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네덜란드 여성 얀 뤼프오헤르너씨의 19살 때 모습. 그는 1942년 부모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살다 침략한 일본군에 끌려갔다. ⓒphoto 위키피디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네덜란드 여성 얀 뤼프오헤르너씨의 19살 때 모습. 그는 1942년 부모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살다 침략한 일본군에 끌려갔다. ⓒphoto 위키피디아

에도시대(江戶時代) 일본은 ‘쇄국’정책을 폈으나 네덜란드와 유일하게 무역관계를 유지했다. 네덜란드와 일본과의 관계는 1600년 4월 29일 네덜란드의 상선 리흐데(De Liefde)호가 분고노쿠니(豊後國) 우스키(臼杵·현재 오이타현 우스키시)에 표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흐데호는 해적선이다”라고 말했고, 이에 막부는 선원들을 오사카로 호송해 조사한다. 이들 중에는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Jan Joosten)과, 일본과 영국 관계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가 있었다. 애덤스는 후에 일본으로 귀화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해진다. 아무튼 리흐데호 선원들은 에도막부의 개창자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대면했다. 특히 얀 요스텐의 세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서유럽 세계에서의 신·구교 대립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들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부터 해적이라는 혐의가 풀렸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는 얀 요스텐을 에도(江戶·현 도쿄)로 초빙해 외교정책의 상담역으로 삼았다.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이른바 남만무역(南蠻貿易)을 통해 서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포교활동에 대한 위기감으로 점점 가톨릭 국가에 대해 냉담해지기 시작했고, 리흐데호의 표착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포교활동보다는 무역에 중점을 두었던 네덜란드와 영국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과의 관계는 1543년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곳에 포르투갈인이 표착하면서 시작됐다.

리흐데호 표류 9년 후인 160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연합회사(VOC·1602년 설립)가 히라도(平戶)에 무역상관을 세웠고, 1613년에는 영국이 무역상관(1623년 폐쇄)을 두면서 이들과의 무역 및 외교관계가 시작된다. 네덜란드 동인도연합회사는 국가로부터 특별한 보호와 외교권과 군사권까지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은 무역회사 지점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재외공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네덜란드 동인도연합회사는 일본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되어 17세기 세계에서 손에 꼽을 만한 해양통상국가로서의 번영을 이루게 된다. 초기에는 일본으로 생사(生絲)와 견직물을 중개무역으로 수출하였고, 일본으로부터는 은을 대가로 받았다. 중기 이후부터는 모직제품·후추·설탕·유리제품을 수출하였고, 일본으로부터는 은·동·도자기를 비롯해 옻칠 공예품을 수입하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포로로 붙잡혀간 조선인 도공에 의해 시작된 아리타(有田)의 이마리야키(伊万里燒) 도자기는 인기 품목 중의 하나였다.

1641년 네덜란드 상관은 히라도에서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이전한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그리스도교 금제에 따른 서유럽 관계의 통제와 제한이 있었다. 즉 1637년 그리스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시마바라(島原)·아마쿠사(天草)의 난’이 일어나자 도쿠가와 막부는 1638년 이 난을 진압한 후 그리스도교 금제를 철저히 하기 위해 1639년에는 포르투갈과 단교한다. 이어 1641년에는 일본 본토에서의 외교관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대외창구를 나가사키로 한정했다. 특히 네덜란드 이외의 서양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네덜란드조차도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인공섬에서만 거주토록 활동공간을 제한하였다. 네덜란드인이 데지마를 나올 수 있는 기회는 네덜란드 상관장이 에도로 가서 쇼군을 만나는 이른바 ‘에도참부(江戶參府)’ 때만 가능하게 했다.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 독점을 용인받은 대신에 기독교 포교를 할 수 없었고, 더욱이 매년 네덜란드 상선이 나가사키에 입항할 때마다 세계의 정세 정보를 비롯해 선교사들의 일본 잠입과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막부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 남아 있는 ‘네덜란드 풍설서(阿蘭陀風說書)’인데, 이 풍설서의 제출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난학(蘭學)이다. 난학은 네덜란드를 통해 수입한 유럽의 학술·문화·기술의 총칭이며 선구적 역할을 했던 사람은 나가사키에서 견문한 해외정보와 통상관계를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라는 책으로 정리한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774년에는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와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가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의 출판, 1788년에는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가 난학의 입문서인 ‘난학계제(蘭學階梯)’를 저술하면서 난학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이후 난학은 어학, 의학, 천문학, 물리학, 지리학, 측량학,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양문물의 도입과 발전을 이끌어내게 되면서 일본 근대화의 토대를 일구었다.

19세기 막부 말기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서양 이국선의 일본 내항으로 인해 일본의 대외적 위기감은 극대화되었다. 이에 네덜란드 왕 빌렘 2세(Willem II)는 1844년에 개국을 권고하는 국서를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에게 보냈으나 막부는 이것을 거절했다. 결국 1853년 일본은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의 페리 제독의 내항을 맞게 되었고, 1854년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에 의해 강제 개국을 당했다. 1856년에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도 일본과 화친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1858년에는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자유무역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근대적 통상조약의 체결로 결국 네덜란드 상관도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1868년을 전후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의 입장에서 일·란관계의 비중은 이전보다 약해졌지만, 명치정부에 고용된 이른바 ‘고용 외국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네덜란드인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후 네덜란드와 일본과의 관계는 일본의 근대화 달성, 그리고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약화되어 갔다.

일·란관계에서 특기할 만한 것 중의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네덜란드가 일본에 대해서만 선전포고를 했다는 점이다. 즉 1942년 12월 8일 일본에 대한 네덜란드의 선전포고에 의해 양국은 적대적 관계로 돌변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에 앞서 1942년 1월 석유자원 획득을 위해 네덜란드의 동인도령인 인도네시아에 대한 공격을 했고, 3월 10일에는 동인도령의 본거지인 자바섬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의 일본 군정이 시작된다. 당시 포로가 되었던 네덜란드 병사의 일부는 나가사키의 포로수용소에 보내지기도 했는데, 이들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의해 사망하거나 다쳤다. 더욱이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했을 때는 네덜란드인 여성을 강제연행해 ‘일본군 위안부’로 삼은 이른바 ‘백마사건(白馬事件·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감금 및 강간사건)’이 일본의 씻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남아있다.

이러한 적대적 일·란관계는 네덜란드의 반일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전후에 일본군 전범처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B, C급 일본군의 전범 처형에서 연합국 중에서는 가장 많은 226명의 일본군을 처형했다. 네덜란드의 반일감정은 전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잔존해 있었는데, 1971년 소화 일왕이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는 범죄자’라는 낙서를 비롯해 계란투척이 발생했고, 1989년 소화 일왕의 장례식에 각국의 왕족이 참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왕족은 참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1991년 네덜란드의 여왕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양국관계는 완화되었고, 1995년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한 당시 총리의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계기로 새로운 일·란관계가 진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나 침략 행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네덜란드를 비롯한 일본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당사국들에 반일감정의 원천이 되고 있다.

신동규 동아대 국제학부(일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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