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회본 국성야 충의전’의 권두에 수록된 복건성과 대만 지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04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회본 국성야 충의전’의 권두에 수록된 복건성과 대만 지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12년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수립되었다. 중화민국의 핵심 정치세력인 중국 국민당은 제국주의 일본과 마오쩌둥(毛澤東) 등의 중국 공산당에 맞서다가 1949년에 대만섬으로 후퇴, 이 섬을 ‘본토 회복’을 위한 불침항모(不沈航母)로 삼고자 현지인을 탄압하고 세계 최장 기간의 계엄령을 유지하였다. 이와 마찬가지 사건이 300년 전인 1661년에도 있었다.

지난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644년에 청나라의 제3대 황제 순치제를 보위하는 섭정 도르곤이 만·몽·한·조선 연합군을 이끌고 산해관을 통과, 이자성의 농민 봉기군을 진압하고 북경을 정복함으로써 명나라는 일단 멸망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공격에 맞서 명나라 남부에는 ‘남명정권(南明政權)’이라 총칭되는 여러 개의 망명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적국이었던 일본, 가톨릭 포교를 앞세워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만들던 유럽 열강, 심지어는 동중국해에서 활동하던 정지룡(鄭芝龍·Nicholas Iquan Gaspard) 등의 해적 세력에까지도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수세에 몰리다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당시 동중국해에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남명정권은 그들의 군사력과 정보력에 주목하였다. 남명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홍광제(弘光帝)는 정지룡 등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남경(南京)에 정부를 세웠으나 1년 만에 멸망하였고, 정지룡 세력이 다시 추대한 융무제(隆武帝)도 1646년에 청나라군에 생포되었다. 정지룡과 그의 일본인 아내 다가와 마쓰는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아들 정성공의 뜻에 반하여 청나라 측에 투항하였으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배신당하여 살해되었다. 조국과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생을 바칠 각오를 한 정성공은 남명 최후의 황제가 될 영력제(永曆帝)를 모시고 청에 대한 항전을 이어갔다. 1659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남경을 기습 공격하였으나 실패하면서 명나라 부흥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정성공은 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아버지 정지룡 때부터 배후기지로서 ‘개척’하던 대만섬으로 거점을 옮겨 부흥 전쟁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당시까지 대만섬에 독립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항복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대만섬에 보냈으나 통일 정권이 없어서 그 서한이 수신자 불명으로 일본에 되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 섬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거주한 사람들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다수의 선주민들이었다. 또한 이른바 ‘대항해 시기’에 활약한 유럽 열강들이 자신들의 동남아시아 거점과 중국·일본 등 새로운 시장 간의 교역에서 중간 기착지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놓인 대만섬에 관심을 갖고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다. 대만섬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명나라가 이 섬에 대한 지배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요인도 유럽 열강의 활동을 자극하였다.

16세기 중엽에 대만섬을 지나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포르모사(Ilha Formosa·아름다운 섬)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명칭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권에서 널리 쓰인다. 또한 오늘날의 타이난(臺南)시를 중심으로 한 섬의 남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VOC) 세력이 제엘란디아(Zeelandia)·프로빈시아(Provintia) 요새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단수이(淡水)시를 중심으로 한 섬의 북부는 스페인 세력이 산살바도르(San Salvador)·산토도밍고(Santo Domingo) 요새를 중심으로 17세기 전기부터 식민지 경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당시는 바타비아)와 필리핀 마닐라에 거점을 둔 프로테스탄트의 네덜란드와 가톨릭의 스페인이 대만섬에서도 충돌한 셈이다.

또한 역시 가톨릭의 포르투갈·스페인 세력과 프로테스탄트의 네덜란드가 교역을 두고 경쟁하던 일본열도의 주민들 역시 대만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의 무역선은 그 이전부터 대만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대만섬 남부를 지배하던 네덜란드 측이 제엘란디아 요새에 기착하는 선박에 10%의 관세를 매기려 한 것이다. 이에 일본 규슈 나가사키(長崎)의 하마다 야효에(浜田 兵衛)라는 선장이 1628년에 이 요새를 습격, 제3대 네덜란드령 대만 행정장관 피테르 나위츠(Pieter Nuyts)를 일본으로 납치하여 5년간 억류하였다. 일본과의 안정된 교역을 노리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비록 10%의 관세를 취하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 선교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일본 측에 우호적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이후 200여년의 양국 간 교역 관계가 확립된다. 이후 1639년에 쇄국령을 완성시킨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대만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일단 잦아든다.

그리하여 대만섬의 남과 북을 프로테스탄트의 네덜란드와 가톨릭의 스페인이 식민 지배하던 17세기 중기, ‘중국’ 본토와 인접한 하문(厦門·아모이·샤먼), 금문(金門·진먼)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던 정성공 세력이 대만섬에서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한다. 그는 아들 정경(鄭經)에게 하문·금문을 맡기고 대만섬 안의 여러 세력을 진압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명나라의 신하인 ‘번주(藩主)’로서 임하였다. 그는 남명정권 최후의 황제인 영력제가 미얀마로 도주하였다가 1659년에 체포되어 처형된 뒤에도 ‘영력(永曆)’ 연호를 사용하였다. 더욱이 그는 대만을 정복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 사망하였으니,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마찬가지로 정성공에게도 대만은 ‘중국 본토’를 치기 위한 진지전(陣地戰)의 거점으로서만 인식되었을 터이다.

