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타 정경숙 숙생들이 조회에서 ‘숙시(塾是)’를 함께 외치고 있다. 운동복 차림의 숙생도 보이지만, 보통은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한다. ⓒphoto 마이니치신문
마쓰시타 정경숙 숙생들이 조회에서 ‘숙시(塾是)’를 함께 외치고 있다. 운동복 차림의 숙생도 보이지만, 보통은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한다. ⓒphoto 마이니치신문

“노다(野田) 선배가 드디어 총리에 올랐어. 마에하라(前原) 선배가 어려울 듯해서 다음번으로 넘어가는가 했는데, 노다 선배가 마지막에 밀어붙인 모양이야!”

일요일이던 8월 28일 오전 8시25분, 요코에 구미(橫江公美)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도쿄발 뉴스를 알렸다. 요코에는 워싱턴 헤리티지재단의 상급 연구원으로, 필자와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15기 동기다. 정경숙에서 총리가 탄생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듯, 요코에는 ‘믿을 수 없어’라는 말을 연발했다.

정경숙 출신이 일본 정치의 최고 지도자가 될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라는 것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이다. 필자는 정확히 18년4개월 전인 1994년 4월, 도쿄 가나가와현 지가사키(茅ヶ崎)에 있는 마쓰시타정경숙에 입숙했다. 5명의 일본인과 함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얻은 기회였다. 하지만 필자가 입숙한 이후에는 외국인을 정규 기수로 뽑지 않고 있다. 정경숙에 들어간 이유는 일본을 알기 위해서였다. 필자에게 정경숙은 정치인 양성소가 아니라, 일본 정신의 원형을 만드는 곳이었다. 정치와는 무관하고, 일본 연구라는 차원에서 시작된 개인적인 도전이었다.

입숙 후 일본어가 서툴러 동기생들을 따라가기에도 바빴다.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확신한 게 하나 있다. 입숙할 당시 이미 정경숙은 15명의 중의원을 배출했지만, 동문들이 언젠가 일본 정치를 이끌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순수한 정열, 빈틈없는 조직력, 궁극적인 의미를 일깨워주는 교육 내용, 신뢰로 구축된 인간관계, 숙생을 위한 전면적 지원…. 정경숙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인간 교육의 현장이었다.

노다 총리 탄생과 함께 한국 신문·방송에서도 정경숙과 관련된 기사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정치인 양성소라는 시각에서 ‘어떤 식으로 정치인을 길러내는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정치계·학계·비즈니스계의 사람들로부터 매번 듣는 ‘정경숙에서 정치가를 만들기 위해 가르치는 강의는 무엇인가?’ ‘정치가로 당선시키는 특별한 노하우는 무엇인가?’라는 식의 물음과 동일선상에 있는 기사들이다.

필자의 귀에 그 같은 질문은 마치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면 스티브 잡스처럼 될 수 있을까?’ ‘얼마나 투자하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나 버락 오바마 같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들린다. 굳이 대응할 필요를 못 느끼지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한 답은 하나다. “정경숙은 정치가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정치가로 나서는 것이다.”

86세 때 시작한 인간 비즈니스

정경숙에 관심이 있거나 정경숙과 같은 시설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설립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를 먼저 주목해야 한다. 정경숙은 1979년 마쓰시타(松下)그룹의 창업자인 마쓰시타가 자신의 사재 70억엔을 털어 만들었다. ‘일본 정치를 바꾸자’는 구호와 함께 출발한 정경숙은, 마쓰시타그룹의 창업자 마쓰시타가 갖는 권위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정경숙에서 창업자 마쓰시타는 숙주(塾主)라 불린다. 정경숙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이자, 항상 정경숙을 지키는 주인이라는 말이다.

정경숙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의 선거 포스터를 보면 크게 두 문구만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 28세 정치 신인. 마쓰시타정경숙 출신’. 현실 정치를 잘 모르지만 젊음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정경숙이 그 같은 ‘열정’을 보증한다는 의미다. 정경숙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숙주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86세 때 만들었다. ‘경영의 신, 마쓰시타가 가장 공을 들인 인재 양성사업’이란 의미에서 선거 포스터 한가운데 ‘마쓰시타정경숙 출신’이란 글자가 크게 들어간다.

