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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호] 2012.05.14

80년대 외대 용인캠퍼스선 도대체 무슨 일이?

경기동부연합의 산실

정장열  차장 

▲ 1989년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씨(왼쪽)가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오는 장면. 당시 임씨는 외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photo 조선일보 DB
비례대표 부정선거로 위기를 자초한 통합진보당 당권파, 특히 이들이 몸담았던 재야단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 산하 경기동부연합 출신의 면면에는 한 가지가 눈에 띈다. 핵심 인물 대부분의 출신 대학이 한국외국어대(이하 외대)라는 점이다. 경기동부연합의 실세라고 얘기되는 이석기 비례대표 2번 당선자(82학번)를 비롯해 우위영(84학번) 당 공동대변인, 김재연 비례대표 3번 당선자(99학번), 정형주 전 민노당 경기도당위원장(84학번), 김기창 전 민노당 성남시협의회의장(85학번), 이양수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조직실장(85학번), 윤원석 전 민중의소리 대표(86학번), 윤용배 전 민노총 사무처장(86학번), 편재승 전 민노당 사무부총장(87학번) 등이 모두 외대 출신이다.
   
   특히 이석기 당선자와 윤원석 전 대표, 정형주 전 위원장 등이 나온 외대 용인캠퍼스는 ‘경기동부연합의 산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용인캠퍼스 인맥들이 주축이 돼 경기동부연합을 구축했고 운동권 내에서 다른 분파를 압도하는 위상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인터넷 매체인 ‘민중의소리’ 대표를 지낸 윤원석씨는 지난 총선에서 성남 중원 지역구 출마를 시도하다 과거 성추행 전력이 논란을 일으켜 출마를 포기한 인물이고, 정형주 전 위원장은 경기동부연합의 숨은 실세로 통한다.
   
   
   운동권들의 백화점이자 해방구
   
   통합진보당 소속은 아니지만 이번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임수경씨도 외대 용인캠퍼스 86학번이다. 임씨는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참석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특정 대학 특정 캠퍼스 출신들이 운동권 내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됐을까. 1980년대, 1990년대 외대 용인캠퍼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외대 운동권 출신들은 용인캠퍼스를 ‘애국외대 통일왕산 캠퍼스(약칭 왕산캠)’라고 부른다. 1981년 8월 문을 연 외대 용인캠퍼스의 주소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산 89번지에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외대 용인캠퍼스는 ‘운동권의 백화점’으로 통했다. 온갖 운동권 분파들이 활동하며 서로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였다. 외대 용인캠퍼스 운동권 출신인 조모(48·사업)씨는 “내 기억으로 용인캠퍼스에는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계가 양대 축을 이뤘지만 그밖에도 가장 원리주의적인 극좌 이론 신봉 집단인 트로츠키파도 있었고 NL도 주사(主思·주체사상의 줄임말), 비주사 등으로 치고받았다”며 “한때 17개의 운동권 분파가 세력 다툼을 벌인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운동권 분파들은 신입생들을 확보해 세력을 넓히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게 벌였다. 당시는 대학의 수도권 분교가 생기기 시작한 초창기라 교통이 불편해 많은 학생들이 서울에서 통학하지 않고 자취나 하숙을 했다. 또 성적이 어정쩡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경우가 많아 서울에서 밀려났다는 허탈감과 서울 집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해방감이 캠퍼스를 동시에 지배했다. 운동권 선배들이 후배들을 포섭해 체제 저항적인 교육을 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인 분위기였다는 것이 당시 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의 회고다. 앞서 말한 조씨는 “당시 대학 근처 자취방과 하숙집에서는 매일같이 대자보를 쓰거나 운동권 서적 학습이 이뤄졌다”며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운동에 빠져드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주목
   
   외대 용인캠퍼스가 운동권 출신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은 계기는 임수경 방북 사건이었다. 당시 불어과 4학년이던 임수경씨는 평양축전에 가서 ‘통일의 꽃’으로 환대를 받았고, 이후 일반인으로는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이 사태를 계기로 임수경씨는 학교에서 제적됐지만 1993년 복학이 허용돼 입학 8년 만에 졸업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외대 용인캠퍼스를 운동권 사이에서도 주사파 NL의 주요 거점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1983년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세를 넓혀가기 시작한 주사파들은 1984~1985년 무렵 지방 캠퍼스에서도 주류로 부상했다. 임수경이 방북할 당시 이미 용인캠퍼스는 주사파 NL이 장악하고 있었다. 임수경 방북 1년 전인 1988년 외대 용인캠퍼스에서 발간되는 학보 ‘청맥’에 김일성 연설문 두 건이 그대로 게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외대 용인캠퍼스는 1993년 결성된 한총련(한국대학생총연합·1987년 만들어진 전대협의 후신) 산하 경인총련의 하부 조직인 경기동부의 핵심 역할을 했다. 경인총련은 서울을 대표하는 서총련, 광주 전남을 대표하는 남총련 등과 함께 한총련의 대표적인 학생운동권 지역 연합체였다. 이 경인총련을 구성한 경기동부, 인부(인천·부천)지구, 경기남부 중에서도 경기동부는 주사파 정예들이 모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경기동부 멤버들이 나중에 고스란히 전국연합 산하 경기동부연합의 구성원으로 옮겨갔다.
   
