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왼쪽). ⓒphoto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왼쪽). ⓒphoto 뉴시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지난 5월 26일 서울에 도착한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번 방문은 ‘친척집에 가서(走親戚), 우의를 나누고(叙友誼), 합작을 말하고(話合作), 미래를 논하는(談未來) 여행’이다. 쌍방은 마땅히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戰略合作同伴關係)를 심화해야 한다.”

왕 부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중국은 앞으로 한국을 더욱 중요한 협력동반자로 선택하길 원한다”며 “신흥 전략산업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중 FTA 협상도 가속화하자”고 말했다.

왕 부장의 발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전에는 거의 사용한 적 없는 ‘친척’이란 표현으로 한·중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양국 관계를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끌어올리자는 제안이다.

7월 3일로 예정된 시진핑 방한 때 양국의 합의사항은 왕 부장의 이 발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발언은, 중국이 한국을 ‘친척’으로 여길 만큼 가깝게 생각하며 양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강고한 협력동반자관계를 맺어 한반도 평화와 아시아 부흥을 이끌어나가자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북핵문제 등에서 중국과의 협력이 절실한 한국으로선 중국의 태도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중국이 ‘친척’을 거론하며 ‘한 단계 높은 양국 관계’를 언급하는 배경과 의도를 정확히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미·중(美中) 사이에서 한국이 설 자리를 정확히 잡고 급변하는 동북아에서 능동적인 외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시진핑 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에 먼저 오고 또 다른 나라를 방문하지 않고 한국만 ‘단독 방문’하는 것에 대해 중국 정부 인사들이 한국에 큰 특혜를 베푼 듯이 얘기하는 것에 우쭐하거나 흥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한국이 대단해서라기보다 중국의 필요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이 북한보다 한국을 더 중시하는(重韓輕朝) 외교노선을 보인다는 일부 중화권 언론의 과도한 분석도 경계해야 한다. 중국의 외교전략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반도 외교는 대미 외교와 동북아 전략의 큰 틀 속에서 행해진다. 중국이 한국을 향해 하는 말과 행동은 단순히 한국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미-대일 외교 전략의 틀 속에서 자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밀하게 계산되고 조율된다는 얘기다. 시진핑 정부는 출범 후 일관되게 미국을 향해 ‘신형대국관계’를 요구해 왔다. 미국이 중국의 핵심이익을 인정한다면 중국도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오바마 정부는 지난 2년간 중국의 요구를 묵살해 왔다. 미국은 조어도(센카쿠열도) 문제에서 일본 편을 들었고, 남중국해 분쟁에서도 필리핀과 베트남에 힘을 실어주었다. 게다가 미국은 금융위기와 재정적자로 안보에 구멍이 생기자 일본의 우경화를 방관 내지 조장하고 있다. 미국은 2013년부터 10년 동안 국방 예산을 4500억달러 삭감해야 한다.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서 미국은 일본의 국방자원을 동원해 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일본 아베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재정위기 상황을 적극 활용해 우경화와 재무장의 길로 가고 있다. 일본은 또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국내외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아베의 대북한 접근을 미리 알고도 모른 체했다고 한다. 그동안 북핵위협을 가장 강조하던 두 나라가 북핵은 묵인한 채 북·일 수교로 방향을 튼 것은 ‘중국 견제’라는 공동의 목표에 합의한 때문으로 봐야 한다. 북·일 수교 과정에서 일본의 거대한 자금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갈 경우 김정은의 북핵개발 노선은 더욱 강화된다. 미국은 또한 한·일-중·일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눈을 감거나 전략적 모호성을 취해 사실상 일본 편을 들고 있다. 아베 정부의 독도에 대한 억지주장과 고노담화 수정 움직임에 대해서도 미국은 형식적인 발언만 할 뿐, 한·일 사이에서 심판관으로 나설 의향이 없다. 이는 미·일동맹으로써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겠다는 일관된 목표에 따른 것이다. 시진핑의 방한은 이 같은 미·일의 중국 포위 전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미국은 일본의 주변국 도발에 눈감으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중국이란 블랙홀에 빨려들지 말 것을 공공연히 ‘경고’하고 있다. 조 바이든(Joe Biden) 미국 부통령은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할 때 “미국에 반대하는 베팅은 좋은 베팅이 아니었다(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라며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선택하지 말라는 ‘엄포’나 다름없다. 한국은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미국과 중국의 줄다리기 대상이 됐다.

