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때보다 더 많은 지진피해 성금
대지진이 오히려 일본 민족성 강화시키는 계기로
한·일관계 2000년에 전례없던 일
정재정 이사장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정재정 이사장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81 임광빌딩 본관 1층 출입구 오른쪽에는 두 개의 나무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독도연구소’.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를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기구이고, 독도연구소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산하 기구다. 이 빌딩 11층에는 동북아역사재단 정재정(60) 이사장실이 있다. 정 이사장은 서울시립대 교수로 한·일 관계사에 정통하다.

3월 24일 만난 정 이사장은 “최근 국내의 ‘일본 돕기’ 움직임은 한·일관계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한·일관계의 진화 속에서 봤을 때 획기적 사건”이라고 평했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이 일었을 때 ‘우리 역사를 지키자’고 해서 건립된 게 지금의 천안 독립기념관입니다.” 당시 일본은 역사교과서에 한반도 침략을 ‘진출’로, 안중근 의사를 ‘안중근 장사’로, 3·1운동을 ‘폭동’으로 지칭하는 등의 역사왜곡을 시도했다. 이에 비등한 국내 여론은 역사를 바로잡자며 독립기념관 건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때 모인 돈이 500억원 정도였습니다. 지금 일본 대지진 성금은 이미 500억원을 넘었다고 하죠?” 3월 22일 외교통상부는 21일까지 국내 민간단체 및 기업 등으로부터 답지한 성금을 파악한 결과 581억여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왜곡 교과서 채택률 점점 늘어

1982년 일본교과서 왜곡 파문은 ‘극일(克日)’이란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국내에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에 대한 외교적 압박 수위도 높였다. 한반도 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 정부는 결국 교과서검정 조항에 ‘근린제국조항’을 새로 만들었다. ‘아시아 근린 국가들과 관계된 근현대 역사적 사실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국제이해와 국제협조라는 차원에서 필요한 배려를 할 것’을 골자로 한 조항이었다. 정 이사장은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조치다. 자국민뿐만 아니라 주변국 사람들의 역사의식도 배려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게 일본 내에서는 역풍을 불러왔다. 주변국에 너무 숙이고 들어간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일본의 정계 내 우익과 재계가 지원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을 만들었다.

이들이 낸 책은 2001년 일본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또 다시 일으켰다. 당시 새역모의 후소샤 교과서가 문부과학성 검정에 통과했다. 이 교과서엔 일본 역사를 미화·왜곡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해당 교과서의 일본 국내 채택률은 0.03%였다. 일본 대표적 우익교과서 출판사로는 현재 새역모 회장인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 信勝)가 이끄는 ‘지유샤’, 새역모 제3대 회장인 야기 히데쓰구(八木秀次)의 ‘이쿠호샤’가 있다. 일본 자민당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중의원 의원이 회장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고문을 맡은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 - 교과서의련’이 우익교과서 출판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측 입장 변함없어

이로부터 4년 뒤인 2005년 다시 교과서 검정 때가 돌아오자 파동이 일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외에 독도 영토표기 문제가 새롭게 불거졌다. 당시 새역모의 교과서는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전에도 독도가 일본교과서에 조금씩 들어가긴 했지만 고이즈미 당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하는 등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해당교과서 채택률도 0.39%로 증가했고 2009년엔 1.7%로 증가했다.

2011년 3월 말 일본교과서 파동이 또 예고된다. 2008년 개정된 일본 문부성의 ‘학습지도요령’에 따라 검정을 마친 일본 중학과정 교과서가 나온다. 2008년 개정된 해설서는 ‘우리나라(일본)의 영토·영역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도 필요하다’는 조항이 추가되는 등 애국심 및 향토의식 교육을 강화했었다. 중등과정 교과서는 작년 12월까지 문부성의 현미경을 통과했고 이제 일반에 선보인다. 이 중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과목은 역사와 지리교과서다.

일본 문부성은 이번 주말(3월 26일)에 보도 시점을 명시한, 보도자료를 배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일본교과서 검정 결과의 쟁점은 독도 표기 문제입니다. 한국 역사 기술 왜곡 문제는 독도 문제에 묻힐 우려도 있습니다.”

정 이사장은 “이번 일본 역사교과서엔 종래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이 강하게 들어가고, 새역모 교과서 계열의 우파 교과서엔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한다’는 식의 과격한 내용이 들어갈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부터 일본 측과 접촉했는데 일본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일본 내에 역사왜곡 교과서를 채택하는 학교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칭 댜오위다오) 분쟁, 러시아와의 북방영토문제(러시아명칭 쿠릴열도) 등 일본 국내에 영토의식이 고취된 데 이어 이번 대지진 발생으로 일본인들은 민족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안되겠다, 일본이 또 한번 중흥하기 위해서는 메이지유신 때처럼 한번 더 뭉쳐야겠다’며 내향적으로 보수화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정 이사장은 “일본의 정치 리더십이 확고하다면 유연할 수 있으나 현재 일본 정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역사 문제에 있어 오히려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은 영토 문제에 관한 한 여·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호전될 수 있는 기회 속에서 여전히 ‘역사는 역사, 지진은 지진’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는 싸우고, 여론은 의연하게”

정 이사장은 “세계대전 패전, 메이지유신 이후로 일본은 세 번째 대위기를 겪고 있다”고 했다. “이번 지진은 취약한 일본 사회 지도시스템과 부실한 지도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한국이 지진피해로 폐허가 된 일본에 인본주의적 온정을 베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도 보다 유연한 자세로 역사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번 지진 이후로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에 대해 상당히 마음을 열었습니다. 일부 일본 사람들도 처음 보는 한국인의 진심에 감격하고 있고요. 이번엔 일본이 진정성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일본은 끊임없이 독도가 분쟁지역인 것처럼 흠집을 내며 세계적 이슈로 만들고 있다. 정 이사장은 “국내 여론은 보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학계에선 독도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영토였다는 증거를 차분하게 확보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부 차원에선 물론 싸워야 합니다.”

최준석 편집장 / 김경민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