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어선들 어장 싹쓸이 그래도 덕분에 북한이 포 안 쏘겠지 싶기도 하고…”

“자식들 나오라고 성화 여기처럼 살기 좋은 데 없어…
저놈들 내려오면 총 들고 나설 것”
육지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을 하는 백령도 주민들. 왼쪽이 이영자, 오른쪽이 최춘매씨.
육지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을 하는 백령도 주민들. 왼쪽이 이영자, 오른쪽이 최춘매씨.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포격 공격이 일어난 지 6일이 지난 11월 29일, 백령도에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당초는 출발 전날 배가 뜰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에 통신장비가 고장났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인천연안부두를 출발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배에 탄 사람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아휴, 백령도에 있는 아들딸 잘 있나 보러가.” 서울 은평구에 사는 박재욱(82)씨는 부인과 함께 섬에 사는 두 자녀를 보러간다고 했다. “우리 손주 일년 새 얼마나 컸을까”라고 말하는 박씨 부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달라보였다. 배 안에는 휴가를 나왔다 복귀하는 해병대원도 눈에 띄었다. 아들이 들어가는 길을 바래다주러 온 아버지는 “어떻게 외박이라도 안되겠나”라며 연방 아들의 손을 부여잡았다. 평소보다 두 시간 가까이 긴 안전항로로 운행한 탓일까. 백령도에 가는 데는 다섯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오후 2시30분 인천행 여객선항인 백령도의 용기포항 부두는 남부여대(南負女戴)의 인파로 가득찼다. 말로만 듣던 백령도 엑소더스. 그날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은 인천에서 온 손님들이 내리기 무섭게 앞다퉈 배에 올라탔다. “저리 좀 비켜 빨리 타게.” 한 취재진의 카메라가 여객선 입구를 막아선 탓일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곳곳에서 짐을 바리바리 손에 든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아내와 두 자식을 인천으로 보내러 부둣가에 나온 이상훈(45)씨는 식솔들이 여객선에 올라타기 직전까지 잡고 있던 아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같이 떠나고 싶지만 공무에 엮인 몸이라 어쩔 수 없지”라며 떠나는 여객선을 바라보던 이씨는 여객선이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시 당신의 일을 하러 섬 북쪽으로 향했다.

불과 8개월 전 있었던 천안함 폭침 사건 때만 해도 섬주민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백령도 용기포항에 모였던 사람들은 무언가에 쫓기듯 일제히 흩어졌고 10여분도 안돼 부둣가엔 적막이 찾아왔다.

천안함 때는 보았고, 지금은 느낀다

안개가 짙게 내리깔린 12월 1일 백령도 용기포항 부두.
안개가 짙게 내리깔린 12월 1일 백령도 용기포항 부두.

천안함 폭침 당시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이고, 떠나기는 무슨, 아무일도 없어!”라고 화를 냈던 섬주민들이었다. 천안함 폭침이 눈앞에서 벌어졌던 장촌 포구 앞 사람들도 오랜만에 만난 기자를 보고 반가워하기는커녕 냉랭한 시선만 보냈다. “보다시피 조용하잖아.” 실제로 그랬다. 마을은 유난히도 조용했다. 천안함 폭침 때 눈앞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열심히 기자들에게 말해주던 주민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솔직히 당신이 여기 산다고 해봐, 심정이 어떻겠어. 꼭 말로 해야 아나?” 장촌리에 사는 한 젊은 부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같은 섬주민, 당하지만 않았지 같은 심정이다. 그때(천안함)는 바라보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느끼는 입장”이라며 묵묵히 먹던 밥을 계속 먹었다. 마을 노인회장인 장두표(77)씨만이 ‘눈치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때보다 훨씬 불안하지. 심지어 토박이 주민들 중에도 나간 사람이 있어. 나가자니 살길이 막막하고 가만있자니 불안해 못살겠다고.”

