘양로원’이란 말까지 들었다. 공산당적을 40년 이상 보유해야 고문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1기 고문위원회의 최연소 위원은 63세로 평균연령은 74세에 달했다.
   
   하지만 중앙고문위원회에 최대 200명 가까이 당 원로가 운집하면서 중앙고문위원회는 되레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넘어서는 막강 조직이 됐다. 1983년 당 원로 랴오청즈(廖承志)의 장례식 때 그 위상이 드러났다. 랴오청즈의 별세 소식을 통보받지 못한 고문들이 신화문(新華門)을 뚫고 중남해로 몰려와 소란을 피운 것. 당시 당의 연경화를 주도하던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는 적잖은 애를 먹었다.
   
   결국 이 같은 부작용에 덩샤오핑은 중앙고문위원회의 결자해지를 결정한다. 1992년 14차 전국대표대회(14대)를 통해 중앙고문위원회는 공식 폐지한 것. 하지만 중앙고문위원회가 해체된 후에도 인치(人治)가 강한 중국에서 원로정치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됐다.
   
   
   반(反)시진핑 원로는 누구
   
   무력으로 정권을 쟁취한 마오쩌둥·덩샤오핑과 달리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진핑 등 후임 총서기는 모두 원로들의 지원으로 권력을 인수했다. 장쩌민은 보수파인 천윈과 리셴녠의 추천으로 총서기에 올랐다. 후진타오는 쑹핑과 덩샤오핑의 도움으로 총서기에 올랐다. 시진핑도 부친 시중쉰의 도움과 장쩌민, 쩡칭홍의 지원 끝에 총서기에 올랐다.
   
   18대에 출석한 당 원로 10명의 현실정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차기나 차차기 상무위 구성 때도 이들 인사의 이름은 계속 오르내릴 것으로 보인다. 불투명한 인선 절차상 당내 일정 지분을 갖춘 원로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로들을 극복하는 것도 시진핑 신임 총서기의 과제다. 3세대 장쩌민은 덩샤오핑, 양상쿤, 보이보 같은 2세대 원로들에게 재갈을 물린 후 ‘3세대 핵심’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4세대 후진타오는 3세대 장쩌민에 휘둘리며 ‘식물 총서기’란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5세대 시진핑도 3, 4세대 원로들과 비슷한 갈등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각각 공청단 제1서기를 지낸 리커창을 정치국 상무위에, 후춘화(胡春華)를 정치국에 심어놓고 원로 반열에 들어가는 공청단의 거두 후진타오도 걸림돌이다.
   
   18대에 등장한 당 원로 10명 중 장쩌민과 쩡칭홍을 비롯해 주룽지, 리란칭 등 범(汎)상하이방은 시진핑의 우군으로 분류된다. 반면 쑹핑을 비롯해 리루이환, 웨이젠싱, 우관정 등은 대개 상하이방에 맞서 왔다. 장쩌민과 한때 라이벌이었던 리펑과 그 최측근인 뤄간의 정치적 성향은 아직 미지수다.
   
   장쩌민급 원로인 완리(萬里·96)와 차오스(喬石·88)는 주석단에 이름을 올리고도 불출석해 의문을 자아냈다. 완리 전 전인대 위원장은 ‘중공팔로’의 반열에 든 생존해 있는 최고위 당 원로다. 차오스는 덩샤오핑이 후야오방, 자오쯔양의 후임 총서기로 검토했던 인물로,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직후 장쩌민의 총서기 자리를 위협하던 인물이다. 완리와 차오스는 덩샤오핑 노선을 따르는 개혁파로 분류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차오스의 행보다. 장쩌민의 최대 정적이었던 차오스는 지난 6월 자신의 회고록을 펴내는 등 최근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이에 “차오스가 자신의 강제퇴진을 주도한 장쩌민, 쩡칭홍 계열의 시진핑 후계구도에 불만을 표출한다”는 진단도 조심스레 나온다.[End_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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