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가 국제문제로 공론화된 시점은 영변 핵시설에 대해 미국이 의구심을 가진 1989년이지만 북한이 핵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종식 직후인 1950년대부터의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폭격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던 북한은 1954년 인민군을 재편성하면서 인민군 내에 ‘핵무기 방위부문’을 설치했다. 1956년 30여명의 물리학자를 소련의 ‘드부나 핵 연구소’에 파견했는데 이것이 북한 핵개발 노력의 효시가 된다. 또한 1959년 9월 체결된 조소(朝蘇)원자력 협정은 북한 핵개발 정책의 공식적 출범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1962년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고 이어 김일성대학과 김책공과대학에 핵 연구 부문을 창설, 자체적으로 핵개발 인원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1965년 6월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IRT-2000 원자로를 도입, 본격적인 핵 연구를 시작했고 이 무렵부터 북한의 지도자들은 핵 보유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65년 10월 노동당 집회에서 “불원간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1967년 군 지휘관 회의에서 “우리도 원자탄을 생산하게 됐다.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하면 우리도 사용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는 기록도 있다. 1970년 당시 북한 부총리였던 박성철은 북한을 방문한 일본 사회과학 대표단에게 “1972년까지 원폭 제조에 노력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은 국내적으로는 핵 개발을 위해 은밀하게 노력하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연막전술을 펼쳤다. 1974년 7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 국제원자력 안전 체제에 들어갔으며, 1989년부터 1991년까지 IAEA 이사국이기도 했다. 한국이 국제원자력 기구에 국장급을 파견한 데 반해 북한은 대표부를 상주시키는 등 자신의 핵무장 의지를 감추려 노력했다. 1980년대 이전 국제사회로부터 핵무장 의혹을 받은 측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북한이 이처럼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핵무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이들이 처한 국제정세로부터 연유한다. 우선 북한은 한국전쟁 중 미국의 공군력과 핵무기를 매우 두려워했으며, 특히 소련이 한국전쟁 중 보인 ‘나 몰라라 식’ 행태와 중공군이 한국전쟁 참전 중 보인 북한에 대한 안하무인적 방자함은 북한으로 하여금 “독자적 전쟁 수행 능력” 확보라는 군사전략적 발상을 가지게 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중·소 갈등의 노골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 편도 소련 편도 아니라는 ‘주체사상’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북한의 핵 보유 논리

그러나 북한은 1980년대 이전 국제사회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반핵 정책을 표명했고 특히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반미, 반핵,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까지 제시하며 자신의 핵무장 노력을 눈가림했다. 1985년 12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 자신의 핵 계획이 평화 목적에 국한되는 것임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 북한 핵 문제의 국제적 발단이 시작된다. NPT 가입국은 18개월 이내에 국제원자력기구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동 기구로부터 핵사찰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며 버텼다.

미국은 결국 1989년 1월부터 북한을 A급 감시지역으로 설정하고 군사정찰위성의 정찰 활동을 평소 수준보다 몇 배 증강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영변 핵시설은 미국 정찰위성의 집중 관찰 대상이었다. 미국은 1989년 7월 영변에 핵폭탄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이 있다고 발표했고,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 등 군사 전문잡지들은 영변 시설이 핵무기 제조 시설임을 주장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국제 공론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상업용 정찰위성 스폿(SPOT)이 촬영한 영변 핵시설 사진을 일본 도카이(東海)대학 정보기술센터가 판독하게 했다. 1990년 2월 7일 도카이대학은 북한이 건조 중인 원자력발전소, 핵연료 재처리 시설, 방공포 등 군사시설이 찍혀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영변의 핵시설이 원자력발전 시설을 넘어 핵무기를 준비하는 시설물이라는 점을 온 세계에 알렸다.

이처럼 야기된 북한 핵 문제는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핵합의가 체결될 때까지 밀고 당기는 상황을 지속했다. 1994년 6월 미국의 북한 핵시설 폭격 계획은 긴장이 최고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후 미국은 북한과 ‘엉성한’ 합의를 이룸으로써 소위 제1차 북한 핵 위기를 종결시킨다.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핵합의를 통해 북한 핵 활동을 ‘동결’시키는 수준에서 합의를 하고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과 한국이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고 중유 제공 등 경제 지원을 한다는 것이었다.

1994년 10월 북한이 미국과 급히 합의를 이룬 것은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 권력이 공고화되지 못한 김정일이 미국과 계속 다툴 경우 이득이 없을 것이며, 일단 미국이 동결 수준에서 북한 핵을 허락하니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당분간 시간을 벌자는 의도였다. 소련이 몰락하고, 중국마저 공산주의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수교까지 한 마당에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 역시 소련이 와해된 마당에 북한의 공산주의가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북한 핵을 원천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방안인 북한 핵시설 폭격을 대한민국 대통령이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마당에 미국은 북한에 핵이 한두 발쯤 있는 것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 김일성광장에 모인 북한군과 시민들. ⓒphoto AP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 김일성광장에 모인 북한군과 시민들. ⓒphoto AP

제2차 핵 위기와 북한의 핵무장 전략

그러던 중 미국이 북한의 핵을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보아야 할 대사건이 발생한다. 2001년의 9·11 테러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9·11 이전 미국은 북한의 핵폭탄을 ‘핵 확산의 문제’로 보았다. 북한의 핵이 아랍권 국가들로 확산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9·11 이후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테러리즘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다. 돈이 궁한 북한이 테러분자들에게 핵폭탄을 판매한다면, 미국은 당장 핵 테러의 위협에 당면할 판이었다. 북한에 단 한 발의 핵폭탄 보유조차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구나 북한이 우라늄 농축 방법을 통해 핵개발을 시도한다는 정보도 있었다. 2002년 10월 3일 미국 특사 제임스 켈리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고 미국 특사와 북한 대표 간에 격한 논쟁이 있었다. 10월 4일 아침 북한은 켈리 일행에게 “우리는 우라늄 농축 핵 개발은 물론 더 무서운 것도 가지고 있다”며 소리쳤다. 이날의 소동은 2주일 후에 한·미 양국에 의해 동시에 공개되었다. 이후 오늘까지 북한 핵으로 인한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권 담당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핵을 개발했다. 북한의 위정자들은 국민이 아니라 자기들이 사는 길을 택했고 그래서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핵폭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비록 경제는 파탄났어도 군사력은 막강하다며 북한 주민들에게 강성대국이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핵의 성격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정권 안보’의 수단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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