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소셜 플랫폼 Change.org에 한 미국의 네티즌이 한국 방송사들을 상대로 ‘검은 얼굴’ 사용 중단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캠페인 소셜 플랫폼 Change.org에 한 미국의 네티즌이 한국 방송사들을 상대로 ‘검은 얼굴’ 사용 중단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방송들은 ‘검은 얼굴(Black Face)’ 사용을 중단하라!”는 청원운동은 지난 8월 18일 시작됐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사는 에이미 진이라는 네티즌이 ‘Change.org’라는 사이트에 페이지를 만들어 청원운동을 시작했다. Change.org는 전 세계 7700만명이 참여하고 있는 캠페인을 위한 소셜 플랫폼이다. 인터넷 서명을 통해 세상의 바람직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에이미 진은 이 사이트에 ‘한국의 인종차별적 방송사들을 규탄하자’는 청원서를 올렸다. 이 청원서는 올라온 지 하루도 안돼 1000명의 서명인을 불러 모았고 한 달이 조금 넘은 현재 청원인 5000명을 훌쩍 넘겼다. 에이미 진은 K팝을 즐겨 듣고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한국의 팬’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그가 한국 방송에 화난 이유는 뭘까. 그가 올린 청원서를 보자.

“한국의 언론사들에게. 우리는 방송에서 흑인 분장 사용을 중단하길 요청합니다. 연예계에도 부탁합니다. 검은 분장이 흑인들에겐 거부감이 상당한 인격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청원 사이트에서 “해외에서 한국 방송을 접하기 매우 쉬워졌고 인기도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국 드라마와 K팝은 해외팬층이 가장 두꺼운 분야”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이 그만큼 넓어진 팬층을 배려하고 있지는 않다는 우려와 함께 그 예로 한국 방송의 ‘흑인 분장’을 들었다. 미국의 경우 19세기 악단에서나 우스꽝스러운 흑인 분장을 한 백인들을 접할 수 있었지, 지금은 ‘인종차별’이라고 해서 금기시된다.

‘Change.org’에서 ‘검은 얼굴 금지’ 서명의 화살은 한국만 향한 게 아니다. 알 코넨이란 영국 국적의 네티즌은 네덜란드 교육부 장관에게 크리스마스 축제(12월 5일) 때 매년 등장하는 검은 얼굴 분장을 한 시종들이 사탕을 나누어주는 학교 행사를 금지해 달라는 인터넷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1000명의 지지를 조금 넘기고 종료됐다. 네덜란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미국이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12월 5일 축제를 연다. 우리가 익숙한 산타클로스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신터클라스(Sinterklaas)와 양옆에 검은 얼굴로 분장한 두 명의 시종 즈왈트 피트(Zwarte Piet)가 사탕을 나누어주는 전통이다. 즈왈트 피트의 검은 분장은 굴뚝의 재가 묻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네덜란드인들이 많다. 왜 인종차별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도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역사가 흑인노예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젊은층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폐지 서명운동의 대상이 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국제중학교를 졸업한 조혜림씨는 기자에게 “네덜란드 학교에서 검은 분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전통을 보고 미국 출신 학생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했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즈왈트 피트가 흑인을 겨냥한 검은 얼굴 분장이 아니라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한국은 다르다. 방송에 등장하는 상당수 검은 얼굴은 ‘흑인’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얼굴과 몸짓으로 나온다. 한국 방송을 겨냥한 검은 얼굴 금지 청원 사이트에는 한국 TV에 등장한 흑인 분장 프로그램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비판의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실제 기자가 찾아본 결과 2012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 방송에 등장한 검은 얼굴 분장은 적지 않았다. 검은 얼굴 분장을 하고 방송에 나온 가수나 코미디언들이 상당수였다. 예컨대 tvN의 ‘SNL코리아’에서는 세 명의 방송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나왔고, MBC의 ‘무한도전’에서는 가수 길씨가 흑인 분장을 하고 나왔다. MBC의 ‘세바퀴’에서는 개그우먼 이경실씨가 흑인으로 분장하고 나와 스튜디오를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KBS2 ‘개그콘서트’의 경우 해외에서 가장 큰 인종차별 논란을 야기했다. 지난 6월 29일 개그우먼 허안나씨가 아프리카 부족민 복장을 하고 나온 장면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미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비난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 방송 직후 국내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는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비판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거의 모든 한국 방송사에서 흑인 분장은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다.

현재 한국 방송을 겨냥한 검은 얼굴 금지 청원 운동 사이트에는 세계 각국의 지지자들의 코멘트가 남겨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코멘트를 남긴 믹 레이크는 자신이 흑인이라고 밝혔다. 중미 자메이카 출신인 그는 “검은 얼굴은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국 문화를 존경하고 더 알고 싶었다”면서 “이런 유감스러운 소식을 들어 슬프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나 혐오주의자들이 아니라고 믿는다”며 “내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닉의 코멘트를 본 뒤 기자도 바로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름과 사는 곳 이메일 주소를 적은 뒤 이 캠페인을 지지하는 이유를 간략히 적은 후 사인 버튼을 눌렀다. 곧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왔다. 이메일에는 서명 운동을 조직한 에이미의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친구들에게 계속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국 방송사들의 검은 얼굴 분장 금지 운동을 시작한 에이미는 서명인이 늘어남에 따라 청원운동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남겼다.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청원 운동을 통해 이슈로 부각시키는 것.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자신의 청원이 이슈로 부각됐고 공감을 얻었다. 그 다음엔 K팝을 다루는 언론 매체에 청원 운동을 알리는 것. 그녀의 청원 운동은 ‘케이뮤직’이라는 K팝 사이트에 이미 보도된 상태다. 이제 남은 그녀의 목표는 더 많은 지지자들을 불러 모아 KBS나 SBS 같은 한국의 대형 방송사로부터 청원에 대한 답을 듣는 것뿐이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주간조선이 익명을 요구한 KBS 예능프로 제작 관련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관계자는 해외에서 청원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PD 혼자서 기획하는 게 아니라 편집 제작팀과 조율해서 만들기 때문에 한 명이 이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고 말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인들이 우스꽝스러운 흑인 모습을 한 코미디언이나 가수들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를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흑인 분장의 방송 출연자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들으면 놀랄 만한 소식이 있다. 지난 7월 3일 미국 CBS 뉴스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법정이 산타데이의 검은 얼굴을 한 즈왈트 피트가 자칫 흑인들에 대해 멍청하거나 노예스럽다는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며 ‘인종차별적 묘사’라고 판결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분명 네덜란드에서도 즈왈트 피트를 친숙한 전통문화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다. 특별한 악의를 갖고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법원은 이를 인종차별로 판단했다. 170만명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나라에 살면서도 방송에 등장하는 검은 얼굴을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이 곰곰이 되새겨야 할 판결이다.

김정현 인턴기자·캔자스주립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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