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금융특구 설치 등 경제성장 전략을 발표하고 있는 아베 일본 총리. ⓒphoto 로이터
지난해 6월 금융특구 설치 등 경제성장 전략을 발표하고 있는 아베 일본 총리. ⓒphoto 로이터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월례경제보고 총괄판단’은 흥미로운 자료다. 한국의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록과 비슷한 이 자료는 일본 최고의 경제 관료들이 장기 불황에 빠지기 시작한 일본 경제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991년 1월 일본 경제는 천정부지로 치솟던 주가가 하락세로 돌아서며 부동산 시장마저 붕괴되고 있었다. 위기의 전조가 뚜렷했다. 하지만 이 시기 ‘총괄판단’은 한가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진단을 내놓고 있었다. 일본 경제기획청의 자료집에 따르면 1991년 1월 총괄판단의 결론은 ‘국내 수요가 견조하게 움직이고 확대 추세에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금리는 6% 수준.

이러한 진단은 1년 내내 이어진다. 1991년 7월 5.5%로 금리를 찔끔 내렸지만 상황 인식은 여전히 ‘(경기가) 완만하게 감속하고 있지만 확대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9월)는 것이었다. 11월 금리를 다시 5.0%로 내리면서도 ‘(경기) 확대 속도가 완화되어 감속하는 중. 이것은 인플레 없는 지속가능한 성장 경로로 이행하는 과정을 나타낸다’고 돼 있다. 경제가 유례없는 침체에 빠지고 있었지만 관료들은 ‘지속가능한 성장 경로로 이행한다’고 판단했다.

총괄판단에서 ‘(경기)침체’라는 단어가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1993년이었다. 그해 1월 ‘조정 과정에 있고,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금리는 처음 2%대로 떨어졌다. 그전인 1992년만 해도 금리를 3%대로 떨어뜨리면서도 ‘인플레 없는 지속가능한 성장경로로 이행하는 조정 과정에 있다’(1월)는 등 계속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결국 1993년 9월 ‘총괄판단’은 금리를 1.75%로 떨어뜨리며 ‘조정 과정에 있고 침체 중에서 회복을 향한 움직임에 답보상태’라는 판단을 내렸다.

홍성국 KDB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부사장)은 저서 ‘세계가 일본 된다’에서 몇 년간 이어진 이 ‘총괄판단’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유례없는 복합불황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맞은 일본 경제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핵심은 잘못된 리더십과 정책 실패다. 홍 부사장은 “일본의 리더십은 장기불항에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잘못된 정책으로 전환형 복합불황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불필요한 정책, 맥을 못 짚은 정책, 자신의 이해만을 위한 정책으로 세계는 전환형 복합불황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성국 부사장에 따르면 일본은 버블이 붕괴된 1990년 이후 현 아베 총리 집권 이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200조엔의 자금공급과 재정방출을 했다. 하지만 경기회복이 가능할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홍 부사장은 “현 아베 정권이 3개의 화살로 비유되는 집중적 경기부양책을 펴고 있지만 지난 4월 소비세 인상 후 경기 회복세가 주춤하는 양상”이라며 “2015년 추가로 소비세를 인상하고 미국의 출구전략이 본격화될 경우 아베의 정책 성공 여부도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25년간 200조엔이라는 엄청난 돈을 쏟고도 일본 경제가 되살아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우선은 앞서 지적한 ‘총괄판단’의 예처럼 정책 실기다. 1985년 플라자 합의가 몰고온 엔고를 타고 극단적 버블에 진입한 일본 경제는 1987년이 되면 부동산 버블이 그야말로 광풍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단적인 예로 1987년 일본의 명목 GDP가 340조엔이었는데 그해 토지 가치가 412.7조엔 증가했다. 버블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후에야 일본 정부는 금리 정책의 칼을 빼들었다. 일본은행은 물가상승을 예방한다면서 1989년 5월 30일 재할인율을 일거에 0.75%포인트 인상해 3.25%로 끌어올렸다. 1990년 8월이 되면 금리를 다시 6%까지 끌어올렸다. 이러한 조치와 함께 일본 정부는 1990년 3월부터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라는 더욱 강력한 조치도 뽑아들었다. 이와 함께 토지거래가격 신고제, 토지 거래 시 39%까지의 양도소득세 중과 등 훗날 ‘버블 붕괴 3종 신기(神器)’라 불리는 정책들을 일거에 빼들었다.