   당시 한총련 경기동부는 외대 용인캠퍼스와 함께 한양대 안산캠퍼스, 경희대 수원캠퍼스, 경원대 총학생회 등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외대 용인캠퍼스는 경기동부의 주축이었다. 1996년 한총련 집행위원장을 지낸 허현준 시대정신 사무국장(전 전북대 총학생회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용인캠퍼스가 경기동부의 주축 역할을 했고 이후에는 경희대가 더 세졌다”며 “행동대로서 명성을 날린 남총련과는 달리 경기동부는 일사불란한 조직과 노선으로 독특한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허 국장은 “당시 한총련 중앙간부 45명 중 외대 용인캠퍼스 3명, 경희대 수원캠퍼스 2명 등 모두 5명의 경기동부 출신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개인 의사를 표시하는 바가 별로 없었고 모두 조직의 지침에 따라 통일된 입장을 신속하게 정리해냈다”며 “특히 한총련의 전술이 갑자기 바뀌어도 지역 활동가들과 중앙 간부들의 의견이 모두 일사불란하게 정리되는 신속함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선후배 남다른 결속력 과시
   
   운동권 출신들은 경기동부의 핵심 역할을 한 외대 용인캠퍼스 출신들이 선후배 사이에 남다른 결속력을 보였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한번 자기 밑으로 들어온 후배들은 선배들이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외대 용인캠퍼스가 운동권 내에서 남다른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는 운동권 내에서 성남·용인 지역이 갖는 지역적 특색이다. 성남·용인 지역은 1987년부터 본격화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노동 현장 진출 대상지로 가장 각광받던 곳이다. 성남은 1970년대부터 서울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곳이다. 성남·용인에는 1980년대 소규모 영세 공장들도 많았다. 열악한 상태에 빠져 있던 이 지역 빈민과 노동자들은 의식화 대상을 찾던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경기동부 소속 운동권 학생들은 졸업 후 성남·용인 지역의 공단과 빈민가에 집중적으로 내려가 현장 활동을 벌였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들 역시 대체로 성남·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커왔다.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현장 운동가로 크기에 좋은 배후지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 2003년 민혁당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석기 당선자(오른쪽)가 교도소 측의 배려로 특별 휴가를 받고 출소해 앞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된 민혁당 중앙위원 하영옥씨와 서로 끌어안고 있다. photo 연합뉴스
또 하나는 민혁당의 존재다. 민혁당은 1992년 3월 서울대 구내에서 ‘민족민주혁명당’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종북(從北) 지하당이다.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현 시대정신 편집위원)이 북한에 잠입해 북한 주석 김일성을 만나고 내려온 후 만들어졌다. 당시 민혁당 중앙위는 김영환과, 김씨의 서울대 법대 동기이자 서울대 동아리인 ‘고전연구회’에서 활동을 함께한 하영옥, 그리고 박모씨 세 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세 사람은 각자 포섭한 인맥들로 민혁당 조직을 구성했고 중앙위원회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등 지역별 위원회를 뒀다. 익명을 요구한 공안 전문가는 “당시 민혁당은 김영환, 하영옥과 박씨가 각자 포섭한 인물들로 조직을 구성했는데 이들은 북한 지하당 구축 원칙인 복선 포치(布置)와 단선 연계에 충실했다. ‘복선 포치’ 원칙은 여러 개의 라인을 만들어 한 라인이 노출돼도 조직이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단선 연계’ 원칙은 옆 라인은 모르게 해 한 라인이 무너져도 옆 라인은 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앙위 3인들조차 자기 선 외에는 서로 하부 인맥들을 몰랐다. 민혁당원들 사이에도 상하 직접 연결된 사람들 외에는 서로 존재를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예컨대 전북위원회의 경우 모두 8명의 민혁당원이 있었지만 서로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중앙위원 3인 중 박씨는 민혁당 존재가 발각돼 수사가 시작됐을 때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상태로, 전향해 수사에 적극 협조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신원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당시 민혁당 중앙위원 중 외대 용인캠퍼스, 경기동부연합 등과 관련해 주목받는 인물은 하영옥이다. 당시 하영옥이 포섭해 민혁당 산하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삼은 인물이 외대 용인캠퍼스 출신의 이석기 당선자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하영옥이 민혁당 이전 주도했던 반제청년동맹 시절 처음 만났다는 말도 있다.
   
   
   이석기와 하영옥의 인연
   
   민혁당 산하 전북위원회 조직원으로 활동했던 허현준 시대정신 사무국장은 “민혁당 조직 구축 당시 김영환 선배가 전북위원회를 맡았고 하영옥이 수도권 조직 구축을 담당한 걸로 알고 있다”며 “1997년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김영환 선배가 전향해 민혁당 해체를 선언한 후 전북위원회 산하 조직원들은 함께 대거 전향을 했지만 하영옥 산하 수도권 조직은 전향한 사례가 없다. 하영옥은 민혁당 해체 선언 후에도 오히려 이석기 등과 함께 조직 재건에 나섰다”고 말했다.
   
