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전 세계가 공급과잉인 상황에서 투자를 늘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투자와 기업을 축소하는 것이 생존력을 높인다. 설령 투자를 늘린다 해도 제품이 지속적으로 잘 팔려야만 일자리 창출이 가능해서 투자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공급과잉이 발생시킨 제로섬(zero-sum·파이가 더 이상 커지지 않아 나의 이익은 상대방의 손해가 되는 상태) 상황에서의 생존법은 크게 봐서 두 가지다. 시장점유율을 높여 경쟁 기업을 고사시켜 독과점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과, 과거에 없던 전혀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투자가 필요하다. 즉 공급과잉과 저성장이 결합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투자는 생존의 절대적 요소라는 의미다. 다만 투자의 방식이 고성장 시기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기업의 매출액은 ‘상품가격(P)×판매수량(Q)’으로 정의된다. 높은 브랜드 가치로 가격(P)을 높이면 판매 수량이 적어도 기업의 매출은 증가할 수 있다. 주로 고가의 명품이나 내구소비재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가격을 낮추고 판매수량을 늘릴 경우에도 기업의 매출과 이익은 늘어난다. 최근 스마트폰의 경우 가격을 낮추고 판매 수량이 늘어나면서 삼성전자가 올 2분기 9조5000억원의 수익을 올린 것이 사례가 될 듯하다.

불황이 깊어지면서 소비자의 지갑이 얇아진 반면 기업 간 경쟁은 국경을 넘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개념이 ‘칩시크(Cheap Chic)’이다. 싸고 세련된 상품을 뜻한다. 여기에 높은 품질도 함께 구비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경우 가격이 크게 하락했지만 다양하고 세련된 모델과 낮은 가격, 높은 품질로 한국 스마트폰은 세계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유사한 사례는 화장품, 가전 등 소비재뿐 아니라 저가 항공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된다. 즉 기존의 산업들은 ‘칩시크’한 제품을 만드는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

최근 한국 경제의 중추 산업인 철강·화학·운송·조선·자동차·건설 산업은 중국의 거센 추격으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들 산업의 공통점은 세계적 차원에서 공급과잉이라는 점이다. 이런 경기민감산업의 매출과 이익이 동시에 줄어들고 있다. 이를 반영해서 주식 시장에서는 해당 기업 장부 가치의 80% 남짓한 수준에서 주가가 형성되고 있다.

경기민감산업은 ‘칩시크’란 관점에서 투자에 나서야 한다. 고급 자동차의 경우 일본 자동차가 독일 자동차를 추월하지 못하는 것은 엔진 등 주요 부품의 소재 기술에서 뒤떨어진 결과다. 이런 한계를 도요타는 기존 생산방식을 바꾸는 대규모 투자로 재차 세계 1위를 탈환했다. 전혀 새로운 제품에 대한 기술개발 투자가 아니라 기존 제품의 가격을 낮추면서 세련되고 품질을 높이는 기술개발 투자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중국의 IT 기업인 화웨이(華爲)는 매출액의 13%를 기술개발 투자에 쏟아붓고 있다. 자동차 부품회사인 독일의 보쉬도 매출의 7~10%를 기술개발에 투자하면서 전체 인력의 10%가 기술개발 인력이다. 보쉬는 전 세계 디젤자동차 부품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도 선두 기업들은 이런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국내 직원 중 삼성전자는 45%, LG전자 46%, 현대중공업 18%의 인력이 연구개발 인력이라는 보도도 있다. 즉 제품 개발은 한국에서 하고 인건비가 싼 중국, 동남아에서 생산한 후 세계를 대상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는 올해부터 자동차 소재 개발에 1조원을 투자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R&D 투자 열기가 일부 대기업, 특히 IT기업에만 편중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공급과잉을 돌파하기 위해 과감한 기술개발 투자로 정면돌파하기보다는 축소경영을 선호하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런 경향이 최근 한국 저성장의 기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축소경영을 지속하면 과감하게 투자한 해외 경쟁업체에 시장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도 창조경제의 폭을 정보통신기술에 제한하지 말고 모든 산업에서 ‘칩시크’한 투자를 지원해야 한다. 이럴 경우 기업의 호응이 맞물리면 재정투자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다. 구 경제, 사양산업, 공급과잉 산업으로 통칭되는 산업일수록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는 이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지속적인 혁신의 동태적 과정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물건이 반드시 나타나 ‘욕망’의 크기를 계속 키워 왔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불황을 타개하는 것은 결국 과거와 다른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서 소비를 촉진하는 것이다. 영역은 제한이 없다. 스마트폰 등 IT산업뿐 아니라 연료 절약형 화물선과 같은 조선산업, 게임, 한류 등 문화 영역에서도 신기술 기반의 상품이 출현하고 있다. 월마트는 100%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사용하기, 폐기물 제로 달성하기, 환경에 유익한 제품만 판매하기로 투자와 경영 전략을 재구축하면서 고성장과 존경받는 기업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혁신을 찾기는 쉽지 않다. 조지메이슨대학의 타일러 코웬 교수는 ‘거대한 침체(great stagnation)’란 책에서 ‘단위인구당 혁신이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줄어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혁신의 축소로 인한 경제성장률 하락을 경고했다. 코웬 교수의 이론을 반대로 해석하면 새로운 혁신이 나타날 경우 해당 기업뿐 아니라 국가 전체로도 엄청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정부는 창조경제의 기반 마련을 위해 2017년까지 과학기술 R&D에 92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한 기술개발뿐 아니라 이를 사업화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역사적인 복합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선도적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혁신을 만드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만이 할 수 있다. 정부는 혁신이 가능하도록 교육 체계를 개선하고, 사회적 관행과 예산 사용을 혁신 분야에 집중 투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의 전력난을 감안할 때 우선 정부 건물에 LED 조명 설치를 의무화하면 LED 매출이 늘면서 단가가 하락할 수 있다. 이후 가로등을 비롯한 공공시설뿐 아니라 민간 전체 분야로 확산하면 LED 조명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 LED 조명은 수명은 10배, 전력요금은 2배나 효율적이다. 최근 독일의 BMW는 i3란 전기차를 개발했다. 충전식이 아니라 배터리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전기차 혁신이 가까이에 와 있다. 이런 전기차를 정부가 선제적으로 도입해서 확산할 경우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인 배터리산업과 결합해서 차세대 자동차 산업의 선두주자가 될 수도 있다. 혁신에 대한 투자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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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국 KDB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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