이에 대해 홍성국 부사장은 “대표적인 정책 실기”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1989년이 되면 도쿄권에서는 지가 상승이 진정됐고 토지거래량도 1990년대 들어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뒤늦게 강력한 부동산 규제 조치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에서도 주택불황이 발생하면서 전 세계 자산시장이 하강세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홍 부사장은 “총량 규제는 너무 늦게 실시했고 1991년 12월까지 이어진 총량 규제는 너무 늦게 해제했다”며 “총량 규제 해제가 반년 정도 빠르게 이뤄졌다면 일본 지가의 급락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했다.

정부가 뒤늦게 칼을 뽑아들자 자산 버블은 급격하게 꺼지며 이번에는 반대의 충격을 몰고 왔다. 부동산의 경우 버블이 꺼진 1991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동안 단 한 해의 예외도 없이 가격이 하락하는 장기 침체 국면이 이어졌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4배나 상승한 일본 주요 6대 도시의 지가는 2012년 현재 고점 대비 7분의 1수준까지 급락했다. 극심한 부동산 침체와 함께 2차 세계대전 패배와 맞먹을 정도의 깊은 불황이 일본을 덮쳤다.

이후 일본 정부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갈지자 정책을 오가며 쓸데없이 돈을 쓰기 시작한다. 이때도 구태의연한 리더십이 패착이었다는 게 홍 부사장의 지적이다. 사회의 변화에 걸맞은 근본적 처방 없이 과거의 타성에 젖어 옛날식 처방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홍 부사장은 “일본이 고령화를 넘어 인구 감소가 예측되는 결정적 전환기를 맞았지만 정부는 단지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는 정책을 정권마다 반복했다”며 “특히 내수 부양을 한다면서 정치권, 관료, 토건업자가 결탁해서 쓸모없는 도로를 만들거나 전시형 사업에 치중해서 실탄을 소비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단적으로 1994년 한 해 일본 내 콘크리트 제조량은 총 9160만t으로 미국의 7790만t보다 많았다. 땅 넓이를 감안하면 일본이 미국에 비해 동일한 면적 대비 30배나 더 많은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의미다. 1998년을 보면 일본의 공공근로사업 지출은 16조6000억엔에 달했는데, 이는 파나마운하 건설비보다도 훨씬 더 많으며 미국의 우주계획 예산안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16억엔을 들여 지은 미술관에 달랑 3개의 작품만 걸어놓은 오카야마현, 불과 1만5000명의 지역 주민이 거주하는 현의 논 한가운데 1500석이나 되는 대형 문화회관을 건립한 야마구치현 등 1990년대 경기부양을 명목으로 세워진 토건형, 과시형 투자 사례는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홍 부사장은 “1990년대 일본 소도시들이 기념관 건설을 위해 받은 총 대출금만 약 1조엔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1년8개월간 무려 42조엔의 돈을 쓰며 ‘일본 제일의 빚쟁이’라는 말을 들은 오부치 정권을 보자. 1998년 7월 공명당·자유당을 포함한 자민당 연립 정권으로 출범한 오부치 정권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한 방’의 경제대책을 노렸다. 지금의 아베 정권처럼, 연평균 10조엔 정도의 경기대책을 찔끔찔끔 써온 과거 정권에서 탈피해 강한 한 방으로 상황을 역전시키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경기대책 내용은 이전 10년과 거의 유사했다는 것이 홍 부사장의 지적이다. “내용을 보면 결국 정치권, 관료, 건설업자에게 국가 재정을 퍼주는 데 40%를 썼습니다. 오부치 정권은 당시 신자유주의 전성기를 맞아 감세 조치도 내놓았는데 이미 일본은 고령화와 디플레이션에 빠져 감세 조치가 전혀 효과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큰 맥락에서 오부치 정권의 마지막 한 방은 장기불황을 더 심화시킨 조치였습니다.”