일본인에게 마쓰시타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마쓰시타는 5세 때 아버지를 잃은 뒤, 가난으로 9세 때 초등학교를 중단해야 했다. 자전거회사 급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세계적인 마쓰시타 그룹을 일궈냈다. 학연·혈연·지연과는 전혀 무관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오사카(大阪)를 대표하는 기업가다. 기업의 목적을 돈이 아닌, ‘평생고용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환원’이란 일본적 가치로 바꾼 경영철학가이기도 하다. 일본의 세계시장 제패가 코앞까지 다가왔던 1980년대 중반, 전 세계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은 예외 없이 ‘평생고용과 노사화합에 기초한 경영’을 내세운 마쓰시타의 철학을 바이블처럼 대했다.

일본 국내에서 ‘내셔널’, 외국에서는 ‘파나소닉’이란 브랜드로 팔린 마쓰시타그룹의 전자제품은 1960년대 말부터 ‘떠오르는 태양(Rising Sun)’으로 경제대국에 끼기 시작한 일본 경제의 자화상에 해당한다. 전국 어디를 가도 똑같은 구조를 가진 내셔널 대리점은, 현재의 스타벅스 커피점과 같이 마을의 간판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지금은 한국과 중국 전자제품사에 주도권이 넘어갔지만, 라디오·선풍기·냉장고·에어컨·음향기기·텔레비전·비디오·카메라와 같은 가정용 전기제품은 마쓰시타그룹을 통해 일본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50대 이상 시골 출신 장년층은 이해하겠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집에 흑백 텔레비전이 들어오면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살아가는 재미, 돈을 버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추억의 살림살이’가 바로 마쓰시타 제품이다.

경영적 관점에서 시작한 인재 양성

마쓰시타가 정경숙을 세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정치인에게 투자해 일본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직접 효율적인 정치인을 길러서 일본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경영의 논리이다. ‘기업경영=인간경영’으로 본 마쓰시타는 지도자 양성도 경영의 논리로 출발한다. 경영적 관점에서 출발한 정경숙이지만, 숙주를 옆에서 보좌하는 최고 자문에 오른 인물은 전국금속노조 연합회장인 미야타 요시지(宮田義二)이다. 일본 노동운동사를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직능별로 볼 때 전후 일본 최고의 강성노조는 금속노조연맹이다. 키 155㎝ 정도의 미야타는 일본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

숙주는 노동조합과 원활한 관계를 통해 ‘평생고용’이란 일본식 경영 시스템을 정착시킨다. 미야타는 노사화합을 위한 마쓰시타그룹의 자문으로 1950년대부터 숙주와 친하게 지냈다. 미야타는 정경숙 강의에서 일본을 근본부터 바꾸기 위한 인재 양성소 건립을 숙주에게 자신이 건의했다고 밝혔다. 미야타는 필자가 입숙했을 때 교장에 해당하는 숙장(塾長)을 맡고 있었다. 숙주가 노환으로 몸을 움직이기 어렵던 1985년 숙장에 취임해 2000년까지 15년간 재직한다. 상징적인 자리지만 생전의 숙주의 이미지에 버금가는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미야타 숙장은 “정경숙 설립 당시 대부분의 정치 관계자들은 ‘수년 내에 사라질 돈 많은 부자의 취미’ 수준으로 봤다”고 회고했다. 정치인들의 반감과 질시 속에서 졸업생도 내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란 예측도 있었다고 했다. 기존의 정치가들을 무능한 바보로 만든다는 점에서, 정경숙 출신으로는 파벌 중심의 일본 정치에 명함조차 못 내놓을 것이란 ‘악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같은 기우들은 1기 숙생이 되기 위해 수많은 인재가 모여들면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1기생은 전부 23명이다. 대학졸업생, 직장인, 공무원, 전자기술자, 음악가, 축산농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신문 지면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 당시 1기생 중 입학 인터뷰에 응하는 와세다대학 출신의 젊은 숙생 노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필기시험 NO!

