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 알링턴 국립묘지의 묘역. 사병과 장성을 구분하지 않고 사망일자 순으로 배치했다. ⓒphoto 로이터
미국 워싱턴DC 알링턴 국립묘지의 묘역. 사병과 장성을 구분하지 않고 사망일자 순으로 배치했다. ⓒphoto 로이터

미국 워싱턴DC에 처음 가는 사람들이 시간이 날 때 반드시 찾는 곳이 알링턴 국립묘지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워싱턴DC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20여분 걸린다. 포토맥강 건너 버지니아주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는 445㏊의 면적에 주로 아메리카 합중국을 위해 싸운 이들과 미국을 위해 공헌한 이들이 잠들어 있다. 남북전쟁 전사자, 1·2차 세계대전 전사자, 한국전쟁 전사자가 묘지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장군, 장교, 사병의 묘지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묘지 면적은 4.49㎡다. 계급 구분 없이 사망일시 순서대로 안장된다. 사망일시가 같은 경우, 순서는 이름의 알파벳에 따른다.

6·25남침전쟁 3년간 미군은 한반도에서 무려 3만6492명이 전사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미군 부대 중 가장 용감했던 제3사단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유엔 참전국 전사자들의 유해는 미국을 제외하고 모두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미국은 자국 전사자들의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송환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제3사단 소속 전사자들 사이에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묘비가 있다.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889. 12. 3~1950. 12. 23.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하다.’ 그는 6·25전쟁의 영웅 워커 장군이다. 워커는 언덕이라는 뜻의, 오늘날 워커힐(Walkerhill) 지명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4성 장군이었지만 3사단 장교·사병들과 똑같은 크기의 묘비 아래 영면 중이다.

미국 국립묘지의 이런 전통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국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연방 국가들 역시 국립묘지의 경우 장성과 사병 구분 없이 묘지 면적이 4.95㎡이다.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의 그것과 비슷한 규모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이런 광경은 우리나라 국립현충원(서울과 대전)을 가본 사람에게 무척 낯설다.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은 알려진 것처럼 죽어서도 살아생전의 신분과 계급대로 차별한다. 국립묘지의 장군 묘역은 1인당 26.4㎡(8평) 규모. 장군 묘역은 시신을 안장하고 봉분을 조성할 수 있다. 그러나 영관급 이하 사병 묘역은 3.3㎡(1평) 크기로 화장한 유골만 안장한다.

지난 11월 28일 영면한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마지막은 스산한 이 겨울을 훈훈하게 만들고 있다. 채명신 전 사령관은 장군 역사상 최초로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혔다. 제2사병 묘역은 주로 베트남전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장군 묘역이 아닌) 베트남전 병사 곁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생전 유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1972년 사망한 장상철 육군 상병 옆에 묻혔다. 채명신 전 사령관이 사병 묘역에 묻히면서 또다시 죽어서도 차별받는 국립묘지 관행이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미 해군 종신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 미 해군 주력 항공모함 니미츠호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태평양전쟁 승리의 주인공인 그는 알링턴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국립묘지를 선택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해군들이 가장 많이 잠들어 있는 곳에서 옛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군 묘역만 그런가. 국립대전현충원을 보자. 국립대전현충원에는 국가·사회공헌자 묘역과 애국지사 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역시 장군 묘역과 같은 26.4㎡이다. 현행 국립묘지법에 따르면 국무위원이나 장관급은 현직 재직 중 사망할 경우 자동적으로 국립묘지 안장이 결정된다. 그러나 전직 장관이 사망했을 경우 국립묘지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안장’을 국무회의에서 심의해 의결한다.

장군 묘역이 처음으로 조성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4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1966년 제2장군 묘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1년 제3장군 묘역이 생겼다.

200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40주기를 맞아 딸 캐롤라인이 헌화하고 있다. ⓒphoto 연합
200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40주기를 맞아 딸 캐롤라인이 헌화하고 있다. ⓒphoto 연합

