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센트럴파크는 뉴욕의 허파인 동시에 평화를 갈망하는 존 레넌 지지자들의 중심터이다.
뉴욕 센트럴파크는 뉴욕의 허파인 동시에 평화를 갈망하는 존 레넌 지지자들의 중심터이다.

1981년 이후 뉴욕에서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한 팝가수에 대한 추모제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성인(聖人)처럼 추모받는 이 팝가수는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이다. 추모기간은 매년 10월 9일부터 12월 8일까지 두 달이나 된다. 10월 9일은 존 레넌의 생일이고 12월 8일은 존 레넌이 암살된 날이다. 이 기간 동안 존 레넌 팬들은 암살현장이자 부인인 오노 요코가 현재도 살고 있는 뉴욕 센트럴파크 서쪽 72번가 도로변 건물로 모여든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아파트인 8층짜리 다코타(Dakota) 건물이다. 다코타는 뉴욕 최고 호텔인 프라자호텔 설계사가 만든 건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관은 그 어떤 건물에도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다코타는 슬픔과 비극의 현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암살현장에서 서쪽으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스트로베리 필드’ 추모시설은 다코타 건물의 비극을 다소나마 완화해 주는 완충지대이다.

연말까지 추모제… 저격 장소 북적

올해는 존 레넌 탄생 70주년이자 암살 30주년이 된다. 40세에 숨진 이 영국의 팝가수를 위한 사진전과 음악제 같은 추모전이 뉴욕 곳곳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존 레넌 추모제 참가자를 위한 특별 여행 패키지가 생길 정도이다. 10월 9일, 다코타 건물 주변은 언제나처럼 카메라 불빛을 터뜨리는 수많은 존 레넌 팬들로 붐볐다. 두 개의 가스등이 켜진 다코타 정문 앞에는 30년 전 비극을 치유하려는 듯, 누군가가 붉은 장미다발을 갖다놓았다. 존 레넌은 암살 당시 피 묻은 둥근 안경테를 바닥에 떨군 채 쓰러졌다. 오노 요코는 존 레넌 사후 앨범의 자켓용 사진으로 다코타 정문 앞에 떨어진 피 묻은 안경테를 선택했다. 2층짜리 뉴욕시 관광버스는 일부러 72번 다코타 건물 주변을 느리게 돌면서 피로 얼룩진 존 레넌의 비극사를 알리고 있다.

존 레넌은 1980년 12월 8일 밤 10시50분 자신의 집인 다코타 정문 앞에서 텍사스 출신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Mark David Chapman)이 쏜 4발의 총탄에 의해 숨을 거뒀다. 오노 요코는 재클린 케네디처럼 남편의 암살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채프먼은 원래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주일학교 교사와 베트남 난민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 인물이다. 당시 25살의 채프먼은 존 레넌 살해 이유를 종교적 배경에서 찾았다. “존 레넌은 ‘비틀스야말로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종교와 신을 믿지 않는 가짜 평화주의자였다. 그래서 내가 처단한 것이다.” 천국이 없다고 말한 노래 ‘이매진(Imagine)’에서 돈도 갖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수백만달러짜리 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위선자이기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암살범 아내도 일본인… 이혼 안 해

채프먼은 이후 살인자로서 판결을 받는 동안 광신도·정신이상자로 판정돼 가석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유죄를 주장하면서 수감생활을 자청했다. 이후 최하 20년형과 이후 2년마다 석방탄원을 할 수 있는 벌에 처해졌지만 오노 요코의 반대로 석방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직까지 수감된 상태이다. 존 레넌의 자식까지 살해할지 모른다는 것이 오노 요코의 석방 반대 이유이다. 흥미로운 것은 채프먼이 암살 시행 2년 전 6주 동안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서울도 방문했다는 점이다. 당시 세계일주를 통해 채프먼은 여행사에서 일하던 글로리아 아베라는 일본계 미국여성과 만나 이후 결혼한다. 우연치고는 기묘하지만 존 레넌과 마찬가지로 일본 출신 여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1979년 결혼한 글로리아 아베는 암살사건 이후에도 이혼을 하지 않고 30여년간 옥중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글로리아 아베는 매년 존 레넌 추모기간 동안 미디어가 가장 인터뷰를 하고 싶어하는 인물 중 하나지만 현재까지 한번도 신문·방송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암살된 존 레넌을 생각하면 마더 테레사와 달라이 라마 등 인도에서 만난 두 성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대중가수를 감히(?) 두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비교한다는 데 대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서방에서 벌어진, 반핵·반전 문제를 계기로 갈라진 세대 간의 반목과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감히 존 레넌을 인도의 두 성자에 비교하는 것을 너그럽게 봐줄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서방의 젊은이들은 존 레넌을 비폭력 성자인 인디라 간디와 현재의 달라이 라마를 합친 것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년기를 보낸 세계의 젊은이들은 전쟁에 익숙한(?) 기성세대의 역사관에 반대했다.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존 레넌의 노래와 정치적 활동은 젊은이들의 평화에 대한 열정을 정당화해 주고 증폭시키는 치료약이었다.