정경숙은 필자가 입숙했을 당시도 그랬듯이 필기시험이란 게 없다. ‘25세부터 35세 사이로 세상에 도움을 주면서 살려는 사람’이라면 지원할 수 있다. 학벌도 필요 없다. 숙의 선배 중에는 고졸 학력도 있다. 필자의 경우, 국적에 관한 조항이 특별히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숙의 관계자로부터 ‘국적불문’이란 유권해석을 받은 뒤 입숙원서를 넣었다.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일본국적 청년에 한해’라는 조항이 따로 없었다.

필자의 입숙이 허락된 것은, 당시 숙두(塾頭)이던 오카다 구니히코(岡田邦彦)가 추진하던 정경숙 이념의 아시아 확산 방침과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숙두는 실질적인 숙의 경영책임자로, 숙장이 명예직인 것과 다르다. 정경숙 1기생인 오카다 숙두는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가 중국과 수교한 뒤 이뤄진 일·중(日中)청년교류협회 일본 측 학생 대표를 맡은 인물이다. 1970년대 도쿄대 법학부생 오카다는 중국 전역을 돌며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중국 학생들을 면접했다. 당시 일본에 오고 싶어 하던 중국 학생들의 경쟁률은 500 대 1이 넘었다고 한다. 서구 지향적인 일본인과 달리,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오카다 숙두의 역사관 덕분에 비교적 쉽게 입숙하게 된 것이다. 정경숙에 있는 동안 한국·중국·대만 현지 연수가 이뤄진 것도 오카다 숙두의 아시아 중심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경숙의 아시아 중시 방침은 ‘21세기가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숙주 마쓰시타의 선견지명으로도 연결돼 있다. 현재 중국의 시대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1960년대, 중국이 중공(中共)으로 불리던 문화혁명 당시에 ‘중국을 21세기 미래’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주는 1960년대부터 중국 시대를 예언했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일본 제품 상업광고를 내보낸 기업은 마쓰시타다. 숙주는 문화혁명 기간 중이던 1960년대 중국 지도부와 만나 호의를 표시하면서, 거금을 내고서 마쓰시타 전기제품을 선전하는 라디오 광고를 중국 방송에 실어보냈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

마쓰시타 전기제품은 중국에서 살 수도 없을 때였다. 미래를 생각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광고를 했다. 덕분에 현재 50대이상의 중국인은 마쓰시타그룹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 어떤 일본 기업보다도 호감을 갖고 있다. 일본 이상으로 경영의 신 마쓰시타에 대한 공부가 활발한 곳도 중국이다. 오카다 숙두와의 인연으로 입숙이 허락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입숙 조건이었다. 입숙이 결정되면 회사에 다니던 사람은 무조건 퇴직을 해야 한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고, 아예 배수진(背水陣)을 치라는 의미이다. 정경숙이 제공하는 연구비는 상위 기업에 취직한 대학 졸업생의 월급에 준해 산정된다. 서울방송(SBS) 보도국 기자로 일하던 필자는 정경숙 입숙과 함께 회사를 그만뒀다.

입숙원서는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에 관한 3000자 분량의 에세이가 전부다. 이어 곧바로 면접시험을 통해 최종 선발자를 가린다. 면접은 보통 3회에 걸쳐 이뤄진다. 자신의 생각을 선배들 앞에서 밝히는 오픈 스피치 면접도 있다. 말을 얼마나 잘하고,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실현성 있고 진실성 있게 미래를 설계하는가를 판단한다. 일본 사회에서 가장 중시 여기는 ‘신뢰’를 테스트하는 시간이다.

마지막 면접의 경우, 숙주가 직접 면접을 했다. 정경숙 기수는 내부적으로 두 개의 파벌(?)로 나뉜다. 숙주로부터 면접시험을 받고 입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숙생이다. 마쓰시타 숙주가 직접 뽑은 것은 1기부터 9기까지다. 필자의 경우 숙주가 사망한 지 5년 뒤에 들어갔기 때문에, 숙생 가운데 서자(庶子) 그룹에 속한다. 생전에 제작된, 오사카 사투리로 알아듣기 힘든 비디오 강연을 통해 숙주의 사상과 인간미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밝게 만드는 사람을 뽑아라!