“솔직히 우리는 여기 사는 것만 해도 애국이야.” 김장에 쓸 무를 가지고 집에 들어오던 한 할머니가 90도로 굽은 허리를 오른손으로 두드리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북한땅 장산곶이 저만치 손에 잡힐 듯 바라다보이는 두무진. 백령도의 최북단이다. 대낮이었지만 동네엔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간신히 만난 할머니는 말 한마디만 던지고 집안으로 휑하니 들어갔다. 관광객도, 주민들도 없었다. 두무진 출항소에는 출항금지를 뜻하는 빨간 깃발만이 거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슈퍼마켓만이 가끔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4분의 1쯤 열어두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 무를 다듬던 가게 주인 정세운(63)씨는 “만원짜리 구경한 지 오래됐다”며 입을 열었다. 슈퍼마켓과 함께 두무진항에서 출항하는 유람선을 운행하는 정씨의 울분 섞인 넋두리는 계속됐다. “천안함 사건 이후로 3분의 1 토막 났던 손님들이 그나마 완전 뚝 끊겼제.” 이번 주말에 예약돼 있던 손님 60명도 포격이 있었던 11월 23일에 바로 예약을 취소했다고 한다. 관광객으로 먹고살던 두무진 마을은 제대로 된서리를 맞았다. 빼곡히 들어선 횟집들 앞에는 활어들만 어항 속의 금붕어인 양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정씨가 전하는 두무진의 경제는 암담했다. “관광객들이 이제 안 찾아온다고 봐야 하니 활어들은 전부 찜으로 만들거나 포를 떠야제.” 출항이 금지된 우리나라 어선들을 비웃듯 중국어선은 새까맣게 몰려와 조업 중이었다. “저것들이 물고기만 잡으면 그래도 나아. 우리 어구들까지 전부 쓸어가서 문제야”라며 정씨는 안타까워했다. 어구값만 해도 1000만~2000만원. 다시 조업하려면 어구를 새로 사야 하니 이중으로 손해라고 한다.

연평도 포격을 비웃듯 중국어선들 130여척은 매일같이 백령도와 북한 사이의 바다를 가득 메웠다. 중국어선들은 대체로 까만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개미떼처럼 보였다. 30년 동안 백령도 앞바다에서 살아온 해녀 김화순(63)씨가 “천안함 때는 얄밉기만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쟤네들이 있어 안심인겨”라고 말했다. “그래도 저놈들(북한)이 중국한테는 벌벌 떠는데 우리한테 포 쐈다가 저 중국어선들 포탄에 맞으면 어떡하겠어.” 씁쓸하게 말을 잇던 김씨에게 정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저것들(북한)이 하는 짓은 당췌 알 수가 있어야지. 어디 앞뒤 가리는 놈들이야? 그런 말일랑 하지도 마.”

“요즘 군이 너무 나약해”

북포초등학교 대피소의 외부 모습. 백령도의 대피소는 대부분 1974년과 1975년에 만들어졌다.
북포초등학교 대피소의 외부 모습. 백령도의 대피소는 대부분 1974년과 1975년에 만들어졌다.