국립묘지의 장군 묘역은 그동안 여러 차례 여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2004년 국방부는 “국립묘지 장군 묘역은 화장 후 유골 안치를 추진하고 봉분 조성은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2005년 7월에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장군 묘역의 화장 안치 및 1기 면적의 3.3㎡ 제한을 명문화했다. 하지만 부칙에 ‘장군 묘역이 소진될 때까지는 시신 매장 및 26.4㎡ 허용’이라는 단서 조항을 넣었다. 서울현충원은 1996년 장군 묘역이 소진되었지만 대전현충원은 아직 여유가 있다. 서울현충원 측 관계자는 “이미 조성된 장군 묘역이 채워지면 더이상 차별논란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군 묘역의 시신 안장과 봉분은 제5공화국의 잔재다. 1965년 국립묘지령이 제정될 당시만 해도 국가원수를 제외한 모든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는 화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1983년 장군들도 사후에 묻힐 수 있도록 규정을 신설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장군 묘역에 화장 후 안장이 아닌 시신 매장으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기자는 몇 해 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처음으로 국가원수 묘역에 가 본 일이 있다. 그 뒤로 국립서울현충원의 국가원수 묘역을 둘러보았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는 최규하 10대 대통령 부부 묘가 있다. 최규하 대통령 묘역 앞에는 경비 초소가 하나 있다. 그때 첫 느낌은 묘역이 너무 커서 거부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전직 국가원수 묘역 크기는 국립묘지령 제6조에 의해 264㎡(80평)로 국립묘지법에 정해져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 박정희 대통령 내외, 고 김대중 대통령이 안장되어 있다. 원래 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자리가 없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야 했지만 유족 측이 국립서울현충원을 고집해 이곳에 안장됐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묘역도 크기는 똑같이 264㎡.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묘역을 가본 사람들은 외국 국가원수의 묘역도 당연히 이처럼 거대한 크기일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로 돌아가 본다.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한국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곳은 케네디 전 대통령 묘지다. 봉분도 묘비도 없다. 화장을 해 유골을 넣은 뒤 그 위에 동판을 덮었을 뿐이다. 뒤쪽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24시간 불꽃을 팔랑거린다. 최근 주일 미국대사로 임명된 케네디 대통령의 유일한 혈육 캐롤라인 케네디가 일본으로 부임하기 전 이곳을 찾아 부모님 묘소에 헌화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맹일환 보험연수원 연수부장은 지난해 9월 보험사 직원 10여명을 인솔하고 워싱턴·뉴욕 연수를 다녀왔다. 맹일환 부장은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갔었는데, 그때 케네디 대통령 묘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맹 부장은 “나는 대통령 묘역이기에 웅장하고 위압적인 규모와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케네디 묘역은 느낌이 달랐다”면서 이렇게 당시의 느낌을 전했다.

“묘지는 네모난 바닥에 커다란 타일과 같은 돌들이 바둑판처럼 깔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 검은 묘지석 세 개가 역시 바둑판처럼 누워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평안하고 친근감이 있어 그런지 관광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주변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묘지에 가면 누구나 이런 느낌을 받는다. 케네디 대통령 묘지 앞에 서면 경건한 마음은 들지만 전혀 위압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병사 묘역에 있는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묘.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객원기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병사 묘역에 있는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묘.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객원기자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국립현충원의 국가원수 묘역 앞에 서면 일단 봉분의 크기에 압도당한다. 건축면적 264㎡짜리 집 한 채가 서 있다고 생각해 보라. 봉분의 크기가 일반인에게 거리감으로 작용한다. 전직 대통령이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프랑스는 유가족의 희망에 따라 계약에 의해 매장 면적을 결정한다. 물론 생전의 신분에 따른 특수 묘역 같은 곳은 없다. 프랑스 파리의 명소 중 하나는 ‘페르 라셰즈’ 묘지공원이다. 이곳에는 프랑스인이 사랑하는 발자크, 프루스트, 쇼팽, 마리아 칼라스 등의 묘지가 있다. 이들 묘지는 이름 없는 평범한 이들과 크기가 똑같다.

파리의 팡테옹 국립묘지는 프랑스를 빛낸 위인들의 묘지다. 볼테르, 장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앙드레 말로, 알렉상드르 뒤마 등이 팡테옹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 1970년 11월, 드골 전 대통령이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프랑스인이 존경하는 드골은 팡테옹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고향 땅 콜롱베에 묻혔다. 드골은 1952년 작성한 유언장을 통해 “고향마을에서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른 뒤 (스무 살에 폐결핵으로 죽은) 딸 안의 묘지 옆에 묻어달라”고 말했다. 팡테옹에는 당연히 묘지의 크기가 차이 나지 않는다. 한 세기에 많아야 3~4명이 팡테옹에 안장된다. 가장 최근에 팡테옹에 안장된 인물은 알렉상드르 뒤마였다. 팡테옹에 안장된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영광이라는 인식이 프랑스인에게 깔려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은 왕실 전용 묘역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될 수도 있었지만 본인 스스로 고향에 묻히길 희망했다. 옥스퍼드 지방의 생가 블렌엄궁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블래든 마을의 성 마틴스 교회묘지가 그의 마지막 안식처다. 교회 정문에서 왼편에 처칠 집안의 가족묘가 있는데, 그는 생전에 금실이 좋았던 부인과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베트남에는 전 지역에 일반인 묘지와 그 옆에 국가유공자 묘지를 두고 있다. 국가유공자 묘지에는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기여한 이들이 묻힌다. 국가유공자 묘지에 묻히는 자체가 최고의 영예로 간주된다. 당연히 묘지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립묘지의 계급·신분 차별은 뿌리 깊은 관존민비 사상에서 기인한다. 민간에서도 조상묘를 크고 화려하게 할수록 후손들이 대접받는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현재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야권에서는 벌써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가 고향 팔공산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는 것은 정녕 희망사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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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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