마쓰시타 정경숙 숙생 시절, 정경숙 정문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마쓰시타 정경숙 숙생 시절, 정경숙 정문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흥미로운 것은 살아생전 숙주가 행한 면접시험의 내용이다. 숙주가 인터뷰에서 가장 중시 여긴 것은 학력, 리더십, 언변 ,배경이 아니다. ‘운(運)과 애교(愛嬌)’다. 행운이 얼마나 따를지, 주변을 얼마나 밝게 만들고 활기찬 생활을 하는지 여부가 당락을 정한다. 입숙 당시 필자는 면접자 판단 기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운과 애교가 정경숙의 취지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설령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운과 애교 유무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넓은 세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절대적인 시간과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경영의 신으로, 80대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세상과 하늘의 이치를 파악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머리나 외모, 배경이나 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필자는 숙주가 말했던 ‘운과 애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게 됐다.

운은 하늘의 뜻이다. 운명론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르게 된다. 무리수를 두고, 타인과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에서 불행은 시작된다. 더불어 후천적으로 노력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선천적으로 운이 따르는 사람은 드물다. 숙주는 평소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고유한 능력을 타고난다고 말한다. 자신만이 가진 탁월한 능력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접목될 경우, 성공이 보장된다. 접목 여부는 바로 운에 따른 것이다.

애교는 세상을 여유롭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내면적 성찰이다. 일본 속담에 ‘남자는 배짱, 여자는 애교(男は度胸, 女は愛嬌)’라는 말이 있다. 애교는 원래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캐릭터다. 그러나 숙주가 말하는 애교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감정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예의를 의미한다. 즐겁게 웃고, 주변을 밝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주목할 부분은 거짓 애교다. 역시 일본 속담에 ‘밖으로는 애교를 보이면서도 안에서는 퉁명스럽고 무관심하게 대한다(外愛嬌の內そんぶり)’란 말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다. 면접에서 거짓 애교를 보이며 숙주를 속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숙주의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면접 시간이 아닌, 면접이 끝난 뒤 출구를 향해 등을 돌릴 때부터다.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심사위원들 모두에게 밝은 이미지를 남긴 채 문을 닫고 조용히 사라지는 1~2초 동안의 모습이다.

운과 애교와 더불어 정경숙에서 인간관계의 덕목으로 중시하는 건 ‘잔심(殘心)’이다. 숙생들은 정경숙을 방문한 외부 강사나 손님이 떠날 때 문앞까지 마중을 나가서 차를 타는 손님을 배웅한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손님을 태운 차가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든다는 점에서 다르다. 떠나는 손님이 알아줄지 여부에 관계없이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작별의 정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예법, 바로 잔심이다. 면접이 끝난 뒤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문을 닫기까지 보여주는 행동은 평소의 사고방식을 증명하는 본능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잔심인 동시에 애교다.

교과서 없이 외부 강사와 현장 체험

‘정경숙에서 배우는 교과서가 무엇인가?’ 정경숙과 관련해 필자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답은 ‘없다’이다. 숙이 강조하는 자습자득(自習自得)이 유일한 공부법이다. 모두가 구입해서 읽어야만 하는 교과서가 따로 없다. ‘세상에 도움이 되고 믿을 만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내용’이 공부할 대상이다. 오픈 텍스트인 셈이다.

마쓰시타의 어록(語錄)을 중심으로 한 숙주의 사상과 삶에 관한 공부를 1주일에 한 번 정도 하고, 2주일에 한 번씩 이뤄지는 다도(茶道)가 유일한 필수 과정이라고나 할까? 대부분의 시간이 자유로, 따로 전문 과목의 선생도 없다. 외부 강사가 선생으로 초대된다. 한 번에 2시간 정도 이뤄지는 강의는 외부 강사가 살아온 인생과 하는 일을 알려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혜를 중시하면서 인간적으로 존경이 가는 사람이 외부 강사로 초청된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뒤늦게 공부해 강단에 선 도쿄대 농학교수,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가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 동행한 공안담당 경찰, 북한의 농작물 흉작 원인이 특정 해충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국제문제 전문가, 반도체와 오늘날의 아이폰과 같은 액정 단말기가 세계를 주도하는 신산업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게이오(慶應)대 교수, 빈민활동을 벌이는 방글라데시 노동운동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 숙주와 개인적으로 면식이 있거나 정경숙 설립 때 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원로들이 강사로 온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멘토·멘티 같은 관계의 강의다. 초빙 강사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포함된다.

