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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1호] 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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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2002년 승부의 復棋(복기)

“여론조사 질문 내용이 10년 전 승부를 뒤집었다”
2002 단일화 실무협상 노무현 측 홍석기

정장열  차장 

“마지막 협상을 끝내고 노무현 후보와 통화하면서 ‘솔직히 자신 없다. 확신이 안 선다’고 얘기했습니다. 7~8%까지 벌어지던 지지율을 근접하게는 만들어놓았지만 결과는 알 수가 없었죠. 지금 하라고 하면 아마 못할 겁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여론조사 실무책임자였던 홍석기(56) 박사가 당시 협상 과정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지난 11월 7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이제는 정치판을 떠났다”며 인터뷰를 꺼렸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이 다시 최고의 이슈가 된 현실 때문인지 10년 전의 그 뜨거웠던 순간에 대해 입을 열었다. 국민회의와 새천년민주당 정세분석국장을 지낸 그는 노무현 후보 선대위 기획실장을 지냈고 단일화 협상 당시 여론조사 전문가로서 후보 단일화 여론조사 방법을 둘러싼 실무협상을 담당했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협상은 치열한 기싸움의 연속이었다. “1차 협상 때는 싸움만 했죠. 상대방이 뭐라고 하면 계속 맞받아치는 게 일이었습니다. 1차 협상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죠.”
   
   
   매일 여론조사, 유리한 질문 찾아내
   
   당시 단일화 일지를 보면 실무협상에 이르는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단일화는 11월 3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TV토론과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 단일화를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측에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11월 7일 협상단이 구성됐고 11월 9일 첫 공식 접촉에서 ‘TV토론 실시 및 국민의사가 반영되는 경쟁적 (후보선출) 방식’에 합의했다. 그러나 국민통합21 측은 민주당 협상단의 이호웅 의원이 국민경선에 합의한 것처럼 언론에 흘렸다는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협상이 제자리에서 맴돌자 11월 10일 노 후보가 국민통합21 측이 주장해온 여론조사방식을 수용하겠다고 밝혀 물꼬가 터인 듯했으나 국민통합21 측이 대의원 100% 여론조사 방식을 제안하면서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돌파구는 11월 12일 정 후보가 후보회담을 제안하면서 열렸다. 민주당 신계륜 의원과 국민통합21 민창기 홍보위원장의 실무회동 끝에 11월 15일 후보회담이 성사됐다. 두 후보는 심야 회동에서 일반국민 대상 여론조사 등 8개항에 전격 합의했다. 이날 밤 노·정 후보의 포옹과 포장마차 ‘러브샷’은 국민적 화제로 떠올랐다.
   
   양측이 일반국민 상대 여론조사 방식에 합의했지만 진짜 중요한 싸움은 그때부터였다는 것이 홍 박사의 회고다. 당시 실무협상에서 최대의 관건은 여론조사 질문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질문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지지율에서 2~3%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예컨대 이회창 후보를 상대할 야권 단일후보로 ‘누구를 선호하느냐’는 질문과 ‘누가 더 경쟁력이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따라 결과가 달리 나왔습니다. ‘상대할’ ‘대항할’ ‘지지하느냐’ ‘경쟁력이 있느냐’ ‘호감이 가느냐’ 등 약간씩 다른 뉘앙스의 단어를 쓸 때마다 결과가 달리 나왔죠. 대체적으로 선호도는 정몽준 후보가, 경쟁력은 노무현 후보가 앞섰습니다.”
   
   대략 정몽준 후보 지지율 27%, 노무현 후보 지지율 19% 선에서 협상을 시작한 그는 당시 실무협상을 진행하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여론조사팀을 돌렸다고 한다. 매일매일 지지율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또 어떤 질문을 던질 때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지를 꼼꼼하게 체크했다고 한다. 결국 당시 승부를 가른 질문은 최종적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로 결정됐다. 양측의 입장이 조금씩 가미된 절충의 결과였지만 그는 “최종 문항으로 조사를 해보니 그 전까지는 뒤지던 지지율이 미세하게나마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가까스로 지지율을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여론조사 기관 선정도 난항
   
   또 하나 노무현 후보 측에서 관철시킨 것은 휴일 조사였다. “언제 조사하느냐에 따라서도 미세하게나마 지지율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제 생각에 정몽준 후보의 표는 약간 구름 잡는 표였고, 노 후보의 표는 충성도가 강한 표였습니다. 휴일에 조사할 경우 정몽준 후보 표는 분산될 가능성이 높고 노 후보의 표는 뭉칠 수 있다고 봤죠.” 결국 당시 여론조사는 노 후보 측의 의중대로 11월 24일 일요일 실시됐다.
   