   허 국장은 “민혁당 핵심 당원이 100여명 정도였다고 들었는데 민혁당 수사가 진행된 후 신분이 드러나 처벌을 받은 사람은 10여명에 불과했다. 민혁당 당원들은 일당백의 훈련된 운동가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신분이 드러나지 않고 전향도 하지 않은 채 아직도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 전향해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 중 나처럼 전북대 출신 등이 적지 않은 것도 김영환 선배의 영향이다. 하지만 전향해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 중 외대 운동권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 하영옥은 검거 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대공 전문가인 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 유동렬 연구관은 지난 1999년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하영옥을 면담한 적이 있다.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람들을 상대로 진행하던 법무부 교정국의 순화 면담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유 연구관이 기억하는 하영옥은 “전향 권유가 전혀 먹히지 않는 어둡고 침울한 인물”이었다.
   
   “당시 하영옥의 첫 마디는 ‘이런 대화를 싫어한다’였다. 그러곤 자기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조건은 내가 질문을 하나 던지면, 자기도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받아들였고 그는 ‘자본주의가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나’ 등 체제와 관련된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실체는 민혁당 재건파 조직”
   
   유 연구관에 따르면, 하영옥은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줄곧 ‘김 비서님’이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주사파들이 김정일이 쓴 것으로 믿고 있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글이 사실은 황장엽 선생이 쓴 것이고, 망명한 황장엽 선생이 이를 확인해줬다는 말을 해도 하영옥은 “김 비서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하영옥은 전향한 김영환에 대해서는 “걔 얘기는 하기 싫다”면서도 “조직을 배신한 것은 맞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등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하영옥은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4년만 복역한 후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3년 4월 특별사면돼 석방됐다. 그는 석방 후 3년간의 도피생활 끝에 2002년 5월 검거된 이석기 당선자의 석방운동을 벌였고,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 당선자 역시 2003년 8월 사면돼 석방됐다. 이 당선자에 대한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이 당선자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혁명을 통한 국가 변란을 목표로 삼아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고, 외대 용인캠퍼스 후배들을 민혁당에 가입시켜 활동하도록 한 것으로 돼 있다. 현재 공안당국은 하영옥의 활동 재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허현준 사무국장은 “경기동부연합은 민혁당 사건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거쳐간 중간 단계로 경기동부연합은 껍데기이고 실체는 민혁당 재건파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외대 용인캠퍼스 인맥이 구축한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명칭은 대외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1991년 전국연합 결성 때는 12개 지역 산하단체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 12개 단체는 서울연합, 경기남부연합, 경기북부연합, 부산연합, 대구경북연합, 인천부천연합, 광주전남연합, 충남대전연합, 충북연합, 전북연합, 경남연합, 제주연합 등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전국연합에 공식적인 산하단체로 이름을 올린 이후 적극적으로 세를 넓혀갔다. 2001년 9월 전국연합이 충북 괴산의 보람원 수련원에서 개최한 ‘2001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에 참석한 513명의 대의원 수를 보면 경기동부연합의 대의원 수는 35명으로, 각각 40명의 대의원이 배정된 인천연합·부산연합·울산연합의 뒤를 이었다. 당시 경기동부연합 대의원 명단에는 특이하게 35명 중 10명의 이름은 적시하지 않고 ‘10명 미정’이라고만 표기돼 있다. 공안당국에서는 당시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10명에 민혁당 사건으로 도피 생활 중이던 이석기 당선자 등 경기동부연합이 대외적으로 감추고 싶어하던 인물들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공안당국의 한 관계자는 “경기동부연합은 전국연합의 지역 조직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쟁조직 흔들린 틈새 주도권
   
   2001년 9월의 전국연합 대회는 일명 ‘군자산의 약속’으로 불리는 ‘9월테제’를 채택한 모임으로, 당시 전국연합 오종렬 상임의장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10년의 전망을 바로 세워내고 그를 위한 강고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 건설을 위한 3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고 말했다. 당시 오 의장은 “미국의 총칼에 갈갈이 찢겨버린 어머니 조국, 그 잘려진 조국을 하나로 이어야 한다”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연방통일조국을 실현하는 힘은 우리 위대한 민중에게 있지만 그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민족간부, 굳건한 민족민주전선”이라는 발언도 했다. 이러한 발언과 당시 모임을 계기로 NL계의 기성 정치권 진출이 시도됐다. 이후 NL계는 PD계가 2000년 만든 민노당에 들어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며 당을 장악해 나갔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현재 보는 대로 경기동부연합이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로 올라서게 됐다.
   
   경기동부연합이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로 올라서게 된 배경에는 경기동부연합 자체의 힘도 있지만 경쟁 조직이 흔들린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안당국 관계자는 “북한은 구 민노당에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모두 세 가지 루트로 접근해 왔다. 간첩단 사건으로 발각된 일심회는 민노당 서울시당을 영향력 아래 뒀고, 왕재산 간첩단은 인천시당에 손을 뻗쳤다. 서울시당과 인천시당이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힘을 잃으면서 민혁당과 연계된 경기동부연합이 상대적으로 힘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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