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중관촌의 칭화과기원. ⓒphoto 조선일보 DB
중국 베이징 중관촌의 칭화과기원. ⓒphoto 조선일보 DB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에 입주할 예정인 칭화(淸華)홀딩스는 대표적 교판기업이다. ‘교판기업(校辦企業)’은 중국에서 학내 벤처기업을 뜻하는 용어다. 학교가 지분을 갖고, 학교 구성원들이 영업활동을 벌여 낸 수익으로 굴러가는 형태다. 중국에서는 멀쩡한 교수들이 “같이 비즈니스를 해보지 않겠느냐”며 나서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대개 교판기업을 이끌고 있는 것이 십중팔구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베이징 중관촌(中關村)을 만든 주역도 교판기업이다. 베이징 하이뎬구(海淀區)의 중관촌은 교판기업들이 자리 잡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베이징대, 칭화대 등 양대 명문대를 비롯 임업대, 농업대, 광업대, 지질대, 과기대, 항공항천대 등 각종 기술대학들이 밀집해 있다. 산학연(産學硏) 네트워크를 이뤄 인력채용과 정보수집, 부품확보 등 집적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최적지였다.

중국의 대표적 교판기업인 베이징대 산하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을 비롯해 칭화대 산하 칭화통팡(淸華同方) 등 유명 교판기업의 본사는 모두 중관촌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번에 인천 송도에 들어올 예정인 칭화과기원이 태어난 곳도 중관촌의 칭화대 정문 앞이다. 중국의 IT기업들과 기술인재들이 모두 한곳에 있다 보니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선(Sun) 같은 외국계 기술기업도 중관촌에 모두 입주했다.

이 같은 이유로 중국의 교판기업들은 한국 대학들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기도 했다. 지난 2008년 출범한 서울대 기술지주회사 역시 중국의 교판기업들을 벤치마킹해 태어난 조직이다. 양필승 칭화계기업 한국법인 대표(이사장)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전 국무총리)은 서울대 기술지주회사 설립을 준비하면서 중국 칭화대 측에 학내 기업운영 등에 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교판기업이 급증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직후다. 당시만 해도 대학들은 운영비가 모자란 데 반해, 유휴인력은 학교 내에 넘쳐났다. 덩샤오핑은 각 대학들이 가진 기술과 인재를 활용해 학내에 교판기업을 세워 스스로 먹고살게끔 길을 터줬다. 또 교판기업들 입장에서도 공신력 있는 대학 브랜드를 활용해 인지도를 높여 사업에 나설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이에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비롯한 중국의 명문대에는 교판기업들이 어김없이 자리 잡았다. 대학 내 출판사나 인쇄소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칭화대의 경우 중국 최고 이공계 명문이다 보니, 일찍부터 기술 위주 교판기업들이 생겨났다. PC와 노트북 등을 생산하는 칭화통팡을 비롯 IT 주변기기를 생산하는 칭화쯔광(淸華紫光)과 의약품 등을 생산하는 칭화청즈(淸華誠志) 등의 상장사들이 대표적이다.

중국 최대의 교판기업인 베이다팡정은 문사철(文史哲) 전통이 농후한 베이징대에서 태어났다. 베이징대 왕쉬안(王選) 교수가 창업한 베이다팡정은 중문(中文) 컴퓨터 조판시스템을 개발한 회사다. 중문 컴퓨터 조판시스템은 숫자도 많고 복잡한 한자를 이용한 인쇄업을 혁신했고, 한자인쇄술의 제2혁명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판기업들은 기업명부터 각 대학의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베이다팡정의 경우 베이징대의 교훈인 ‘반듯하고 바른 사람이 되라’는 ‘방방정정주인(方方正正做人)’이란 말에서 한 자씩 따서 ‘팡정(方正)’이란 사명을 지었다. 칭화통팡의 경우는 칭화대 내의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올리는 동방부(同方部)란 건물에서 ‘통팡(同方)’이란 사명을 따왔다.

중국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중국 교육부에 등록된 교판기업의 총수는 3564곳, 임직원 수는 약 40만명에 달한다. 이 중 연구개발 인력은 19만명에 이른다. 또 같은 해 기준으로 교판기업의 총 자산은 2292억위안으로, 영업이익은 1671억위안에 달한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는 교판기업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늘었다. 사실 교판기업 가운데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학과 기업 운영이 뒤섞이다 보니 경영도 짬뽕이 됐다. 경영환경이 순탄할 때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경영상황이 안 좋을 때는 교판기업의 운영실적이 학교운영에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실제 ‘중관촌 교판기업 현황 및 문제연구’란 보고서에 따르면, 교판기업은 평균 영업이익이 일반 기업의 절반에 불과하고, 수출실적은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반면 잘나가는 교판기업들은 초창기에는 기술 위주 경영을 하다가, 덩치를 키운 다음 문어발 확장을 거듭했다. 교판기업의 가장 대표 격인 베이다팡정의 경우 본업인 컴퓨터, IT 분야를 비롯해 건강의료제약(팡정의료), 부동산 개발(팡정자원), 증권사(팡정증권), 보험사(팡정인수) 등 금융업으로까지 문어발 확장을 거듭했다. 심지어 대학 이름을 내걸고 비합법적인 영업을 하는 교판기업들도 생겨났다.

교수들이 사업에 바빠 학생들의 수업에 영향을 주는 일도 생겼다. 중국 IT업계의 거물인 리카이푸(李開復) 전 구글차이나 사장은 지난 2001년 리란칭(李嵐淸) 당시 부총리에게 서신을 보내 “교수들이 수업도 하고, 기술도 연구하고, 경영관리도 해야 한다”며 “이로 인해 정작 본업인 학생 수업에 영향을 준다”고 교판기업의 부작용을 지적했다.

이에 중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교판기업에 대한 대대적 구조개혁이 벌어졌다. 모(母) 대학과 산하 교판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완전 분리해 학교가 소유만 유지한 채 기업 스스로 독립경영을 하게끔 한 것. ‘교판기업’을 사실상 ‘교유(校有)기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개혁이 진행되면서 2003년 출범한 조직이 칭화대의 교판기업 지주사인 칭화홀딩스다. 지주사가 나머지 자회사들을 관리하는 식으로 바꾼 것이다.

지난 2009년에는 중국 교육부의 지시로 칭화홀딩스와 같은 교판기업지주사를 제외하고 ‘베이다팡정’ ‘칭화통팡’ ‘칭화쯔광’ 등 대학 이름과 연관된 사명을 모조리 바꾸도록 했다. 과거 ‘학교명+기업명’으로 구성된 사명에서 앞에 붙는 학교명을 떼버리게 한 것. 결국 2009년을 기점으로 베이다팡정은 팡정그룹, 칭화통팡은 통팡그룹 등으로 각각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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