정성공이 사망하자 하문에 주둔하던 그의 맏아들 정경이 급거 귀국하여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였고 그후에 하문으로 돌아갔다가 청나라와 네덜란드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중국 본토’에서 철수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1637년에 일본 규슈에서 발생한 가톨릭 민중의 반란인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에서도 막부군을 도와 기독교 반란군을 도운 바 있다.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중국·일본의 신흥 세력을 편들어 경제적 실리를 확보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경은 아버지 정성공과 마찬가지로 명나라 부흥에 전념하였다. 때마침 1673~1676년 사이에 청나라 남부에서는 ‘삼번의 난(三藩之亂)’이라는 대규모 반청 전쟁이 전개되었다. 청나라 군대에 산해관을 열어준 오삼계 등의 한족 장군들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 협력한 공적을 인정받아 청나라 남부에서 준독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족 장군들의 준독립국은 만주족 지배층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청나라의 제4대 황제로 즉위한 아이신 기오로 할라 이 히오완 여이(Aisin Gioro hala i Hiowan Yei·愛新覺羅玄燁) 강희제(康熙帝)였다. 강희제의 압박이 거세지자 오삼계는 1673년 11월에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한족 장군 및 대만섬의 정경도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이들 세력은 한때 양쯔강 이남 지역에서 상당한 판도를 확보하였으나 결국 1676년 이후 오삼계를 제외한 다른 세력은 모두 청에 항복하였고 오삼계는 1678년에 사망하였다. 오삼계의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吳世)과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각각 운남성과 대만섬에서 1681년에 사망하면서 삼번의 난이 끝났다. 정성공의 손자이자 정경의 아들인 정극상(鄭克)이 대만 정씨 정권의 제3대 지배자가 되었으나 불과 2년 뒤에 바다를 건너온 청나라군에 항복함으로써 대만섬 최초의 국가는 20여년 만에 멸망하였다.

1721년에 대만에서 발생한 주일귀의 반란을 소재로 1723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소설 ‘통속대만군담’. 야후재팬옥션
1721년에 대만에서 발생한 주일귀의 반란을 소재로 1723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소설 ‘통속대만군담’. 야후재팬옥션

참고로 삼번의 난을 진압한 만주족 장군 증수(曾壽)의 종군일기 ‘내가 전쟁터에서 행한 바를 기록한 글(beye i cooha bade yabuha babe ejehe bithe)’ 가운데 1680~1682년 분량이 현존한다. 명·청 교체기의 마지막 국면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 자료는 ‘만주 팔기 증수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번역이 간행되었다.(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 총서2·박문사) 한편 중국인 정지룡과 일본인 다가와 마쓰의 아들로 태어난 정성공이 정권을 잡은 대만섬에 대해 근세 일본의 관민은 역대로 큰 관심을 보였다. 지난회 연재에서 소개한 연극 ‘고쿠센야갓센(國性爺合戰)’의 히트는 그러한 관심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1723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소설 ‘통속대만군담(通俗臺灣軍談)’ 역시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 소설은 1721년에 청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여 대만섬에서 발생한 주일귀(朱一貴)의 반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건 발생 몇 년 내로 삽화가 포함된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대만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소재로 한 책이 독서 대중에게 인기를 끌 것이라는 판단을 출판인이 내렸기 때문일 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기의 배후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대만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존재하였다.

이렇게 정씨 정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성공·정경·정극상 세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명나라의 신하이자 중국인으로서 인식하였으며 대만섬에 독립국가를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만섬의 중화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성공이라는 인물을, 명나라 때까지 한족의 관심 밖에 있던 대만섬을 최초로 ‘중국’의 판도에 편입시킨 ‘위인’으로서 기린다. 한편 명분은 어떻든 정성공은 그전까지 유럽 세력의 식민 지배를 받던 대만섬을 ‘해방’시키고 대륙과는 독자적인 정권을 처음으로 수립한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만섬에 최초의 국가를 만든 ‘개산왕(開山王)’으로서 인식되고 있으며, 대륙 중국과는 별개로 대만 섬의 정치적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성공은 기념할 만한 인물로 기억된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대만섬을 떼어내어 식민지로 삼은 제국주의 일본도, 정성공을 기리기 위해 타이난에 세워진 ‘개산묘(開山廟)’를 ‘개산신사(開山神社)’로 바꾸어 그를 신격화한 것이다.(이토 기요시·‘대만-사백 년의 역사와 전망’·주오코론샤) 대만 국립 성공대학(成功大學)이나 대만 해군의 성공급(成功級) 호위함은 오늘날의 대만섬에서 정성공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한편 여기까지 살펴본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대만의 성공급 호위함에 대응하는 것이 중국의 항공모함 스랑(施琅·시랑)이다. 랴오닝함이라고도 불리는 스랑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항공모함 바랴그(Варяг)를 개조한 것이다.