존 레넌은 기성세대로부터는 마약과 히피문화에 찌든 사악한 사탄으로 불렸다. 그러나 당시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에게는 전후에 탄생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스타일리스트로 받아들여졌다. 존 레넌은 파격적인 행동과 노래 속에 담긴 감동의 메시지를 통해 시대를 대변하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와 평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 그가 뉴욕 한복판에서 암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CIA가 ‘반전 아이콘 처단’ 음모론

왜 영국의 팝음악가가 모국인 영국이 아닌 미국의 최심장부에서, 그것도 돈을 창조해내는 월스트리트와 세계정의를 실현하려는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의 한가운데 센트럴파크 도로변에서 살해돼야만 했을까? 존 레넌은 고향인 영국을 떠나 인류 최고의 문명과 그 뒤에 숨은 천민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악의 도시(Sin City) 뉴욕에 살았다. 반전반핵의 아이콘을 필요로 했던 곳은 경제적·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성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존 레넌 암살사건은 미국 CIA가 개입한 음모론의 대표적 본보기로 거론되기도 한다.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존 레넌은 1970년대 미국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영국인이기도 했다. 닉슨 대통령 재임기간 중 존 레넌은 반전운동을 주도한 좌파인물로 낙인 찍혀 미국행 비자를 얻지 못했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가까스로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존 레넌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지고 정치적 영향력이 힘을 더해가던 당시, CIA가 순진한 광신도 채프먼을 배후에서 조종해 암살했다는 것이 음모론의 핵심이다. 1980년 선거에서 승리한 초보수파인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암살 음모를 짠 핵심인물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전쟁은 끝낼 수 있다(WAR IS OVER. If you want it).” 평화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꿈과 이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무책임하고 유치하게 느껴지는 존 레넌의 명언이다. 존 레넌에게 있어서 평화는 결코 꿈이나 이상이 아니다. 현실로서 실천의 대상이다. 지금 당장 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뉴욕에서 12월 초까지 계속될 존 레넌 추모제는 평화를 실천 속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세상에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V자 사인과 존 레넌

존 레넌 반전시위 때마다 ‘V’사인… 승리 아닌 평화의 상징

‘V자’ 사인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영국 수상 처칠이 그려보인 ‘Victory’, 즉 승리의 첫 스펠링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국인 역시 V자 사인을 승리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서방의 청년들이 사진을 찍을 때 보여주는 V자 사인에는 ‘평화(Peace)’라는 의미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

V자 사인이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 중반, 베트남 반전운동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반전데모 때 볼 수 있었던 V자 사인이 평화의 상징으로 완전히 정착하게 된 데는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역할이 컸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는 1969년 3월 결혼식 때 ‘기브 피스 어 챈스(Give Peace a Chance)’라는 타이틀의 반전 퍼포먼스를 벌이겠다고 발표한다. 신혼여행을 하는 동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벌이겠다는 취지였다. 약속대로 두 사람은 1969년 3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힐튼호텔과, 이어 5월 캐나다 몬트리올 퀸엘리자베스호텔에서 각각 1주일간 반전 퍼포먼스를 벌인다. 퍼포먼스의 무대는 침대, 출연의상은 잠옷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존 레넌과 피곤한 얼굴의 오노 요코가 함께 서서 들고 있는 ‘워 이즈 오버(WAR IS OVER). 이프 유 원트 잇(If you want it)’이란 피켓은 당시 탄생된 슬로건이다.

