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객원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객원기자

지난 5월 11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면서 ‘포스트 이건희’에 대한 관심이 크다. 글로벌 일등 기업 삼성전자의 ‘오너 리스크’는 세계 IT업계에도 엄청난 회오리를 가져올 수 있어 외신도 이건희 회장의 병세에 주목한다.

삼성 측에선 이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마련, 경영구도에 특별한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입원했음에도 주가의 급락 없이 평온한 것은 시장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은 ‘회장 유고’를 대비한 일들을 착착 준비해 왔다. 2016년까지 계열사 순환출자를 전부 해소하고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74개 계열사를 재편한다는 목표를 지난해 발표한 적이 있다. 현재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지분 19.3%를 보유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지분 7.2% 보유)와 삼성물산(지분 4.7% 보유)을 거느리는 순환출자 구조를 큰 골격으로 유지되고 있다.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삼성에버랜드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1%의 지분을, 이건희 회장의 장녀와 차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이 8.37%의 지분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지분이 절대적으로 많다.

이 회장이 쓰러지기 이틀 전인 5월 8일 삼성SDS를 연내에 상장하겠다는 계획도 천명했다. 삼성 안팎에서는 삼성SDS 상장을 통해 삼성가 3세들이 이건희 회장 개인 소유의 지분을 물려받을 자금을 마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버랜드 지분 3.72%를 비롯해 삼성생명 20.76%, 삼성전자 3.38%, 삼성물산 1.37%, 삼성종합화학 0.96%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5월 13일 종가 기준 이 회장이 보유한 상장사 지분 가치만 11조1796억원으로 집계됐다. 상속이나 증여 형태로 이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5조원대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이를 위한 ‘실탄’을 마련해야 한다는 관측이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 이후를 대비하는 듯한 스케줄을 하나씩 공표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포스트 이건희’에 대한 깊숙한 내부 논의가 이뤄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1남2녀의 후계 준비를 마쳤다는 방증이다.

삼성은 1987년 11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타계할 때도 형제간 분란이나 혹시나 있을 재산 싸움에 대비, 이중 삼중의 포석을 깔아뒀다. ‘관리의 삼성’이란 당시 명성에 걸맞게 이병철 회장 생전에 준비를 다 끝내두었다. 당시 후계 작업의 원칙 중 하나는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씨와의 사이에 난 자녀들에겐 회사 경영을 맡기고 후처 소생들에게는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딸 중에 이인희(한솔그룹 고문), 이명희(신세계그룹 회장) 두 자매에게만 계열사를 분할해 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공식적으로 3남5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계도 참조> 5녀 중 3녀 이순희, 4녀 이덕희씨는 혼외자녀다. 차녀 이숙희씨는 박두을씨 소생이지만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아들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하면서 계열사를 물려받지 못했다.

이들 3남5녀 외에 이병철 회장은 일본인 여성과 1남1녀를 뒀다. 필자는 2005년 저서 ‘재벌가맥’을 취재하면서 이병철 회장 호적에 올라있던 일본인 여성과의 자식인 이태희·이태자씨가 어느 순간 호적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글을 통해 처음 밝힌다. 이건희 회장 동생으로 호적에 올라있던 이태희씨는 선친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제일제당 상무를 지내는 등 로열패밀리로 잘나갔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 타계 후 일본으로 돌아가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일정 부분의 재산을 주고, 한국 호적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찌감치 3남인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지목한 이병철 회장은 후계 구도의 장애물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후계 작업을 실행에 옮겼다. 1980년대 초 이병철 회장이 위암 수술을 받고 나서 후계자 수업이 빨라진다. 이병철 회장 타계 12일 만인 1987년 12월 1일 전격적으로 이건희 회장을 삼성 2대 회장에 임명할 수 있었던 것도 사전 정지작업을 잘했기 때문이다.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장자와 차남을 배제한 3남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1986)에서 집안에 엄격한 유교 가풍이 내려오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관례를 깨고 3남을 회장으로 앉힌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 시기는 1987년 대통령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정국이 소용돌이 칠 때였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당시 내로라하는 정계 거물들이 ‘6·10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 출마하고 있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투표일 전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는 박빙을 점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 장남인 이맹희 회장(당시 제일비료 회장)과의 관계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맹희 회장은 경북고등학교 동기(32회) 동창으로 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1995년 필자가 이맹희 회장을 인터뷰했을 때 비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필자는 1994년과 1995년 총 3차례 이맹희 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고 특히 1995년 2월 대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때는 이 회장 동의하에 4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기도 했다.) 이맹희 회장은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당시 실세였던 육사 11기 정호용, 김복동씨와도 학생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밝혔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탄생한 후 이들이 자신에게 찾아와 “삼성을 되찾아 줄 수 있다”고까지 했다고 말했다. 후계 구도에서 멀어진 친구를 위해 뭔가를 도모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터뷰 내용도 이 글에서 처음 밝힌다.

이맹희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인집 아들과 직원 아들(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이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정미소 공장장이었다)이라는 특이한 신분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을 어려워했다고 말했다.(전 대통령은 이맹희 회장과 나이는 같았지만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는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한동안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의 학교 통학일을 맡아왔다는 얘기도 당시 인터뷰에서 했다.

이맹희 회장은 “친구들이 정권 실세가 된 뒤 삼성 회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이를 눈치채고 철저하게 감시했고 자신을 경원시했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혹시나 해서 1986년에 신현확(2007년 작고) 전 총리를 삼성물산 회장으로 앉혀 후계자로 지목한 이건희 회장의 방패막이로 삼았다는 것이 이맹희 회장의 회고다. 이때는 이병철 회장의 건강이 매우 악화됐다. 부총리와 총리를 지낸 신 회장은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TK(대구·경북)의 대부다.

