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한 새터민 대학생 19명이 원폭위령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위령비 뒤쪽으로 원폭피해의 상징인 ‘원폭돔’이 보인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한 새터민 대학생 19명이 원폭위령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위령비 뒤쪽으로 원폭피해의 상징인 ‘원폭돔’이 보인다.

지난 6월 24일 새벽 5시. 김미영(22)씨는 서울 일원동에 있는 고시원을 나섰다. 9시30분발 일본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타려면 인천공항에 7시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자신이 묵고 있는 3.3㎡(1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며칠 전부터 가방을 싸 놓고 빠진 것이 없나 짐을 풀었다 싸기를 몇 번 반복했는지 모른다. 지난 밤에는 여행갈 생각에 설레서 잠을 설쳤다.

김씨는 새터민이다. 앳된 얼굴의 20대지만 김씨는 2010년 인신매매단에 의해 고향인 함경북도 무산에서 중국으로 팔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월 한국에 들어왔다. 2012년 7월 새터민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나와 남한 생활을 경험한 지 채 1년이 안 된다. 혈혈단신 넘어와 친척이라곤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2시간 넘게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한 김씨의 손에는 여권이 꼭 들려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힌 초록색 새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김씨는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여권을 손에 쥐기 위해 김씨는 사선을 넘었다. ‘이 여권만 있었어도 남한에 오기 위해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 여권으로 가족이 있는 북한에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제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어느 나라든 갈 수 있다’…. 여권을 들여다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지난 두 달 동안 함께 강의를 들었던 친구들이다. 나이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지만 모두 자신과 같은 새터민 젊은이들이다. 김씨의 눈에 친구들은 한껏 여유로워 보인다. 일찍 남한에 와서 잘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남한 학생들과 거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옷 입는 것도 세련됐고 표준어도 잘 구사한다.

히로시마 시립대학교를 방문한 새터민 대학생들이 국제학부 일본학생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다.
히로시마 시립대학교를 방문한 새터민 대학생들이 국제학부 일본학생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다.

김씨는 한반도미래재단(이사장 구천서)이 주관하고 통일부가 후원하는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제5기생이다. 이번 일본 여행은 9주간 진행되는 통일지도자아카데미의 한 과정인 해외교류 프로그램. 원폭의 현장인 히로시마를 찾아 히로시마 시립대학교 평화연구소와 평화기념공원 등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이번 여행에 참여한 사람은 김씨를 포함해서 19명이다. 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생들이다. 연세대, 고려대, 한국외국어대, 성균관대 등에 재학 중인 학생들로 경찰행정학과, 심리학과, 영화학과, 간호학과 등 대학도 전공도 다양하다. 나이는 21살부터 38살까지로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만학도도 있지만 20대가 대부분이다. 19명 중 남학생은 4명이다. 탈북 시기는 2000년대 후반이 가장 많고 1997년 초창기에 압록강을 건너온 사람도 있다. 일행 중 가장 최근 남한에 정착한 김씨 역시 대학생이 되기 위해 지금 입시를 준비 중이다.

기자가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4월 25일이었다. 통일지도자아카데미 5기 수업을 처음 시작하는 날이었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한반도미래재단 사무실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온 대학생들이 빙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선발된 학생들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말투도 외모도 발랄한 대학생이었다. 핫팬츠에 염색머리,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자기소개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았다. 남한의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르게 튀어 보일까 고민할 때 이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이 닮으려고 애쓴 남한의 평범한 대학생 모습이 이들의 전부일까. 탈북 과정에서 삶의 신산함을 겪었을 이들의 무장해제된 맨얼굴을 보고 싶었다. 두 달간의 강의가 끝나고 히로시마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나선 이유였다.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이뤄진 북한 이탈 대학생 19명의 방문은 히로시마에서도 화제였다. 히로시마현의 지방방송국인 ‘주고쿠호소(中國放送)’와 ‘주고쿠신분샤(中國新聞社)’에서 취재를 나왔다.(주고쿠 지방은 일본 본토 최남단의 5개 현을 가리키며, 히로시마현도 주고쿠 지방에 속한다.) ‘주고쿠호소’ 이토 마사유키 기자는 “북한 이탈 청년들이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북핵이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폭이 떨어진 역사적 장소에 온 만큼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주고쿠호소’는 2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문단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고 일부 학생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문단은 히로시마 시립대학교의 평화연구소를 찾아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평화연구소장의 강연을 듣고 국제학부 학생 20여명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히로시마 시립대학교와의 교류는 평화연구소 조교수로 있는 한국인 김미경씨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현지 방송 촬영팀은 얼굴 노출을 꺼리는 학생들 때문에 애를 먹었다. 19명 중 가족이 모두 탈북한 경우는 2~3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2박3일간 동행한 기자에게도 경계심은 마찬가지였다. 첫날은 카메라만 들어도 얼굴을 돌리거나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했다. 말을 걸면 “녹음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인천공항에서 이들의 명단을 받아들자마자 이름부터 외우기 시작한 것이 주효했다. 이동하는 사이사이 이름을 부르고 농담을 걸자 조금씩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언제든 손을 잡을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째부터 훨씬 긴장이 풀어진 이들은 자신들이 숨겨왔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줬다. 앳된 대학생 얼굴 뒤에 감춰놓았던 이야기는 예상대로 절절했고 아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며칠 밤을 새우며 들어도 끝나지 않을 소설 같았다. 자유를 찾기 위한 대가로 이들은 어린 나이에 겪어서는 안 될 일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이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지만 몇 번이나 가슴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왔다.