오부치 이전 하시모토 정권(1996년 1월 출범)도 마찬가지다. 당초 ‘개혁’을 내세우고 출발한 하토야마 정권은 임기 내에 정반대의 정책을 오가며 헤매다가 좌초한 케이스다. 당초 하토야마 정권은 재정건전화 없이 장기적으로 일본의 구조적 모순을 치유할 수 없다고 판단해 1997년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하고 그해 11월 재정구조 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등 재정건전화 노선을 추구했다. 하지만 1997년 아시아 통화위기가 터지면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자 재정확대정책으로 급선회했다. 경기 부양을 요구하는 여당과 미국의 목소리를 반영한 조치였다. 홍 부사장은 하토야마 정권의 당초 재정건전화 노선을 ‘헛발질’로 표현한다. “1996년 일본 경제가 2.63%라는 반짝성장을 했지만 그건 이미 예고된 소비세 인상 전의 가수요가 일으킨 착시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토야마 정권은 성급하게 재정지출을 축소하면서 내수시장과 경제 전체가 회복될 수 있는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일본은 내수가 GDP의 70% 이상, 정부 부문을 포함할 경우 90% 이상을 차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악화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회복시키는 방법은 내수 부양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결국 하토야먀의 헛발질은 뒤이은 오부치 정권이 4배 이상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꺼내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 겁니다.”

2001년 4월부터 2006년 9월까지 상대적으로 장기집권한 고이즈미 정권은 2002년 이후 6년간 연평균 성장률 2.2%를 달성하는 등 가장 성공적으로 문제를 푸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문제는 이미 고이즈미의 ‘일본판 신자유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 커진 상태였다는 게 홍 부사장의 지적이다. “고이즈미 내각의 정책은 긴축재정과 금융완화를 조합한 것이었습니다. 제로금리 정책에 더해 양적완화정책을 실시했고 재정적자 삭감, 흑자를 목표로 했습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공기업 민영화 등 완전경쟁을 추구했고 복지는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했습니다. 고이즈미의 정책은 중국과 아시아권의 빠른 경제성장을 타고 수출이 호조를 띠면서 성과가 조금씩 나타났지만 제일 중요한 일본 내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비나 주택투자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이는 고이즈미의 정책이 장기간 이어진 복합불황과 초고령사회라는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홍 부사장은 “고이즈미는 초고령자 의료제도와 사회보장비를 연간 2000억엔으로 억제하는 등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폈는데 이는 평생고용제도가 이미 몰락했고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 정책이었다”며 “그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기업, 대도시와 지방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실패는 과거지향적인 파워엘리트, 잦은 총리 교체가 상징하는 무책임정치(버블을 키우던 1987년부터 2000년까지 14년간 10명의 총리가 바뀜), 미국의 요구에 지나치게 끌려다닌 정책 독립성의 결여 등이 어울린 복합적인 실패다. 특히 여기서 관료들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고 악화시킨 주범들이었다는 게 홍 부사장의 지적이다. “전후 성장스토리에 집단 중독되었던 관료들은 구조적 위기를 단순한 경기순환적 위기로 오판했습니다. 이들의 셀프 개혁은 규제와 이익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경제부양책이 오히려 경제를 추락시켰습니다. 특히 아마쿠다리(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우리의 낙하산 혹은 관피아에 해당)라 불리는 퇴직관료들이 지방권력, 기업과 결탁해 정부 돈을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발행하는 자이토 채권을 이용해 경기부양을 명목으로 숱한 공기업을 양산했고 퇴직 후 이들 공기업에 취직했습니다. 경기부양책이 쌓이면서 자이토 채권은 1999년 GDP의 10%(53조엔)에 이를 만큼 커지기도 했습니다.”

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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