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는 후보 등록 하루 전인 11월 24일에 여론조사를 통해 노 후보의 승리가 확정됐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10년 전에 만약 후보 단일화가 열흘 정도만 일찍 실시됐다면 정 후보가 승리하면서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2002년 월드컵 축구 열풍이 가라앉으면서 20·30대 등 진보층이 정 후보에서 노 후보로 돌아서며 정 후보 지지율은 하락, 노 후보 지지율은 상승 국면이 이어졌기 때문에 단일화가 빨리 성사됐으면 여론조사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그 순간 민심의 ‘스냅사진’에 불과하고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02년 대선의 ‘복사판’으로 불리는 올해 대선도 보수 후보에 맞선 야권 후보들의 유력한 단일화 방식으로 여론조사가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야권 단일후보에 대한 여론은 10년 전에 비해 훨씬 혼란스럽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포함한 3자대결에서는 선두인 박 후보에 이어 지금까지 안 후보가 문 후보에게 한 번도 2위를 내주지 않았지만, 야권 단일후보를 정하는 조사에선 두 후보의 우세가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4일 SBS와 TNS코리아가 전국 유권자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3자대결에서는 박근혜 39.2%, 안철수 25.1%, 문재인 22.7% 순이었다. 야권 단일후보로 누가 ‘적합’한지에 대한 질문에서는 문 후보가 48.6%로 37.6%인 안 후보를 앞섰지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층만을 대상으로 박 후보와 ‘경쟁’할 단일후보로 누구를 지지하는지 묻자 거꾸로 안철수 49.2%, 문재인 43.4%로 나타났다. ‘적합도’와 ‘경쟁력’을 묻는 질문에 따라 야권 단일후보에 대한 유·불리가 달라진다는 조사 결과였다.

“여론조사 단일화 문제 있다”

여야(與野) 정치권에서는 이처럼 불안정한 여론조사로 후보 공천이나 단일화 경선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최근 언론 기고문을 통해 “국민의 의사가 조변석개(早變夕改)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과연 ‘국민 눈높이’를 대변할 수 있을까”라며 “여론조사는 단어 하나만 바꿔도 결과가 매번 널뛰기한다”고 했다. 그는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는 노무현·정몽준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건 동전 던지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도 했다. ‘여론조사 단일화는 동전 던지기’란 말은 지난 2010년 서울시장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오세훈 후보에 맞선 나경원·원희룡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나왔다. 당시 원 후보는 나 후보에게 “여론조사가 동전 던지기보다 더 유리할 테니까 받으시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단일화 여론조사가 여론의 파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동의할 만한 균형점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단일화가 ‘동전 던지기’ 또는 ‘제비뽑기’나 ‘가위바위보’에 비유되는 이유는 여론 흐름의 불안정성이나 질문의 내용에 따른 결과 차이, 그리고 여론조사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오차범위’를 무시하는 규칙 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다양한 조사방법의 등장과 함께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도 조사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작년 초부터 컴퓨터에서 무작위로 전화번호를 생성한 뒤 전화를 걸어 전화번호부에 등록되지 않은 가구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하는 RDD(Random Digit Dialing) 조사 방식이 개발됐다. 또 집전화 없이 휴대전화만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작년 말부터는 휴대전화로도 표본을 추출해 일정 비율을 조사하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최근의 여론조사는 이러한 방식의 조합이 가능해지면서 어떤 방식을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가구 중에는 보수층이나 고연령층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RDD 방식보다는 여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 공산이 크다. 또 휴대전화 이용자는 저연령층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표본에 휴대전화 이용자를 얼마나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소 다르다. 예를 들어 지난 10월 27일 미디어리서치는 집전화와 휴대전화 이용자를 절반씩 병행해 조사했는데, 다자대결 지지율이 집전화로는 박 후보 41.5%, 안 후보 21.0%, 문 후보 17.2%였다. 이에 비해 휴대전화는 박 후보 36.0%, 안 후보 26.2%, 문 후보 21.3%였다. 집전화에 비해 휴대전화에서 박 후보의 지지율이 5.5%포인트 낮아졌고, 안 후보와 문 후보의 차이는 3.8%포인트에서 4.9%포인트 높아졌다. 즉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는 저연령층에서 박 후보와 문 후보는 불리하고 안 후보는 유리하다는 의미다.

여론조사는 참고용… 제자리 찾아줘야

표본추출 방식 외에 일반적인 전화 면접원의 조사 방식과 녹음한 질문 내용을 들려주고 번호를 누르게 하는 ARS(자동응답시스템) 방식의 결과 차이도 있다. ARS 조사 방식은 기계음을 끝까지 듣고 지지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응답률이 저조하다. 그래서 특정 후보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지지층에선 응답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지지 강도가 높은 후보가 유리하다.

여론조사로 공직 후보를 정하는 것에는 조사 방식을 정하는 것 이외에도 조사를 담당할 ‘여론조사 회사’의 선정도 각 후보 진영이 신경을 쓰고 있는 대목이다. 다른 조사 회사에 비해 특정 후보의 지지율이 다소라도 높은 결과를 수차례 발표한 회사는 정치권에서 ‘어느 정파와 친분이 두터운 곳’으로 찍히면서 기피 대상으로 배제되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조사 회사들은 “정치권의 여론조사 오용(誤用)에 따른 억울한 낙인 찍기”라고 반발하지만 이들의 명예가 제대로 회복된 경우는 없다.

정치권이 후보 단일화 도구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선 학자들의 경고도 끊이지 않고 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여론조사가 승자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정작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응답자들은 그런 정치적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한 채 대답한다”며 “호감이나 관심, 인기가 그에 대한 지지로 곧바로 전환하게 되는 여론조사 방식은 정당정치의 유동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는 “영국 BBC방송의 선거보도준칙에 따르면 여론조사 결과는 참고만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국가 전체를 위해 여론조사 결과는 정책 결정자들이 참고하는 자료로만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여론조사에 대통령을 만드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할 게 아니라 여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참고자료라는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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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림 조선일보 여론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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