현재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새터민은 2만5000명을 돌파했다. 이 중 대학생이 된 새터민은 1470명이다.(2012년 통일부 교육지원금 대상자 기준) 학업을 포기하거나 휴학하는 학생도 부지기수다. 한국청년정책연구원 고강섭 연구원이 2008년 수도권 새터민 대학생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새터민 대학생 중 28.4%가 학업을 포기했고 43.6%는 휴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를 적용하면 대학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졸업까지 무사히 마치는 경우는 전체의 30%에도 못 미친다.

힘들게 대학을 다니는 이들 새터민 대학생들은 통일을 대비해 남북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남북한에서 모두 겪은 삶과 지식으로 남북의 이질감과 오해를 가장 앞장서 메워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키워야 하는 이유이다. 2박3일 동안 이들이 토해낸 생생한 목소리를 소개한다. 이들이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고민하는지, 이들이 히로시마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현재·과거·미래로 나눠 싣는다. 신분 노출을 꺼려하는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모두 가명으로 실었다.

6월 25일 히로시마 시립대학교 강의실. 19명의 새터민 대학생과 히로시마 시립대학교 국제학부 학생 20명이 마주 앉았다. 이들은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주제로 90여분간 자유 토론을 벌였다. 북한 출신을 볼 기회가 없었던 히로시마 시립대 학생들은 호기심이 가득했고 진지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 만난 게 처음이다. 일본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았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를 따라 탈북을 한 경우도 많을 텐데 한국에 오니 어떤가.”

“여러분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통일이 어떻게 실현됐으면 좋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북한과 남한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일본 학생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새터민 대학생들의 대답도 적극적이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일본의 부정적 여론에 대해 꼬집기도 했다.

2002년 중학생 때 탈북한 고미정(28)씨는 “남북한 교육이 다르고 특히 사회, 역사 과목이 혼란스러웠지만 어렸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빨랐다. 지금은 남한에서 태어난 걸로 착각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남한에 온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터민 대학생들은 대부분 통일에 대해 밝은 전망을 이야기했다. “갑작스러운 붕괴가 아니라 교류를 통한 자연스러운 통일을 원한다. 여러분을 비롯해서 NGO 등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통일이 가능하다는 증거이다” “남한의 기술력과 북한의 지하자원이라면 통일 직후는 힘들겠지만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했다.

방문단 중 최고 연장자인 김해성(38)씨가 “인터넷에서 일본 대학생 80%가 ‘남북통일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여러분은 어떤가”라고 묻자, 나고시 지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학생이 “‘왕(더킹투하츠)’이라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 남한 왕자와 북한 여성이 결혼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통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히로시마에도 한류는 거셌다. 한국 가수 아이유를 좋아한다는 다케다 쇼우씨는 서툰 한국말로 “북한은 무서운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뉴스에서 본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젊은이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똑같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단어 하나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 측에서 “한반도 통일이 되면 난민이 많이 발생할 것이다.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우려스럽다”는 질문을 하자 방문단 쪽이 술렁이며 “남과 북은 한 민족인데 우리가 왜 난민이냐”고 강한 항의성 발언이 터져나왔다.