   질문 문항과 여론조사 실시 날짜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대방에게도 뭔가를 줘야만 했다. 홍 박사는 “정몽준 후보 측에서 끈질기게 요구했던 것은 역선택 방지였다”고 기억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이 일부러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조사에 응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온통 신경을 집중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회창 후보에 대한 최저 지지율’ 조항이었다. 즉 단일화 여론조사 때 나온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단일화 TV토론이 이뤄진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뤄진 다른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이회창 후보 최저 지지율보다도 낮을 경우 이를 무효로 처리한다는 조항이다.
   
   
   “역선택 방지” 엄청난 숫자 싸움
   
▲ 홍석기 박사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당시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뤄진 여론조사 중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최저로 나온 것은 국민일보가 월드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30.4%였다. 그런데 단일화 여론조사 기관으로도 선정됐던 월드리서치의 단일화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28.7%밖에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노무현 38.8%, 정몽준 37.0%로 나타난 월드리서치의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는 무효로 처리됐고, 또 다른 단일화 여론조사 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의 결과(노무현 46.8%, 정몽준 42.2%)만 유효한 것으로 채택돼 ‘노무현 1 대 0 승리’라는 최종 결과를 만들어냈다. 당시 리서치앤리서치의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32.1%를 기록해 기준을 충족시켰었다. 당시 여론조사 기관들은 오차범위를 무시하고 ‘여론조사 결과 0.1%라도 뒤지면 패배를 수용한다’는 양측의 합의가 갖는 비과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여론조사를 맡지 않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여론조사 기관 선정에도 난항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월드리서치와 리서치앤리서치 두 곳이 최종 여론조사 기관으로 선정됐었다.
   
   간단하게 복기해 봐도 당시 양측이 역선택 방지를 둘러싸고 엄청난 숫자 싸움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솔직히 말해 당시 역선택 방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고 떠올렸다. “실무협상을 진행하면서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1000명 정도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역선택이라는 게 거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2500명 정도를 대상으로 조사해야만 역선택이라는 게 의미있는 걸로 나타났죠. 단일화 여론조사가 2500명까지는 조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거기에 매달리데요. 그래서 우리도 역선택 조항이 중요한 것처럼 페인트모션을 쓰면서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다가 막판에 그걸 넘겨주고 진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챙기자는 전략을 썼죠.”
   
   당시 여론조사 기관들은 역선택 방지 조항에 따라 2000개의 샘플 중 ‘이회창 지지’응답자를 제외한 1350여명만을 대상으로 정몽준·노무현 지지 여부를 물었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 역시 홍 박사의 주장대로 “당시 역선택 방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고 얘기한다. 당시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한 한 전문가는 “이회창 지지층을 넣거나 빼거나 그때는 큰 차이가 없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들도 역선택이 뭔지 알기 때문에 만약 여론조사 방식으로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를 할 경우 박근혜 지지층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민주당 협상 단장인 신계륜 의원과 사전 각본을 짜기도 했다고 한다. “옆방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역선택 방지 조항을 받아들여 합의문을 쓰라고 했죠. 그럼 제가 그걸 찢겠다고 했습니다.”
   
   실제 그는 역선택 방지 조항이 들어간 합의문에 사인을 하라는 요청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합의문을 찢어버렸고, 협상장을 뛰쳐나가는 그를 신계륜 의원이 말리면서 역선택 방지 조항의 무게를 부풀렸다고 한다. 그는 “당시 정몽준 지지율은 하락세, 노무현 지지율은 상승세였기 때문에 시간을 끄는 것도 우리 입장에서는 중요한 전략 중 하나였다”고 했다.
   
