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4일 국회 정론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한 통합진보당 윤금순 비례대표 1번 당선인. ⓒphoto 연합
지난 5월 4일 국회 정론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한 통합진보당 윤금순 비례대표 1번 당선인. ⓒphoto 연합

“제일 위험한 건 동지로 위장해 세작(간첩)질을 일삼은 일군의 세력이다. 조봉암(1956년 진보당 창당 후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의 진보당은 프락치들의 분열 공작에 사분오열돼 스스로 붕괴됐다.”

지난 5월 2일 통합진보당(약칭 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신석진 대표비서실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는 4·11 총선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로 지난해 12월 창당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진보당의 민노당 출신 당권파의 의식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간첩질’을 하고 있는 세력은 바로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탈당파 등 비당권파를 말한다. 이번 부정선거 사태는 주로 참여당 출신들이 부정선거 자료와 의혹들을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불거졌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 공학적으로만 합당을 하다 보니 하부 당원들 간의 화학적 결합은 될 수가 없었다. 현재 비례대표 부정선거 수습책을 두고 벌어지는 민노당 출신 당권파와 참여당·진보신당 출신 비당권파의 대립은 언제라도 터질 휴화산(休火山)과 같았다.

통합진보당은 지난해 12월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만든 ‘새진보통합연대’가 합쳐 창당됐다. 2000년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12년 만에, 2010년 창당된 국민참여당은 2년 만에, 종북주의·패권주의 논란 뒤에 2008년 민노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진보신당은 4년여 만에 당의 깃발을 내렸다. 각각의 세력을 대표하던 이정희·유시민·심상정 3인의 공동대표 체제로 통합진보당은 시작됐다.

당원의 구성 비율을 보면 애초 당내 모든 선거의 승부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진보당은 창당하며 중앙위원으로 이뤄진 대의기구 구성 비율을 각각의 세력 크기를 반영해 민노당 55%, 참여당 30%, 진보신당 15%로 정했다. 당시 당비 납부 당원 규모를 봐도 민노당이 3만5000명, 참여당이 8700명, 진보신당이 2000명 미만에 불과했다. 당의 모든 선출직 당직자와 공직 후보를 진성 당원의 투표로 결정하는 진보당의 시스템으로는 원내 대표, 당 대표 등 어떠한 당내 선거라도 당권파의 백전백승이 쉽게 예상되는 싸움이었다. 이렇다 보니 ‘경기동부연합’으로 지칭되는 민노당 출신 당권파는 든든한 조직세를 믿고 온갖 유형의 부정선거 행태를 마음 놓고 저질렀다.

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선거 행태는 정치권에 큰 충격을 가지고 왔다. “체육관 선거보다 못한 선거” “1960년대 자유당 부정선거도 이보다는 낫다”는 말까지 나왔다. 진보당은 지난 3월 14~18일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 당원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와 현장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 순번을 정했다. 3번에 배치하기로 한 청년 비례대표는 그보다 앞선 3월 9~12일 청년 당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로 정했다.

유시민 “처음 겪는 일… 당혹스러워”

진보 진영의 사정에 밝은 정치권 관계자들은 “민노당 출신 당권파의 부정선거 행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2008년 진보신당이 민노당에서 떨어져 나올 때의 명분도 바로 이러한 당권파의 패권주의를 비판했던 것”이라며 “가해자는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아쉬워 급하게 합당을 하다 보니 그 문제가 수정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5월 3일 국회에서 열린 공동대표단 회의에서 참여당 출신의 유시민 공동대표는 “내부에서 발생한 이런 것들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겪어보기 때문에 굉장히 국민들 뵐 낯이 없고 당원들 뵙기가 민망하고 그래서 당혹스러운 면도 많이 있다”고 했다. 이번 부정선거의 최대 피해자는 참여당 출신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참여당 출신 관계자는 “저쪽에서는 관행이라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우리들은 듣도 보도 못한 수법에 눈 뜨고 당했다”고 했다.

이는 경기동부연합으로 지칭되는 민노당 출신 당권파가 2000년대 초반부터 불법·탈법을 가리지 않고 당내 선거에서 승리하며 민노당 조직을 장악해갔던 과정의 연장선에 다름 아니라는 분석이다. 이들은 위장전입, 당비 대납, 유령 당원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자신들이 마음먹은 지역위원회를 접수하고 세를 불려나가 10년 넘게 민노당의 당권을 유지해왔다.

비당권파의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 “경기동부는 ‘얼굴마담’ 격의 이정희 대표를 내세워 당권을 유지해왔는데 여론조사 경선조작 사태로 이 대표가 국회의원 후보직을 사퇴한 이후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며 “경기동부의 실세로 불리는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원내 입성을 유지하려는 경기동부의 집착 때문”이라고 했다. 5월 2일 진상조사 결과 발표 후 당권파의 행동은 비당권파는 물론 정치권 전체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이정희 공동대표의 측근인 이의엽 당 상임선거대책본부장은 조준호 진상조사위원장의 공식 조사 결과 발표 이후 4시간 만에 이를 전면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지난 3월 이 대표가 여론조사 경선 조작 사태에 책임을 지고 국회의원 후보직을 사퇴했을 때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을 정도로 당권파의 핵심 인물이다.

이 본부장은 “(온라인 투표의 경우) 사실상 의혹 제기 수준이고 구체적인 부정의 사례가 무엇이 있었다는 건지 구체적 사례가 어떻다는 건지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며 “(부정선거가 아니고) 선거 관리 부실이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그는 “(조사위원회도) 고의로 누가 했다든가 하는 것은 단정하지 않았다. 명확한 것은 선거 관리 규정이 다수 지켜지지 않았다. 이게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고 했다.

당권파 패권주의 점입가경

김승교 선관위원장이 5월 4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은 비당권파 인사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이정희 대표의 남편 심재환 변호사와 같은 법무법인 소속으로 이적 단체로 판명된 6·15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대표 출신인 김 위원장은 2010년 항소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은 상태다. 그는 “황당한 조사보고서다. 인정할 수 없다” “부정은 비당권파가 저질렀는데 책임은 당권파가 지라는 것” “온라인에서 (선거부정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가 선관위가 아니다.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 국가 선관위와 같이 엄정하게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이런 조사보고서가 어디 있느냐”와 같은 발언을 쏟아냈다.

논란의 핵심은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자다. 당권파의 전횡 역시 이 당선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비당권파는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얼굴마담’ 이정희 대표를 사퇴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비례대표 1~3번을 지켜주자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당권파의 속내는 결국 이석기 당선자를 살리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성골’로 불리며 당권파의 핵심인 이 당선자가 사퇴할 경우 6월 3일 새로운 당 대표 선출대회를 앞두고 있는 진보당에서, 민노당 출신들은 자신들의 당권 전체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당선자는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학과 출신(82학번)으로, ‘민중의 소리’ 이사, 2007년 권영길 당시 대선 후보의 홍보 업무를 총괄했던 CNP전략그룹 대표이사, 민노당 여론조사 업무를 봤던 사회동향연구소 대표를 지내며 경기동부의 재정과 전략을 책임진 실세로 알려져 있다.

민노당 최고위원을 지냈지만 인천연합 출신으로 비당권파인 비례 1번 윤금순 당선자가 사퇴한 5월 4일 현재 비당권파는 공동대표단 총사퇴와 경쟁명부 비례대표 14명의 총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비당권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지역구 7석과 비례대표 6석으로 진보정당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진보당의 전체 의석은 상처뿐인 12석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박국희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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