질문이 쏟아지면서 정해진 시간을 넘겼다. 진행자가 나서 방문단 쪽에 마지막 마이크를 넘기자 “무관심해도 좋은데 남북한이 통일하려고 할 때 일본이 뒷다리만 잡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발언이 나왔다. ‘뒷다리’라는 표현에 웃음이 터진 방문단은 “일본 학생들에게 통역하지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히로시마 시립대학교를 나온 새터민 대학생들의 다음 방문지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며 1970년 조성된 이 공원은 연 100만명이 찾는 곳이다. 공원 옆을 흐르는 오타가와강은 원폭 투하 당시 화상을 입은 희생자들이 뛰어들어 시체로 뒤덮였다고 한다. 초토화된 건물들 속에서 살아남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원폭돔’ 건물이 앙상한 철근을 드러낸 채 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기념공원 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에는 피폭 당시 처참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피폭 직후 도시 모형부터 온몸에 화상을 입고 사지가 절단된 희생자의 사진, 갈기갈기 찢어진 옷가지까지 핵의 참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쟁 당사국이라는 원죄는 덮고 일본의 피해만 강조해 놓았다는 비판 위에 세워지긴 했지만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핵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기념관을 둘러본 학생들은 ‘북한에서 자신들이 자랑스러워했던 핵무기’의 실상을 파악하고 충격을 받았다.

“핵무기의 피해자가 결국은 무고한 시민이라는 것을 여기 와서야 깨달았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끔찍하다.”

“김정일이 ‘과거에 배는 불렀지만 총알이 없어서 졌다. 배가 고파도 총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히로시마 원폭처럼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북핵이 얼마나 많은 북한 사람들을 굶어 죽게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핵무기가 인민을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김정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에서는 북핵이 세계 최고라고 배웠다. 핵이 있어 든든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지 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몰랐다. 절대 핵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

방문단 중 김해성씨는 “북한에 남아있는 오빠가 입대해 북한 경수로 사업장에 배치받았다. 이상하게 늘 몸이 좋지 않고 시들시들했다. 휴가 나올 때도 보위부원이 한 명씩 따라다녔다. 입단속시키려고 그랬던 것 같다. 정보를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여러 장 썼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돌아선 방문단은 히로시마 원폭 현장에서 북핵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현재 이들이 겪고 있는 고민들은 저녁 자리에서 터져나왔다. 방문단 소식을 듣고 주히로시마 한국 총영사관이 만찬을 마련했다. 신형근(59) 총영사는 히로시마로 오기 전 베이징, 칭다오, 선양 등에서 10여년 근무하면서 누구보다 탈북 주민들을 많이 접했다. 자신이 중국에 근무하던 기간 동안 공관에 머문 탈북 주민이 평균 20여명에 이를 정도여서 주 업무가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는 일이었다고 한다. 새터민들 문제에 관심이 많은 신 총영사가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달해 주겠다”고 말하자 현실적 문제들이 쏟아졌다.

“성적을 C+ 이상 유지해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남한 학생들과 달리 우리에겐 너무 힘든 일이다. 탈북하느라 도중에 공부에서 거의 손을 놓은 데다 영어 등 학력 차이가 엄청나다. 생활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해야 한다.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거나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다.”

“하나원에서 ‘남한에는 사기꾼이 많다.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만 귀에 못이 박히게 듣다 보니 사회에 대해 부정적이 되고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부모와 함께 남한에 온 탈북 아이들의 문제가 심각하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의지에 따라 남한에 왔다. 왕따 당하고 학교에 적응하기 힘든데 부모들은 먹고사느라 바쁘다.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대책이 필요하다.”

김수현(23)씨는 라오스에서 강제북송된 어린이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탈북은 결국 돈이다. 돈을 들인 만큼 안전하다. 원래 아이들 9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다. 위험하기 때문에 4~5명 단위로 끊는데 아마 돈이 부족하다 보니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 잘못된 것 같다. 아프리카 난민들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같은 민족인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번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속상하고 안타깝다.”

김해성씨는 “외국인들보다 탈북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더 차갑다”고 했다. “너 정말 힘들었구나 말 한마디 해주고 손을 내밀어주면 우린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김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국경을 넘고 또 넘어 남한 땅에 들어와 부딪힌 현실의 벽은 이들에게 너무 높은 듯했다.

이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는 가혹했다. 탈북경로도 다양했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강제북송의 위험 속에 떨며 지낸 세월이 평균 2~3년을 넘는다. 중국에서 9년을 기다리다 입국한 경우도 있었다.