최근 심상찮은 중국·북한 관계도 중국의 한국 접근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2월 시진핑 정부 출범을 앞두고 3차 핵실험으로 중국 지도부를 화나게 했다. 또 그후 여러 차례 동해안과 서해안을 향해 중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동북아의 평화 안정 기조를 흔들었다. 김정은은 지난해 6월 1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생일에 축전을 보냈으나 올해는 보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 후 지금까지 김정은을 중국에 초청하지 않은 것도 ‘김정은 길들이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대미 전략적 자산인 북한을 포기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북한이 확실한 핵 보유국이 되면 한반도 북부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된다. 북한이 더 이상 중국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자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해온 중국에 북한의 핵무장은 중대한 전략적 변화를 뜻한다. 게다가 김정은은 지난 5월 말 일본과 ‘스톡홀름 합의’를 통해 관계정상화로 한 발짝 다가섰다. 양국이 ‘실종자 수색’과 ‘경제 지원’을 주고받으며 수교까지 간다면 이는 동아시아 외교지형에 큰 지각변동을 불러온다. 가령 북한에 대한 일본의 투자와 기업 진출이 늘어나면 북한의 중국 의존도는 크게 줄어들고 일본과의 관계가 강화된다. 북한에 일본인이 늘어나면 일본 정부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명분을 갖게 된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다시 발을 들이는 것은 중국으로선 참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폭발력을 가진 아베의 대북 접근에 우리 외교부는 아무런 카드 없이 ‘불 구경’하듯 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와 일본의 우경화 및 재무장, 북한의 핵개발과 ‘탈(脫) 중국화’ 등을 종합할 때, 지금 중국에는 한국과의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시진핑 정부로선 박근혜 정부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미·일동맹의 포위망에 틈을 벌리고, 북한 김정은의 반중국적 행동에 채찍을 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 및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한국이 미·일동맹에서 ‘왕따’되는 듯한 상황도 중국 입장에선 유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이 한국 측에 자신들이 정한 ‘외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압력을 가하고 있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차관보는 6월 초 베이징을 방문한 한국 공공외교포럼 대표단에 “한·미 관계가 한·중 관계 발전에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부 중국 인사들은 한국이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에 합류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중국은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공세를 펴며 ‘대일(對日) 공동전선을 형성하자’는 요구를 하고 있다.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하고 종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서 한·중 공조를 외치는 것이 그런 예다.

요컨대 중국은 한국에 ‘최고의 대우를 해줄 테니 미·일동맹과 선을 긋고 중국 편에 서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 주석이 박 대통령에게 “친척집에 왔다”며 친근감을 표시하겠지만, 내부적으로는 한·미-한·일 관계에 대한 중국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친척’이란 단어는 친구 이상의 가까운 사이를 표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공책봉 시대 ‘형님-동생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시진핑 방한을 계기로 양국 정부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라는 표현에 ‘전면적’이란 수식어를 추가해 양국관계를 ‘격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수사 못지않게 실제 행동도 중요하다. 중국은 말로는 ‘전면적 전략 협력’을 외치지만 행동에서는 한국을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세월호 사건으로 한국 해경이 실종자 수색에 총동원된 틈을 타 중국 어선들이 대대적으로 불법조업을 하는 것을 중국 정부는 막지 않고 방관했다. 우리 정부는 이런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야 한다. 중국은 종합 국력이 미국을 추격하면서 과거 중국 중심의 봉건적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향수를 내비치고 있다. 한국이 ‘조공체제’ 같은 구시대 질서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대중외교에서 확고한 원칙을 정하고 일관된 자세를 보이며 갈등요인에 미리 대비해 나가야 한다.

첫째, 국가주권에 대한 침해나 간섭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무기장비의 강화나 한·미 군사훈련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위한 자위권적 선택이다. 중국이 이에 간섭하는 것은 내정간섭이 된다. 중국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제어하지 못한다면 한·미 군사훈련에 대해 간섭해선 안 된다.

둘째, 한국이 발전시켜온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언론자유와 같은 소중한 가치는 어떤 외부 압력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북한 인권문제에서 한국 정부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셋째, 대국이 소국을 압박하는 식의 불평등한 관계나 언행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중국이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에 불평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한다면 한국은 아시아 각국들과 연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일본)이 한반도에 깊이 개입하면 할수록, 일본(중국)도 개입의 유혹을 느끼고 행동에 옮긴 사례가 많다. 한국이 미·중(美中)의 ‘한반도 줄다리기’와 중·일(中日)의 ‘한반도 낚시질’에 휘둘리지 않고 생존하려면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외교와 국방전략이 필요하다. 지금은 중국이 한국을 매우 필요로 하는 시기다. 이번 시진핑 방문에서 한·중 양국은 북핵문제 해법과 평화통일에 관한 전략적 인식을 공유할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중국의 ‘외교적 수사’에 흥분하기보다 양국 관계를 더욱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명민하고 원칙 있는 외교가 필요하다.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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