이맹희 회장은 “어느날 정호용군과 노태우군이 신 회장을 만나고 오더니 아무래도 삼성 회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면서 “그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얘기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필자에게 들려줬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1987년 1월인가 신현확 회장을 만나고 나서 친구들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은 상황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될 것 같으니 삼성 측이 서둘러 이건희 회장을 회장으로 앉혔다는 것이 이맹희 회장의 전언이다.

1987년 당시만 해도 삼성그룹은 연간 매출액이 13조5000억원에 불과했고 그룹 구조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또한 차명으로 주식을 보유할 수 있었고 상장기업도 몇 개 안 돼 오너가 마음만 먹으면 후계자를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병철 회장은 왜 장남과 차남을 버리고 3남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이에 대한 얘기는 1960년대 후반에 터진 ‘사카린 밀수 사건’ 수습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과의 갈등 때문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이병철 회장도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는 주위의 권고와 본인 희망대로 그룹 경영을 일부 맡겨 봤지만 6개월도 못 가 맡겼던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경영 능력을 폄하했고 ‘(차남)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해 그대로 해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맹희 회장은 필자에게 이 부분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한국비료 밀수 사건’(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1960년대 말 정권을 흔들 정도의 스캔들로 비화. 당시 사카린은 단맛을 내는 데 사용되는 식료품 원료로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한국비료는 이병철 회장이 짓던 비료 공장으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국가에 헌납했다)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고 강변했다. 이맹희 회장에 따르면, 당시 밀수품으로 알려진 사카린은 한국비료가 일본 미쓰이공업으로부터 받기로 한 100만달러의 대용이었다. 일본 미쓰이공업이 공장 설비를 사주는 대가로 한국비료에 100만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론 도저히 돈을 가져올 수 없어 대신 사카린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때 정권 실세들과 의견조율을 하고 사카린을 들여왔는데 언론에서 대서특필되고 야당에서 문제 삼자 삼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맹희 회장의 말이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맹희·창희 두 형제가 선두에 서서 삼성을 이끌었다.

이후 이맹희 회장이 아버지의 미움을 사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아들들에게 기업을 맡기고 경영을 하는 것을 지켜본 이병철 회장이 아들들에게 맡겨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다시 회장으로 복귀하려는 즈음 투서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청와대에 전달된 투서의 내용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병철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서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즉 이병철 회장의 경영복귀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발끈했다. 이 투서 사건을 이맹희 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맹희·창희 두 형제를 경영에서 완전 배제하고 이맹희 회장은 삼성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이맹희 회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서는 이창희 회장이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이병철 회장은 아들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도 ‘고생스러운 기업 경영의 일을 자손들까지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3남 이건희에 대해서도 ‘(건희가) 일본의 와세다대학 1학년 때 중앙매스컴을 맡아 인간의 보람을 찾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 길이 가장 좋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매스컴 경영은 기복이 심해 재정적 지원이 가능한 몇 개의 회사를 붙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희에게는 고생스러운 기업경영을 맡기는 것보다 매스컴을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당시 중앙매스컴은 이건희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 전 장관이 회장으로 있었다.) 이를 액면으로 받아들이면 장·차남에 대해서는 경영 능력에 대한 회의 때문에, 3남은 성품 등으로 가업을 맡기는 것을 유보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은 3남을 후계자로 낙점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장남을 버렸다. 반면 차남이 새한미디어를 창업할 때는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맹희 회장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창희는 그후 아버지한테 사과도 하면서 굽히고 들어갔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병철 회장은 심지어 임종을 할 때도 장남은 부르지 않았다. 대신 이맹희의 아들이자 자신의 장손인 이재현 현 CJ 회장을 불렀다.

이재현 회장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맹희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재현 회장이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3년 씨티은행에 입사했을 때도 자신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노여움이 극에 달했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장손을 삼성에 입사시키지 않고 씨티은행에 취직시켰기 때문이라고 주변에서 귀띔해 결국 1년 뒤 아들의 직장을 제일제당으로 옮겼더니 아버지의 노여움이 가라앉았다고 했다.

이맹희 회장에 따르면, 아들 이재현 회장이 제일제당을 거쳐 1992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대우로 승진하자 자신을 보는 삼성의 분위기도 달라졌다고 한다. 아들이 임원으로 승진하자 승진에서 밀린 삼성그룹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에게 줄을 대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서둘러 제일제당을 삼성에서 분리한 것도 그런 저변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맹희 회장은 주장했다. 이맹희 회장은 당시 분리 자체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맹희 회장은 장손인 이재현 회장이 삼성의 적통을 잇는 것이 선대 회장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듯했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가족 외에는 다 바꾸라’는 유명한 신경영을 주도하며 오늘의 삼성기업군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기준으로 500조원이 넘는 자산규모에다 연간 400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한 거대한 삼성호가 탄생하는 데 이건희 회장의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포스트 이건희’로 자리매김한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의 그늘을 벗고 탄탄한 삼성호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버지 때에 비해 이재용 부회장의 후계 승계는 순탄할 것으로 보이지만 삼성호를 둘러싼 경영환경은 아버지 때보다 더 큰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홍성추

서울신문 기자. 산업부장. 서울신문 STV 대표이사 역임. 저서 ‘재벌가맥’(무한출판사·2005), 논문 ‘재벌가 분쟁이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성균관대 문학석사 학위 논문·1998)

홍성추 전 서울신문 산업부장·‘재벌가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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