당시 호텔 밖에는 반전평화지지자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당시 두 사람의 반전평화 퍼포먼스는 서방 측 TV와 신문을 통해 전세계에 중계됐다. 존 레넌 부부는 아침 9시부터 12시간 동안 전세계 미디어의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가 없을 때는 호텔 밖 평화지지자들과 함께 반전노래를 부르면서 분위기를 달궈갔다. V자 사인은 당시 존 레넌 부부가 미디어에 항상 보여주던 평화의 상징이었다. TV와 신문을 통해 V자 사인이 전세계가 인정하는 평화의 심벌로 정착된 것이다.

존 레넌의 원래 이름은 존 윈스턴 레넌이다. 존 레넌의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태어난 아들에게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름도 함께 붙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 수상의 V자 사인이,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에 의해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존 레넌의 성지, 뉴욕 스트로베리 필드

존 레넌이 놀던 구세군 시설… 비틀스 노래로 만들어져

“내가 널 태워줄게. 왜냐하면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s)에 갈 거니까.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없단다. 그러니까 마음에 걸릴 것도 없지. (그렇지만) 스트로베리 필드는 영원해.”

1967년 비틀스가 발표한 노래 ‘스트로베리 필드 이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is forever)’에 나오는 가사이다. 비틀스 노래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존 레넌이 작사·작곡했다. 비틀스 10대 명곡에 들어가는 이 노래는 특이한 변주와 가사로 인해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이란 장르의 대표곡으로도 불린다. 1960~1970년대 풍미한 사이키델릭 록은 마약이나 환각상태에서 만들어진, 기존의 화성악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단적인 음악을 의미한다.

스트로베리 필드란 존 레넌이 어릴 때 자주 들렀던 영국 리버풀 집 근처의 구세군 시설을 의미한다. 전쟁고아들도 수용된 스트로베리 필드는 아버지의 정을 모른 채 살아간 존 레넌이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고 동시에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 장소였다. 여기에 구세군 음악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존 레넌의 스트로베리 필드는 생전에도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지만 사후 더욱 유명해진다. 이유는 존 레넌을 추모하는 뉴욕의 추모시설 이름이 스트로베리 필드이기 때문이다. 노래가사에서 나오듯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스트로베리 필드는 영원하다’라는 의미에서 추모시설 이름이 스트로베리 필드로 불리게 된 것이다.

스트로베리 필드 추모시설은 존 레넌이 암살된 곳에서 동쪽으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정확히 뉴욕 센트럴파크 72번 도로변에 인접한 시설이다. 크기는 100㎡ 정도로 전부 공원 내에 들어서 있다. 존 레넌의 동상 하나 없지만 존 레넌 팬들에게는 성지(聖地)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생일인 10월 9일과 암살된 날인 12월 8일에는 존 레넌을 추모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스트로베리 필드는 존 레넌 사후 4년째인 1985년 오노 요코가 뉴욕시에 100만달러를 기부하면서 정식으로 오픈한다. 뉴욕시의 특별한 배려로 시유지인 공원 내에 존 레넌의 추모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현재 스트로베리 필드 안에는 존 레넌의 대표곡인 ‘이매진(Imagine)’이란 글자를 새긴 원형의 모자이크 타일이 바닥에 깔려있다. ‘이매진’이 새겨진 모자이크는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문양을 본뜬 것으로 포르투갈의 한 예술가에 의해 헌정된 것이다. 원형의 모자이크는 원래 ‘침묵의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존 레넌의 음악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는 ‘노래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생일이나 암살기념일에는 존 레넌 팬들이 부르는 노래를 밤새도록 들을 수 있다. 물론 모자이크 주변은 항상 꽃과 촛불, 기타와 존 레넌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존 레넌 팬만이 아니라 2001년 9·11 테러 당시에는 테러 피해자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 반테러 촛불집회를 갖기도 했다.

스트로베리 필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게리 산토스(Gary Santos)라는 사람이 있다. 개장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스트로베리 필드를 지키고 있는 거리 음악가이다. 추모시설을 찾는 사람들에게 암살로 생을 마친 ‘20세기 모차르트’의 일생을 설명하는 것이 그의 일상사이다. 비틀스나 존 레넌 팬이라면 뉴욕에 가는 즉시 스트로베리 필드로 가서 게리 산토스를 만날 것을 권한다.

유민호 Pacific21, Inc 소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