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 수출항인 평택항 컨테이너 부두. ⓒphoto 조선일보 DB
한국의 대표적 수출항인 평택항 컨테이너 부두. ⓒphoto 조선일보 DB

한국 경제가 심상치 않다. 종종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전분기 대비 성장률 ‘0%’대가 8분기 연속 이어지고 있다. 투자도 줄고, 최근 금리가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절대금리 수준은 사상 최저 수준이다. 2차 오일쇼크와 중화학공업 과잉투자, 국내 정치적 위기가 겹친 1980년의 -1.9% 성장 당시에도 6분기 만에 경제는 정상화되었다. -5.7% 성장했던 IMF 외환위기에도 성장률이 0%대 이하에 머문 기간은 3분기에 불과했다.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국 경제는 제조업 위주의 수출 중심 국가이다. 비교 대상 국가가 거의 없을 정도다. 한국의 위기를 한국에서만 찾으면 대안은 물론 원인 파악에도 실패하게 된다. 지금 세계는 역사상 처음으로 복합적 위기에 진입하고 있다. 경제를 넘어 사회 모든 분야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가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더 심하게 복합위기에 빠져 있다. 그 결과가 경제성장률 하락이라는 성적표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복합위기의 원인을 정리해 보자.

가장 큰 위기는 고령화를 넘어 인구 감소가 예상되고 있는 점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인구 감소 위기에 처해 있다. 일본, 영국은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 지 5년째이다. 인구 감소는 세계의 기본 질서를 바꾼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과 학문 그리고 시스템은 인구 증가, 좁게는 피라미드형 인구 구조를 전제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인구가 줄어들면 소비, 투자 등 성장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또한 세대 간의 분업을 전제로 한 연금, 보험, 건강보험도 시간의 차이일 뿐 존립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위기와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인구 감소라는 측면이다.

두 번째 위기의 본질은 성장률 하락이다. 산업혁명 이후 근 200년 동안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 덕택으로 고성장 속에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지나친 과학기술의 발전은 공급능력을 너무 빠르게 증가시켰다. 여기에 세계화 현상과 옛 공산권의 개발로 지난 10여년에 걸쳐 세계의 생산능력은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2000년 대비 철강은 96%, 화학(에틸렌 기준)은 50%나 생산량이 증가했다. 반면 고령화에 따른 소비 감소,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 여기에 부채경제 구조 진입으로 소비는 축소되고 있다. 공급과잉, 즉 디플레이션(deflation)이 상시화되고 있다.

공급과잉 상태에서 투자가 늘기는 어렵다. 투자가 줄어드니까 자연스럽게 돈이 남게 되고 이는 저금리 현상을 유발한다. 인구 구조의 고령화로 연금, 보험, 건강보험의 안정성이 훼손된 상태에서 금리마저 낮아지자 이자소득에 의존한 고령자 소비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인류는 지금까지 무엇인가 부족한 ‘결핍’ 때문에 고생했으나 이제는 ‘과잉’ 때문에 고생하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세 번째 위기는 과잉부채의 위기다. 국가 구분 없이 지금 전 세계는 역사상 가장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다. 결국 21세기 초반 세계 경제의 고성장은 부채에 의존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2008년 9월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의 도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더 이상 부채 의존형 성장이 어려워진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국가 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계, 기업, 정부 모두 부채에 신음하고 있다. 빚이 많으면 투자도 소비도 늘기 어렵다. 빚 갚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는 저성장, 저투자, 저금리와 연결된다. 이런 상태에서 부채가 역사상 최고 수준이니 소비가 줄어든다. 이 결과 세계의 생산 공장인 한국은 수출이 정체되고 성장률은 낮아지고 있다. 한국의 수출은 5년째 거의 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복합위기는 여러 분야가 동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중국 등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는 한국과 수출 품목이 유사해서 경쟁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BRICS와의 경합관계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가격 경쟁과 더불어 향후 이들 국가가 소위 ‘중진국 함정’에 빠질 경우 새로운 위기가 나타날 수 있다. 중국 등 현재의 BRICS 국가가 겪는 진통은 일시적 성장통이 아니다. 양적 성장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빈부격차뿐 아니라 사회 갈등, 정치체제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국가가 중진국 함정을 이겨낸 한국의 모델로 갈지, 아니면 20세기 초반의 아르헨티나 유형으로 진행될지 여부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에도 매우 중요하다. 올 들어 중국이 강력한 경기 안정책을 펴는 것은 축적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경제위기를 심화시키는 등 중국의 장래는 매우 험난해 보인다. 이럴 경우 중국 내수 시장에 대한 수출은 줄어들고 선진국 시장에서의 수출 경합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최근 들어 우리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수출 비중이 미국을 추월해서 15%를 넘겼다. BRICS의 침체를 만회하는 규모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도 조만간 BRICS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낮은 교육수준, 부의 집중, 선진국에 예속된 경제구조로 이들이 BRICS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으로 판단된다. 21세기 들어 BRICS와 동남아시아, 남미, 중동 국가들은 한국의 선진국에 대한 수출 감소를 상쇄해왔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중진국 함정에 빠져가면서 한국의 수출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고령화·저성장·과잉부채와 신흥 시장의 중진국 함정은 서로 연결되어 경제 구조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추가로 과잉부채는 고령화와 결합해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 빈곤 고령층이 늘어가지만 국가 부채 증가로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한 부채경제와 저성장, 공급과잉이 결합되면서 기업들은 보다 심한 경쟁에 노출된다. 공급과잉이라서 상품 가격이 내렸지만 과잉부채로 소비를 늘리기 어려운 구조다.