18기 이후 교육과정이 3년으로 줄었지만, 필자 때는 5년 과정이었다. 1년째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동연구에 들어가고, 2년째부터 개인 연구로 테마를 찾아 현장으로 간다. 정치가를 지망하는 숙생의 경우 대부분 자신의 출마 지역에서 활용될 수 있는 분야를 연구한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관광산업진흥 노하우’에 관한 것이 한 예다.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 연수도 가능하다. 외국 대학원에 가거나, 현지 비정부기구(NGO)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연구에 필요한 비용은 전부 정경숙이 댄다.

8기생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는 농업과 관련된 개인 연구를 위해 1980년대 말 미국 아칸소주에서 현장 체험을 했다. 당시 아칸소에서 일본의 정경숙 학생이 농업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큰 지방 뉴스였다. 신문에 얼굴이 실리고 기사가 나가면서 당시 주지사이던 빌 클린턴의 파티에 초대됐다. 얼떨결에 초대돼 클린턴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함께 사진을 찍었다.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 이듬해인 1993년 겐바는 중의원에 진출했다. 당시 선거 포스터는 ‘마쓰시타 정경숙 8기생, 젊음’이란 말과 함께 ‘클린턴과 악수하는 사진’으로 채워졌다. 현재 민주당 소속 6선 중의원으로 내각부의 과학기술담당 특명대신으로 일한 바 있는 겐바 의원은 가까운 시일 내에 총리가 될 게 확실하다고 얘기된다.

필자의 경우, 각국의 지도자로부터 현지의 상황과 목소리를 직접 듣는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 리더십’을 개인 연구 테마로 잡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124개국을 돌아다니면서 특정 분야에 관한 각국의 리더들을 직접 만나 목소리를 담은 뒤 정경숙에 비디오와 글로 제출했다.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 인도 콜카타의 성자 테레사 수녀,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 미얀마의 정치지도자 아웅산 수치, 한국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필자의 리더십 연구를 위해 직접 만났던 인상 깊은 인물들이다.

매일 아침 청소시킨 이유는

정경숙 입숙 1년째는 집단생활을 한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식사도 함께 한다. 1년째 생활 기간 중 가장 중시하는 세 가지를 꼽자면 청소와 다도(茶道), 그리고 100㎞ 행보(行步)를 들 수 있다. 필자만이 아니라 정경숙 출신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정경숙의 혼을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청소는 오전 6시 기상과 함께 시작된다. 아침 체조를 끝낸 뒤 곧바로 한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1년째 숙생과 교직원들, 객실에 투숙한 외부 손님도 참가한다. ‘큰일을 하기전에 먼저 네 주변부터 깨끗이 하라’는 숙주의 생각을 반영한 의식이기도 하다. 만년에 숙주는 정경숙에 들러 다실에서 잠을 잔 뒤, 아침 일찍 일어나 함께 청소를 하기도 했다.

청소는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다. 대나무 빗자루로 이뤄지는 청소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는 규칙도 없다. 별로 청소할 것 같지도 않은 곳을 매일 쓸고 닦는다. 필자의 경우, 특히 ‘봄 청소’ 때는 혼돈을 겪어야만 했다. 정경숙의 입구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가 50여그루 있다. 알다시피 벚꽃 잎은 아주 작고 얇아서 빗자루로 쓸어내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예외는 없다. 안 쓸리는 벚꽃 잎을 몇 번이나 빡빡 긁으면서 쓸어 모은다. 손으로 하나씩 주워 모으는 숙생도 있다.

청소 도중 내내 ‘그냥 둬도 아름답고, 청소뒤 곧바로 또 떨어질 텐데, 왜 매일 엄청나게 떨어지는 벗꽃 잎을 쓸어 모으는지’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막 떨어진 벚꽃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떨어져 시들어 말라버린 벚꽃을 없애줘야만 한다’는 일본인의 미의식(美意識)을 안 것은 정경숙을 떠날 때쯤이었다.