권재희(26)씨는 1997년 북한을 떠났다.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중국 구경을 시켜준다면서 권씨를 목에 태우고 밤에 몰래 강을 건넜다. 강을 반쯤 건넜을까. 굴착기가 모래를 퍼 올리는 바람에 움푹 파인 곳이었는지 강바닥이 깊어지면서 갑자기 몸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놀란 권씨가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북한 쪽에서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물을 먹은 권씨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아버지는 죽을 힘을 다해 강을 건넜다.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중국인 집에 권씨를 맡겨놓고 한국으로 먼저 건너왔다. 10살이던 권씨에게 아버지는 “3개월간 연락이 없으면 죽은 줄 알고 알아서 살아라”고 말했다. 한국에 들어와 조사를 받느라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7개월이 지나고서야 권씨에게 사람을 보냈다. 어머니와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한국에 들어와 일반학교에 들어가 보니 말투가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부터 고치기 시작했다. 신문을 소리 내서 읽고 녹음을 해서 들으며 교정을 하다 보니 한 달 만에 사투리가 고쳐졌다. 완벽하게 표준어를 쓰는 권씨는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새터민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권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다.

엄정용(28)씨는 1997년 북한군 장교였던 아버지 손을 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12살 때였다. 베이징대사관을 통해 남한으로 오려던 계획을 세우고 베이징에 있는 한 성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 입국 순서를 기다리던 중 일이 터졌다. 황장엽 망명사건이 터지면서 남한 가는 길이 막힌 것이다. 엄씨를 먼 친척집에 맡겨두고 아버지는 시골로 숨어들었다. 3년쯤 지났을까. 아버지는 단속에 걸려 강제북송됐다. 그 뒤로 아버지는 소식이 끊겼다. 홀로 남겨진 채 9년이 흘렀다. 처음 엄씨 부자의 남한행을 도와줬던 성당의 수녀님이 다른 임지를 여러 군데 거치다 돌아와 엄씨를 만났다. 수녀님은 “아직도 여기 있느냐”면서 깜짝 놀랐다. 수녀님이 다시 나섰다. 함께 북한을 떠났던 아버지의 생사는 알 길 없이 혼자서 남한 땅을 밟았다.

이민영(24)씨는 탈북자 대부분이 육로를 택한 것과는 달리 목선을 타고 서해상으로 내려왔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어머니께 바깥세상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 언젠가는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8년 이씨는 ‘통통이’라고 부르는 고깃배를 혼자 타고 황해도 해주를 출발했다. 10번도 넘게 시험 삼아 배를 몰고 나갔다 돌아오며 탈북을 준비해 왔다. 그날도 진짜 탈북에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보름달이 환했다. 목표는 연평도였다. 모터를 끄고 물살에 배를 맡겼다. 좌우에서 왔다갔다 하는 북한 경비정을 뚫어야 했다. 경비정이 중국 어선에 집중하는 사이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니 연평도가 보였다. 연평도를 빙 둘러 가는 동안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해변에 배를 대고 한참을 기다리니 군인 한 명이 총을 들고 나타났다. “위쪽에서 왔다”고 말하자 10분 후쯤 바다와 섬 쪽에서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엄청난 병력이 출동했다. 그때가 새벽 4시였다. 해주에서 저녁 9시에 출발해 바다에서 하루를 보내고 남한 땅을 밟는 데 꼬박 31시간이 걸렸다. 이씨는 “물이 차오르는 배를 끌고 넘어온 시간이 통째로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다. 머릿속이 하얗게 됐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미현(23)씨는 2006년 450달러를 들고 가출해서 중국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재일동포로 1970년대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왔다. 아버지는 일가 친척들이 일본에 사는 덕분에 일본에서 중고 전자제품, 중고 자전거 등을 수입하며 돈을 꽤 벌었고 김씨는 부족함 없이 잘살았다. 북한에서 사업을 하려면 수익의 99%는 국가에 내야 한다. 김씨는 “사업을 하다 보면 상납을 잘해야 하는데 탈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업하는 아버지 친구들 중 70% 이상이 체포돼 죽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부모도 결국 뭔가 빌미를 잡혀 체포됐다. 만신창이가 돼서 나온 어머니를 보고 “북한에서 살다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김씨는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집에 있는 돈을 들고 무작정 나와 중국에 사는 이모를 찾아갔다. 일본으로 오라는 친척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한국을 선택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딸의 탈북 사실이 드러난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고 끝내 사망했다. 뒤늦게 자신을 찾아 탈북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북한에는 오빠가 아직 남아 있다. 일본 친척들은 아직도 “아버지가 죽은 게 네 탓”이라며 김씨를 원망한다고 했다.