기존의 접근 방식으로는 해결은커녕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또한 현재 겪고 있는 복합위기를 자본주의 이론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애덤 스미스나 밀턴 프리드먼이 보았던 세계는 인구가 증가하고, 인터넷도 없었고, 국가 간 교역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기본 가정이 변화한 것이다. 국가가 수요를 부양하는 케인스 모델보다 지금은 더 강력하게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국가가 경제의 모든 부분에 개입하는 ‘국가중심자본주의’로 변화했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수록 보호무역주의와 같은 국가 간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 지난 5년간 워낙 위기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각국은 부채를 줄이는 데만 총력을 기울였다. 경제가 점점 안정화될수록 국가 간 경쟁과 갈등은 심화될 전망이다. 시장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에서 정부 지원으로 GM이 회생하는 등 거리낌 없이 각국은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보호주의의 득세는 수출 중심국인 한국에 향후 2차 타격을 줄 수 있다.

한국 내부적 위기도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 한국의 성장 동력이었던 한국만의 특수성이 이제는 한국의 성장을 저해하기 시작했다.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어떻게 복합위기를 초래했는지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 우선 한국의 내부 시스템은 여전히 중진국 수준에 머물러서 저성장을 돌파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제구조는 수출과 투자 중심으로 이루어져 외풍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다. 우선 내수 시장의 규모가 기형적으로 적은 경제구조다. 내수 소비 시장은 국민총생산의 53%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의 평균인 63%에 비해 보면 너무 적다. 최근 중국이 지나친 투자 중심의 경제구조를 소비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한국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중국의 내수 소비 비중은 36%에 불과하다.) 즉 한국은 내수 비중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을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 특히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감안할 때 내수가 더 위축된다면 일자리 창출은커녕 경제 성장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는 산업구조가 후진적이다. 지나친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부담이다. 제조업은 한국 고용의 17%에 불과하지만 전체 매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29%에 달한다. 제조업은 글로벌 경쟁에 완벽히 노출되어 있다. 서비스업은 기본적으로 내수산업이다. 서비스업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통상 경제 발전은 단순 조립에서 부품과 소재로 전환되고 이어 마케팅과 브랜딩으로 진화한다. 현재 한국의 제조업은 여전히 조립 비중이 높다. 부품은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지만 소재와 재료산업은 여전히 초보적 수준이다. 브랜딩은 중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 건설업의 경우 1990년대에는 경제의 10%에 달했지만 지금은 5%에 불과하다. 여전히 선진국 수준에 비해 보면 높은 수준이다. 즉 산업구조 개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

세 번째 한국만의 위기는 국가 재정은 충실하나 가계부채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가계가 부채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정책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빠른 부채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한국만의 고유한 투자 문화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2007년 한국노동패널 조사에 따르면 가계가 부채를 보유한 원인 중 주거비와 사업자금 비중이 거의 70%를 넘기고 있다. 이 통계가 시사하는 바는 현재의 내수 기반이 부채에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국 가계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주거, 사업뿐 아니라 생활 패턴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한국의 저성장을 단기적이고 부분적으로 해석해서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이런 현상을 빗대 최근 비관론자인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모든 이론이 통하지 않는 비정상적 상태인 애브노멀(abnormal)로 현재의 위기를 규정하고 있다.

복합위기 국면에서 한국은 우물 안에서 열심히(?) 해법을 찾고 있다. 강물이 어떤지, 외부 날씨는 어떤지 외면한 채 백가쟁명(百家爭鳴) 중이다. 아직 복합위기가 초래한 저성장에 대한 인식도 안 된 상태다. 따라서 우선은 정확한 인식의 기반하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인 사이토 세이치로(릿쿄대학 교수)는 저서 ‘일본 경제 왜 무너졌나’(1999년·들녘 출판)에서 일본의 쇠퇴를 ‘재생(playback)효과’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볼 때 복합불황에 빠진 1990년대 일본의 생활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체험했던 가난한 시대에 비해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즉 복합위기 초기 국면에서 구조적 위기를 맞게 된 이유를 ‘단지 조금 기다리면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한 인식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현재의 복합위기는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경제를 넘어 종합적이고 장기적 측면에서 대응해야 한다. 한국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항상 그렇지만 어떠한 위기에서도 살아남는 자는 존재한다. 한국은 살아남는 국가가 될 것인가?

홍성국

KDB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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