차의 예법에 무게 두는 다도

다도는 보통 2주일에 한 번씩 정경숙 내에 있는 세 칸짜리 방의 다실(茶室)에서 이뤄진다. 숙주가 살아생전 다도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다도의 명사들을 어드바이저로 받아들이면서 정경숙의 필수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에서 다도는 한국의 제사의식만큼이나 중요한 예법이다. 소위 최고 신붓감으로 꼽히는 명문 집안의 여성이라면, 가야금과 같은 고토(琴), 향도(香道)와 더불어 다도에도 능해야 한다. 지성인·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경숙의 다도는 일본 다도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우라센케(裏千家) 스타일이다. 신선한 차를 갈아서 더운 물에 녹여 마시는, 분말형 ‘맛차(抹茶)’다. 우라센케에서 파견된 다도 선생 두 명이 와서, 저녁 7시부터 시작해 2시간 정도 진행된다. 최근 우라센케의 본가(本家)가 16대 센소시쓰(千宗室)로 넘어갔지만, 필자가 공부할 당시에는 15대 본가인 센겐시쓰(千玄室)가 직접 와서 다도를 지도해 주기도 했다. 센겐시쓰는 우라센케를 잇는 유일한 혈육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 특공대 비행단인 가미카제(神風)로 나선 인물로도 유명하다. 전사할 경우 500년 역사의 우라센케가 사라질 운명이었다. 죽음을 당할 전선에 배치되기 직전, 전쟁이 끝나면서 살아남게 됐다. 하늘이 내린 운이다.

입숙 당시 정경숙에는 숙주 마쓰시타에 맞먹는 ‘그림자 숙주(影の塾主)’라는 별명을 가진 숙원(塾員)이 있었다. 정경숙 정문 수위인 요시다(吉田)이다. 당시 70대의 요시다는 입숙 시험을 치르러 온 사람들 중 누가 붙고 떨어질지를 정확히 예견하는 것은 물론, 누가 숙을 떠나 정치가로 당선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얘기됐다. 아무 말도 안 하지만, 숙생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생전 숙주의 마음을 읽은 유일한 인물로, 1기부터 22기까지 정문을 지킨 정경숙의 역사이기도 하다.

“욕심 내면 안 돼! 자신에게 맞게 사는 것이 행복이야!” 귀가 먹고 간사이(關西) 지방의 사투리가 심한 탓에 오래 얘기를 나누기는 어려웠지만, 필자에게 말했던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당시 그림자 숙주를 가까이서 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젊어서 사선(死線)을 넘나든 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철학이 다르다는 점이다. 요시다는 우라센케의 15대 본가인 센겐시쓰처럼, 가미카제 출신이다. “(가미카제 사람들) 모두가 힘들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전부 거짓말이야! 거기에도 웃음과 즐거움은 있었어.” 요시다는 자살 특공대 훈련을 받던 중 전쟁이 끝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진짜 극한까지 간 사람은 과장을 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솔직히 전달할 뿐이다. 요시다 수위를 생각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인들이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사선을 넘나든 데 대한 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다도 얘기로 돌아오면, 같은 동양권이지만, 다도만큼 한국·일본·중국 3국 간의 개념 차이가 분명한 것도 없다. 3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도에서 차지하는 ‘차 맛의 비중’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일본 다도에서 차 맛이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은 다도를 통틀어 1할 정도에 그친다. 차와 더불어 찻잔, 꽃, 그림, 과자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맛있는 차를 마시기 위한 다도가 아니다. 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 차를 마시는 동안의 예법, 차를 마시고 난 뒤처리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일본 다도이다.

정경숙에서의 다도는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이뤄진다. 다실과 다실 주변 청소, 나무와 장식할 꽃의 준비와 정리정돈이다. 맛있는 물과 연기가 나지 않는 숯을 준비하는 일도 중요하다. 다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신발을 가지런히 모은 뒤 무릎으로 기어들어가면서부터 다도가 시작된다. 차를 대접하는 사람이 만드는 차를 조용히 지켜본다. 이어 제공되는 차를 마시는 시간은 길어야 1~2분 정도다.

