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가족모임은 정부를 상대로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납북자가족모임은 정부를 상대로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납북자 문제는 인권 문제입니다. 일본인 납북자 수는 한국에 비하면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수준인데도 저렇게 정성을 들이고 있죠. 온 정부와 국민이 나서서 끝까지 구해내려고 합니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자국민 2명(로라 링·유나 리 기자)을 구하기 위해 직접 북한까지 갔잖아요. 이런 두 국가의 태도에서 진정한 선진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2010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토로한 내용 중 일부다. 현재 일본의 확인된 납북자 수는 19명. 한국은 6·25전쟁 때 8만여명, 휴전 후 500명 이상이 납북됐다. 단 한 사람의 납북자를 송환하기 위해 총리는 물론 주요 고위 인사들이 모두 발벗고 나서는 일본과,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송하고도 납북자 한 명 데려오지 못한 한국의 사례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납북(拉北)의 역사는 1950년 6·25전쟁 때부터 시작됐다. 김일성은 남침 직후 정치인·법률가·공무원·종교인·교사·언론인·의사 등 남한 사회 리더십을 대거 납치했다. 주요 ‘인텔리’의 명단과 소재지를 미리 확보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한 ‘남한 기반 붕괴 작전’이었다. 소설가 이광수, 현상윤 고려대 총장, 국회의원 안재홍,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 철학자 한치진 등 유명인사가 피랍 또는 피살됐다.

전쟁 후에도 북한의 납치 행각은 계속됐다. 해상 납치가 130여회 발생했고 많은 어부가 실종됐다. 북한은 어부 외에도 교사·유학생·조종사·광부·운전기사·군인 등 다양한 직종의 한국인을 납치했다. 해외 12개국에서 확인된 납북자 수도 40여명에 이른다. 목적은 외국의 정보를 얻거나 해외 공작원의 현지화 교육 교관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김현희씨의 일본어 선생은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였다. 테러 범행 직후 자살에 실패한 김씨는 한국에 온 후 다구치와 요코다 메구미 등 자신이 북한에서 만난 일본인들에 대한 구체적 증언을 내놓았다. 일본 여론은 지속적으로 끓어올랐고 2002년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 다구치와 메구미를 포함한 13명의 납치 사실을 시인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메구미가 자살했다며 화장한 유골까지 보냈지만 일본은 턱뼈에 남은 치아뿌리를 감식해 가짜임을 입증했다. 한·일 언론의 끈질긴 취재와 과학기술은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이 납북 고교생 김영남이란 사실까지 밝혀냈지만 북한은 지금까지도 메구미의 사망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행동은 일본과 전혀 달랐다. 1970년 납북됐다 1998년 겨우 중국으로 탈출한 선원 이재근씨는 한국영사관에 자신의 상황을 호소했지만 “국가에 부담을 주려하지 말고 가족에게 연락해 밀항하라”며 거절당했다. 이씨는 2년간 만주에서 도피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납북자도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52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납치자 명부(8만2959명)를 2001년 언론과 민간단체가 발굴해 공개했다. 명부에 적힌 이름 석 자에 전국의 납북자 가족들은 오열했다.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정부에 데이터베이스(DB)화를 요청했지만 예산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이사장은 사비를 털어 DB 자료를 구축했고 관련법 제정을 위해 국회 문을 두드렸다. ‘6·25전쟁 납북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2003년부터 몇 차례 상정됐지만 계류와 폐지를 반복하다 7년 만에 겨우 통과했다. 어느새 전쟁납북자의 연배는 90~100세를 바라본다.

이 이사장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보상은 무슨… 대통령의 위로 한마디면 가슴이 뻥 뚫릴 텐데. ‘가장을 잃고, 아들을 빼앗기고, 얼마나 힘들었나. 조국은 당신과 가족을 절대 잊지 않겠다’란 말 한마디면 되는데”라고 답했다.

한·일 납북자에 대해 취재해온 뉴욕대 언론학과의 로버트 보인턴(Boynton) 교수는 “미국에선 납북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도 다들 ‘픽션(fiction)’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며 “한국은 납북자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그는 “‘납북’ 키워드로 한·일 양국의 단행본을 검색한 결과 일본은 1000여권, 한국은 단 1권이었다”며 “한국에서 납북자에 대한 체계적 연구자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단 1권의 책은 월간조선이 발행한 ‘6·25 납북자 82959명 명부’였다.

북한 정권은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나라다. 외국인을 납치하고, 납북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납치한다. ‘지도자’의 판단에 따라 국격, 도덕, 양심을 외면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가장 큰 피해자는 북한 주민과 납치 피해자들이다. 한국은 이런 ‘기형적 정권’을 눈앞에 두고도 ‘종북’과 ‘친북’ 논란이 벌어진다. “자진 입북자는 있어도 납북자는 없다”라는 북한의 주장을 통일부 장관이 그대로 되풀이해 “납북자 중엔 자진 월북자도 있다”라고 발언한다.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면 “반통일 세력, 통일의 걸림돌”이라며 비판한다. 남북적십자회담을 하면서 ‘납북자’란 용어도 못 쓰고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란 모호한 표현을 쓴다. ‘햇볕’이란 미명 아래 수조원을 퍼붓고도 납북자 단 한 사람을 구해오지 못했다.

납북자 명부를 발굴하고 그들을 탈출시키는 것은 언제나 민간단체와 언론의 몫이었다. 귀환 납북자 8명 중 1명은 스스로 탈북했고 나머지 7명은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북한 내 협조자를 통해 구출했다.

주간조선이 이번에 발굴한 평양 주민 자료는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를 깨뜨릴 무기를 품고 있다. 북한이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납북의 증거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주간조선 사무실을 방문해 직접 자료를 본 이미일 납북자가족회 이사장은 “북한의 가장 은밀한 핵심정보가 유출됐다는 것은 북한의 붕괴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캄캄한 어둠 속에 유폐된 채 60여년을 지내온 납북 가족들을 찾으러 북한에 실사를 가는 날이 오기를 염원했는데 이 자료를 통해 그날이 가까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김광인 북한전략센터 소장은 “전화번호부도 대외비인 나라에서 210만명의 주민등록 자료가 유출됐다는 것은 최고급 비밀이 세계에 퍼졌다는 의미”라며 “북한은 멀게는 60여년 전 남침부터 최근 천안함 폭침까지 부인해온 나라이기 때문에 이 문건의 존재 자체와 내용 모두에 대해서 부인하고 ‘남조선의 조작’이라고 선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주간조선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수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며 “북한 핵심부의 치명적 자료를 입수한 주간조선에 큰 격려를 보낸다”고 했다. 박 의원은 “북한 납북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입증한 공문서인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때가 됐다”며 “납북자 문제는 이념이 아닌 인권의 문제인 만큼 국회 차원에서도 조기 송환을 위한 결의안을 제출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