김해성(38)씨는 2002년 “중국에 가서 한 달만 고사리를 따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브로커를 따라나섰다가 길림 인근 농촌에 사는 중국 남자에게 팔려갔다. 도망치려고 기회만 노리던 중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다시 주저앉아 딸을 낳고 살다 옆집과 싸움이 붙었다. 앙심을 품은 옆집 사람이 김씨가 탈북자라고 신고하는 바람에 딸만 안고 야반도주해 길림 시내로 나왔다. 수중에 100원밖에 없었고 배고픈 딸은 울어댔다. 김씨는 “아이가 굶어죽는데 몸이라도 못 팔까 하는 생각으로 술집으로 찾아갔다. 다행인지 외모가 못 따라 줘서 퇴짜를 맞았다”고 말했다. 신문 구인난을 보고 한국인이 하는 회사를 찾아가 “무조건 취직해야 한다”면서 문 앞에 자리 깔고 시위를 했다. 사장이 일주일 안에 한글타자 200타를 치면 생각해 보겠다며 조건을 제시했다. 난생처음 컴퓨터를 만진 김씨는 5일 만에 200타를 넘겼다. 1~2년간 통역일도 하고 회사를 다녔지만 탈북자 단속이 점점 심해졌다. 결국 남한행을 택했다. 남한에 오면 받을 정착금을 주기로 약속하고 브로커를 따라나섰다. 어린 딸과 함께 중국 선양과 쿤밍을 거쳐 하룻밤을 걸어서 라오스와 미얀마 국경을 넘었다. 다시 배를 타고 태국을 거쳐 2009년 남한으로 들어왔다.

2010년 탈북한 김미영(22)씨는 중국에 살고 있던 친구 집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 엄마를 따라나섰다. 자동차 타이어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다준 브로커가 친구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중국 남자에게 자신을 팔아 넘겼다. 눈앞에서 몸값 5만원(약 900만원)이 건네지는 것을 봤다. 어딘지도 모르고 팔려간 마을에는 10년 전에 탈북했다는 여성이 중국 남성들을 상대로 북한 여성 공급책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그 여성의 집에서 자신처럼 브로커들에게 팔려온 북한 여성들을 많이 봤다. 김씨가 팔려오고 나서 얼마 있다 공급책이었던 여성은 중국 공안에 체포됐고, 김씨를 포함한 탈북 여성들은 단속을 피해 숨어 다녔다. 김씨는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12년 남한으로 왔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 꿈입니다.”

새터민 대학생 19명이 낯선 히로시마에서 자신의 꿈을 털어놓았다. 여느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가장 큰 고민은 취업이었지만 이들의 꿈이 닿는 곳은 북녘 땅이었다. 어떤 직업을 택하든 북한 문제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머지않은 미래에는 통일된 한반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북한 인권을 걱정하고 자신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는 한 학생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가장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이들에겐 보통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 속에는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가 들어있었다.

김○○(24) 함경북도 청진, 2006년 9월 탈북, 사회학과

기자가 꿈이었는데 북한 인권활동을 2년여 하다 보니 인권변호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부모님도 북한에서 부당한 인권침해를 많이 당했다. 사회학과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일단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싶고 북한 인권운동을 돕고 싶다.

김○○(38) 양강도, 2002년 탈북, 사회복지학과

방송통신대 야간을 다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어 일반 대학으로 편입했다. 노동부에서 새터민 취업담당일을 했다. 새터민들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고 남한 사회에도 적응을 못하더라. 좀더 공부해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 언젠가는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고향의 형제들 앞에 떳떳하게 서고 싶다.

박○○(22) 함경북도 회령, 2007년 탈북, 영화학과

탈북 과정에서 인권유린 현장을 많이 목격했다. 나를 비롯해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어 영화학과에 갔는데 쉬운 길이 아닌 것 같다. 기자가 되고 싶어 통일부 대학생기자단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글쓰기가 어렵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22) 양강도 혜산, 2006년 탈북, 정치외교학과

중국~라오스~태국을 거치면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헌신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대학을 다니다 보니 북한 인권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NGO 난민캠프 같은 곳에서 일하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

권○○(26) 함경북도 무산. 1997년 탈북, 경제학과

새터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돈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많이 봤다. 부모님도 역시 돈 때문에 힘들었다. 금융권에서 일하고 싶다.