   역선택 방지를 양보하고 대신 질문 문항과 여론조사 실시 날짜를 유리하게 만드는 ‘2 대 1 딜(deal)’도 중요했지만 승부를 결정지은 쐐기같은 조항이 따로 있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지금 생각해 봐도 가장 중요했던 조항은 ‘조사 결과가 나오면 검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조사가 끝나고 설문지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체크하는 게 맞죠. 그런데 여론조사도 사람이 하는 일 아닙니까. 설문지에 체크가 애매하게 돼 있거나 1520명까지 조사해놓고 왜 1508명까지만 끊었는지 사후에 따지고 들어가면 논란이 벌어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는 단일화 여론조사 자체가 엉망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검증하지 말자’는 조항을 우겨넣었죠.”
   
   
   노무현 “모든 걸 맡기겠다 알아서 해라”
   
   그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아무리 못해도 2~3% 차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던 정몽준 후보 측에서는 ‘날벼락’을 맞자 패배 다음날 바로 여론조사기관으로 달려갔다. “아침에 정몽준 후보 측에서 여론조사기관으로 몰려간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당 책임자한테 연락을 했죠. ‘검증하지 말자’는 합의문 조항을 언론에 공개하고 젊은 당직자들을 여론조사기관에 보내 문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당시 그 조항이 없었으면 후보 단일화 자체가 무산됐을 겁니다.”
   
   그는 당시 협상과정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보여준 태도도 사뭇 달랐었다고 회고했다. 정몽준 후보는 자신의 협상 파트너였던 김민석 의원과 자주 통화하면서 협상 과정을 일일이 챙겼지만 노 후보는 협상단에 모든 걸 맡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노무현 후보가 실무 협상 전에 ‘모든 걸 홍 박사한테 맡기겠다. 하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한마디 하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2~3번 통화는 했지만 끝까지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지요. 대범함이 대단했습니다.”
   
   당시 정가에서 선거 전략가로 꼽히던 그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것은 ‘영남 후보론’ 때문이었다고 한다. “2000년 총선 무렵 한 시사잡지에 이른바 ‘영남후보’를 내세워야만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을 썼죠. 당시는 이인제 대세론이 한창이었을 때였습니다. 그 잡지가 나오고 얼마 안 있다가 노무현 부총재가 ‘한번 보자’고 전화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인연이 시작됐죠.”
   
▲ 야권 후보단일화 논의에 나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오른쪽)가 지난 11월 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photo 연합뉴스

   그는 당시만 해도 노무현 대통령은 부총재라는 유명무실한 직함만 갖고 있는 외톨이 정치인이었다고 했다. 누구도 차기주자감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때였지만 본인의 권력의지는 강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당시 차기주자로 발돋움한 발판이 해양수산부 장관직이었고, 이 과정에서도 그의 조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차기주자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장관직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노동부 장관처럼 이슈의 중심에 서는 자리가 아니라 한가한 장관직을 맡으라고 했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아끼던 3남 홍걸씨를 통해 청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결국 노 대통령은 당시 해수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차기주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갔고, 천당과 지옥을 오가던 지지율 부침과 피말리는 단일화 협상 끝에 권력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단일화도 질문이 중요
   
   그는 단일화 협상에서 승리한 직후 노무현 후보와 가졌던 술자리도 회고했다. “여의도 일식집 ‘거해’에서 한 3시간 가까이 둘이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때 노 후보에게 몇 가지 직언을 했습니다. ‘절대로 미국을 건드리지 마라. 미국 없으면 큰일 난다. 재벌 해체도 큰일 나는 얘기다, 기업은 천천히 개혁해도 된다. 정몽준 후보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일단 다 준다고 얘기하라’ 등등의 얘기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그때 노 후보가 제가 자신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완전히 결별했다고 한다. 당선자 시절 롯데호텔에서 가진 한 모임에서도 그는 다시 ‘반미하지 마라’ 등등의 건의를 했고, 당시 노무현 당선자는 자신의 측근들이 늘어선 자리에서 “여기서 당신만 우파 같다”며 일침을 날렸다고 한다.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정치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노무현 정권 시절 스탠퍼드대 연수를 갔다왔고 현재는 저술과 강연에만 전념하고 있다. 2010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교차하던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근대성을 찾는 작업을 2년 동안 진행해 ‘인상주의-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생각의 나무)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최근 진행 중인 문재인·안철수의 단일화 협상에 대해서는 “이제 정치는 관심 없다”면서도 “누가 되든 단일화가 이뤄지면 지지율 상승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이번에도 단일화가 여론조사 방식으로 이뤄지면 질문이 어떻게 짜여지느냐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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