일본 다도의 출발은 16세기 센리큐(千利休)에서 시작된다.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 다도가 건너가 영향을 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통일된 일본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도입된 ‘사무라이 의식’이 다도의 출발점이다. 정경숙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센리큐의 다도는 숨 쉬기조차도 어려울 정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이뤄진다. 웃고 대화를 나누는 다회(茶會)가 아닌, 궁극적 가치를 찾아가는 도(道)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의식이다. 해가 넘어간 직후,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 다도의 최적기이다.

도요토미는 센리큐의 다도예법을 따르지 않는 사무라이를 다도가 끝나는 즉시 처형했다고 한다. 스모 경기에서 보듯, 일본인은 한치의 실수도 인정치 않는,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 ‘잇폰쇼부(一本勝負)’를 문화의 근간으로 한다. 물을 데우기 위한, 화로 속 숯불의 위치조차 이미 정해져 있다. 정경숙에서의 다도는 ‘집단 속에 살아가는 잇폰쇼부’라는 일본 문화의 맥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예다.

전통으로 정착된 극기훈련

마쓰시타 정경숙 설립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숙주(塾主)로 불린다. ⓒphoto 조선일보 DB
마쓰시타 정경숙 설립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숙주(塾主)로 불린다. ⓒphoto 조선일보 DB

정경숙의 연례행사로, 숙생과 졸업한 선배들 모두가 참여하는 ‘100㎞ 보행(步行)’이 있다. 정경숙은 전차를 타고 도쿄 남서쪽으로 1시간을 가면 나타난다. 태평양과 후지산(富士山)이 보이는 곳에 정경숙을 만들라는 숙주의 뜻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바다 냄새가 나고, 태풍이 불 때면 모래바람으로 눈을 뜨기 어렵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본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후지산이 눈앞에 다가선다. 일본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방향과 더불어 후지산이 보이는지, 후지산을 향하는지 여부다.

정경숙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소설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의 무대이자, 서핑으로 유명한 쇼난(湘南) 바다를 끼고 있다. 1960년대까지 일본 최고의 신혼여행지였던 가마쿠라(鎌倉)와 미우라(三浦)반도가 정경숙 동쪽에 있다. 100㎞ 보행은 쇼난, 가마쿠라, 미우라 반도를 걸어서 순회하는 극기훈련이다. 밤 12시에 출발해 다음날 오후까지 24시간 정도 계속된다. 1년차 숙생뿐만이 아니라 선배나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다.

‘얼마나 빨리’라는 기록이 아닌, ‘완주’ 여부에 주목한다. 물론 체력에 무리가 갈 경우 중간에 기권할 수가 있다. 행사가 이뤄지는 동안 졸업생들은 10㎞ 단위로 설치된 캠프에서 숙생이 어디에 있는지를 워키토키로 확인해 가며 숙생의 완주를 돕는다. 음식과 구급약도 준비된다. 사실 참가한 숙생들은 걷기만 하면 된다. 10명 안팎의 보행자를 위해 선배와 스태프들로 구성된 50여명의 도우미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준비’에 들어간다. 팀 플레이를 통한 극기훈련인 셈이다.

대부분의 숙생들은 완주를 하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발에 생긴 물집으로 수주일을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고, 다리 근육이 늘어나면서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100㎞ 보행은 각종 후유증으로 인해 매년 폐지 여부가 거론된다. 필자가 입숙했을 때에도 ‘과연 무리해서 행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해변을 걸어가는 극기훈련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선배들 모두가 벌여온 ‘전통’이기 때문이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일으켜 세우기는 어렵다.

정경숙이 지향하는 교육은 한마디로 전인교육이다. 특별하게 뛰어난 리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의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을 길러내자는 것이다.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이중 잣대가 아닌, 자신에게 더욱 냉정하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키우자는 것이 정경숙 교육의 핵심이다.

숙주는 정경숙을 세울 당시, “정경숙 출신 인물이 문부성 대신으로 들어가 제대로 된 인간교육을 담당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했다. 개숙(開塾) 이후 32년 만에 문부성 대신을 넘어 총리까지 배출하게 됐지만, 일본 열도 최고의 권력가로서가 아닌 인간 교육을 위한 최상의 모델로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 숙주의 뜻이었을 것이다.

유민호 퍼시픽 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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