엄○○(28) 함경북도 단천, 1997년 탈북, 중국어과

어렸을 때는 파일럿이 꿈이었는데 살다 보니 바뀌더라. 내 꿈은 남들처럼 거창하지 않다.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일을 하면서 평범한 가정을 갖고 살고 싶다.

이○○(24) 황해남도 해주, 2007년 4월 탈북, 경찰행정학과

대부분 통일 이후 경제를 걱정하는데 나는 치안이 가장 걱정이다. 한반도 치안이 안정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힘을 보태고 싶다.

조○○(30) 함경북도 회령, 1998년 탈북, 독어독문학과

14살에 탈북해 10년 가까이 중국에서 살았다. 공부할 기회를 놓쳐 늦게 대학을 갔다. 중국에 있는 북한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권○○(22) 함경북도 청진, 2007년 탈북, 식품영양학과

북한 아이들은 기아에 허덕여 지능지수가 낮다. 2차 성장까지 끝난 청소년의 경우 영양이나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 통일 이후 영양학 연구를 통해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김○○(21) 함경북도 회령, 2002년 탈북, 간호학과

유학을 가고 싶다. 세계 여러 나라의 지식인을 만나고 싶다.

전○○(31) 함경북도 나진, 2008년 탈북, 심리학과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다. 사회 참여적인 일을 하고 싶다.

김○○(22) 양강도, 2010년 탈북

통일은 언제든 될 것이고 남북 사람들이 갈등을 많이 겪을 것이다. 갈등이 생기면 싸움도 생긴다. 서로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심리를 공부해서 남북 사람들이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박○○(27) 평안남도 남포, 2009년 탈북, 경영학과

여성 CEO가 돼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김○○(23) 양강도 혜산, 2005년 10월 탈북, 경찰행정학과

인권을 위해 일하는 경찰이 되고 싶다.

김○○(23) 양강도 혜산, 2001년 탈북, 중국어과

졸업하면 중국으로 가서 뭐든 해보고 싶다.

고○○(28) 평양, 2002년 9월 탈북, 일어일문학과

살아보니 돈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어서 통일되면 돈으로 기여를 하고 싶다.

유○○(26) 함경북도 회령, 1999년 탈북, 경영학과

남한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경제적으로 어렵다. 빨리 좋은 회사 취직하고 싶다.

심○○(22) 황해북도 사리원, 2008년 4월 탈북, 경영학과

일단은 졸업하는 것이 목표이다. 졸업하면 유학을 떠나 더 큰 세상을 배우고 싶다.

한○○(28) 함경북도 새별군, 2006년 탈북, 경찰행정학과

경찰이 돼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통일지도자아카데미는

“통일지도자 1000명 키운다”

구천서 한반도미래재단 이사장이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제4기 수료자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다.
구천서 한반도미래재단 이사장이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제4기 수료자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적산동 적산빌딩 한반도미래재단에는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새터민 대학생 20~30명이 모인다. 이들은 한반도미래재단에서 주관하고 통일부가 후원하는 ‘통일지도자아카데미’ 과정의 학생들이다. 통일시대를 이끌 글로벌 리더 양성을 내세운 통일지도자아카데미는 2011년 4월에 제1기 과정을 시작해서 4기까지 졸업생 120명을 배출했고 현재 5기 21명이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한반도미래재단 구천서 이사장은 “통일이 됐을 때 실질적으로 북한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북한 출신들이다. 새터민 대학생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면서 “통일 지도자 1000명을 양성하겠다”고 말했다.

한반도미래재단은 2009년 10월 설립, 통일관련 연구와 국제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통일지도자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통일지도자아카데미는 9주 과정으로 통일과 관련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사를 비롯 매주 각계 명사를 강사로 초청해 강의를 듣고 해외교류 프로그램과 DMZ 방문 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오현금 한반도미래재단 대외협력위원장을 비롯해 유기풍 서강대 총장, 심상진 경기대 교수(전 현대아산 상무),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정영태 통일연구원 박사, 오태라 한미연합사 공군중령 등이 강사로 나섰다.

구 이사장은 “5기까지 진행해 보니 학생들의 사회적응력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아카데미 졸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이 진행되도록 할 계획이다. 독일 통일 관련 단체들과 협력해서 다양한 모델을 벤치마킹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지원자는 한반도미래재단 홈페이지(www.korea-future.com)에 들어가서 지원서를 다운받아 제출하면 된다. 북한 이탈주민 중 35세 미만 대학생 위주로 선발한다. 하반기에 진행될 6기생 모집은 7월 중순쯤 공고가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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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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