경찰 5명, 해경 2명, 그리고 택시기사 8명. 작은섬 백령도에는 그동안 큰 사고도 없었다. “관광객이 들어와 술 먹고 난동부리는 정도지”라고 말하는 파출소의 한 경찰관은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일어난 큰 사건 외에는 지난 수십 년간 사건이 아예 없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평온했던 백령도에는 수십 년 동안 고향을 지켜온 고집쟁이 토박이들이 많았다. 백령도에서 태어나 50년이 넘게 약국을 운영해온 최순덕(76)씨는 연평도 포격사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약국을 지켰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신식 약국이 생겼지만 여전히 최씨의 약국은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떠나면 사람들은 진짜 피난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연방 웃음을 잃지 않던 최씨는 사별한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최씨의 남편은 지난해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차라리 잘됐어. 살아생전 이런 일을 당했더라면 북한의 무도함에 너무 가슴 아파하셨을 거야”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씨는 중학생이던 지난 1950년 백령도에서 나와 부모님과 함께 인천에 머물며 서울로 통학했다. 그해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집에서 머물고 있던 최씨는 당시 대낮에도 총부리를 겨누는 인민군의 폭정에 시달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탄에 아버지를 잃은 최씨는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고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백령도로 돌아왔다. 당시 백령도에는 약국이 한 군데 있었지만 무허가였고 이런 현실에 분개한 최씨는 인천의 한 약국에서 2년 동안 일을 배우고 1955년 백령도로 와 군청의 허가를 받은 약국을 열었다. 약사가 아니라 약을 조제하지는 않았지만 최씨의 약국은 섬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의 남편도 자주 약국을 찾던 손님 중 한 명이었다. 황해도 출신이었던 남편은 북한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6·25 직전 백령도로 와있었고 이곳에서 최씨를 만난 후 정착했다. 부부는 1957년 약국을 개업한 이래 50년 넘게 함께 그곳을 지켰다. 한밤중에 아픈 아들을 데리고 와 약을 지어달라던 사람, 약을 지으러 읍내로 나온 해병대원들도 항상 약국을 지킨 최씨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신식 약국이 문을 연 지금, 최씨는 아침·저녁에만 약국 문을 연다. 낮에는 공공근로를 하며 돈벌이에 나서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우리 고향을 지키겠어.” 미국으로 시집간 딸의 안부전화에 담담하게 답하던 최씨는 섬마을 고향친구들과 함께 끝까지 백령도를 지키겠다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김병행(80)씨도 고향을 나와 홀로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학교 4학년 때 6·25를 맞았다. 부산까지 피란갔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자원 입대해 낙동강 전선 전투에 투입됐고 4년 동안 군생활을 하다 제대했다. 1955년 고향인 백령도로 돌아온 김씨는 백령도 상이군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직접 전쟁을 겪은 군인이었던 김씨는 “요즘 군이 너무 나약하다”며 “저놈들(북한)이 내려오면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총 한 자루라도 들고 앞장서서 나설 것”이라고 격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말없이 김치 보내는 어머니들

지난 11월 30일 사흘 만에 백령도에 화물선이 들어오자 백령도 할머니들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섬 곳곳에서는 김장을 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부쩍 늘었다. 우체국 한쪽에는 육지에 사는 아들딸들 앞으로 보내는 30㎏들이 김치통이 빽빽이 쌓여갔다.

이영자(87)씨는 서울과 인천에 사는 4명의 아들딸을 위해 김장을 담갔다. 일단 인천에 사는 큰아들네 30㎏들이 김치 두 통을 보낼 거라며 배추에 쉴 새 없이 양념을 버무렸다. 자식들은 “당장 섬에서 나오세요”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성화다. “나가봐야 자식들한테 짐만 되고 여기서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최춘매(87)씨가 “그럼, 여기처럼 조용하고 살기 좋은 데가 어딨다고”라며 맞장구치자 김장을 하는 할머니들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김순내(89)씨가 하얀 배추가 빨갛게 김치로 변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입만 먹어보자”며 배춧잎을 하나 똑 떼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구 저 할망구가”라며 핀잔주던 이영자 할머니는 입 주위가 온통 빨개진 김 할머니를 보고는 “주책없긴 애들처럼”이라며 ‘호호’ 웃었다. 자식들은 당장 육지로 나오라고 하지만 할머니들은 예년처럼 묵묵히 김장을 담가 자식들에게 보낼 뿐이었다.

한·미연합훈련이 끝나던 12월 1일 백령도를 출발한 화물선에는 30㎏들이 김치통 1200여개가 실렸다. 한 우체국 직원은 “하루종일 김치통 부치느라 팔 아파 죽겠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2010년은 작황이 안 좋아 흉년이었지만 뭍으로 가는 부모의 자식사랑은 예년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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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식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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