스랑은 1683년에 대만의 정씨 정권을 무너뜨린 청나라 군대를 이끈 장군이었다. 원래 정지룡의 부하였던 그는 정성공과의 의견 충돌 끝에 청나라에 투항하였고 결국 정씨 정권을 무너뜨렸다. 명나라의 방침을 이어 대만섬을 포기하려 했던 청나라 조정의 중론에 맞서 스랑은 이 섬을 지배하는 것이 군사·경제적으로 청나라의 이익이 될 것임을 주장하여 강희제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만섬의 중화민국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스랑은 선각자로 간주되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이 붙은 데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한편 이 항공모함이 중국에 인계되기 전에 갖고 있던 바랴그라는 이름은 ‘원초 연대기(Повесть временных лет)’ 등의 슬라브 고대 기록에서 이 지역에 국가를 건설하였다고 하는 북유럽 바이킹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등에서 맏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바람에 아버지로부터 땅을 상속받지 못한 사람들은 바다 건너 자신의 행운을 찾아 나아갔다. 서쪽으로 향한 자들은 노르망디, 시칠리아, 영국,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등에 국가를 건설한 것은 물론 그린란드와 오늘날의 캐나다 동부에까지 정착했다. 한편 루릭(Rurik) 일족이 이끄는 일군의 바이킹은 고대 북유럽어로 베링야르(Væringjar), 그리스어로 바랑고이(Βά ραγγοι)라 불렸는데, 이들은 동쪽으로 향하여 오늘날의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와 키예프(우크라이나어 Киϊ в, 러시아어 Киев) 등을 아우르는 키예프 루스 국가(Роý сь)를 건설하였다.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등의 국가는 모두 바랴그인들이 건국한 키예프 루스를 자국의 중요한 근원이라고 믿는다.

또한 항공모함 바랴그는 한반도와도 관련이 깊다. 러일전쟁 개전 초기에 랴오둥반도의 뤼순항(旅順·Port Arthur)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러시아 함대 가운데 간신히 탈출한 바랴그호 및 카레예츠(Кореец·고려인)호 등 일부 선박은 1905년 2월 9일에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러시아 수병들은 자국의 배가 적국 일본의 전리품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폭하였으나, 바랴그호의 깃발은 일본 측이 입수하여 보존하다가 조선의 광복 후에 인천시립박물관에 인계되었다. 이 깃발의 존재를 알게 된 러시아는 반환을 요청하였고, 인천시는 러시아와의 우의의 상징으로 이 깃발을 장기임대해 준 상태이다. 1871년에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미국군이 충돌한 신미양요 당시 사망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가 미군 해병대에 약탈되었다가 2007년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반환되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과거에 일어난 국제 전쟁의 상처는 이런 방식으로 조금씩 치유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1683년에 청나라가 대만섬을 정복함으로써 1500년대 일본열도의 전국시대에서 시작되어 임진왜란,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과 홍타이지의 대청국 건국, 정묘·병자호란, 청나라군의 산해관 돌파와 북경 함락으로 이어진 약 200년간의 연쇄반응이 비로소 끝났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이와 같은 장기 지각변동은 한반도 세력이 일본 열도의 호전적 군사 세력을 막아내지 못한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대만이 독립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반도와 대만섬은 유라시아 동해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중심점(pivot)이자 ‘약한 고리’이다. 2014년 현재도 대만섬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긴박하다. 중화민국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일본·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열도에서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 대만섬 인근의 긴장관계가 한반도 주변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있음을 이 연재의 첫 회에서 적은 바 있다. 이처럼 한반도와 대만섬 두 지역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두 개의 중심점으로서 각기 기능할 뿐 아니라 상호 연동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와 대만섬이라는 두 개의 중심점이 16~18세기의 정치적 연쇄반응 속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관련을 맺은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사례를 소개한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대만섬의 정씨 정권과 대립하던 시기, 한반도의 해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가 종종 출몰하였다. 이를 ‘황당선(荒唐船)’이라 부른다. 조선 사람들은 이 배를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협조하는 조선을 증오한 대만섬의 정경이 보낸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과 같은 지리 감각이 없던 조선 사람들에게 대만섬은 한반도의 호서 지방과 가까이 있는 섬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가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남쪽바다 저 너머에 있는 섬에 사는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장차 조선왕조를 뒤엎으러 올 것이라는 혁명의 신앙으로 바뀌었다.(이재경·‘삼번의 난 전후(1674~1684) 조선의 정보수집과 정세인식’·서울대 국사학과 석사논문) 현재 유통되는 ‘정감록’은 근대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김용주(金用柱) 등이 그 형태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백승종·‘정감록 미스터리’·푸른역사) 그러나 그 원형은 뜻밖에도 대만섬의 첫 독립 정권과 이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공포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는 참으로 우연하고도 연면히 이어진다.

다음회에는 16~18세기 유라시아 동해안의 정치적 연쇄반응 끝에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변화를 살펴본다. 이번회의 자료사진을 입수하는 데 도움을 주신 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 양욱 선생님과 서울대학교 고고미술학과 이경화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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