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 ⓒphoto 이동훈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 ⓒphoto 이동훈

싱가포르 도심의 차이나타운 지하철(MRT)역 앞 파고다스트리트에는 내가 보기에 묘한 풍경이 있다. 영국 식민지 때 아편굴이 밀집해 있었다는 파고다스트리트의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이슬람사원인 자마에 모스크와 힌두사원인 스리 마리아만 사원이 마주 보고 있다. 코끼리 등 장식이 인상적인 현란한 힌두사원과 우상숭배를 금기시하는 녹색 모스크의 경건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원과 멀지 않은 곳에는 “붓다의 이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중국식 불교사원 불아사(佛牙寺) 용화원이 향불을 태우고 있었다. 또 멀지 않은 아모이(푸젠성 샤먼의 영어식 이름)스트리트에는 중국 푸젠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의 뱃사람들이 주로 믿는 수호여신 마조(媽祖)를 모신 천후궁은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종교사원들이 한데 몰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적 다양성은 싱가포르의 최대 경쟁력이다. 차이나타운과 유사한 다종교 풍경은 싱가포르 도심 북부의 리틀인디아와 아랍스트리트에서도 펼쳐졌다. 싱가포르는 550만 인구의 74% 정도를 차지하는 중국계 화교(華僑)를 주축으로 말레이계(13%), 인도계(9%) 등으로 형성된 다문화사회다. 또 영미계, 유럽계, 한국과 일본 등 외국계 주재원을 비롯해 필리핀에서 들어오는 보모(保母), 방글라데시와 네팔, 스리랑카 등지서 오는 일용직 건설근로자들까지 가히 ‘인종의 용광로’를 방불케 한다.

원래 중국계와 말레이계 이민사회로 출발한 싱가포르는 다문화, 이민 문제에 누구보다 신경을 쓴다. 싱가포르 자체가 1964년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민족분규 끝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1959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후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에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하지만 1964년 민족분규 끝에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 축출당했다. 중국 광동계 리콴유(李光耀) 초대 총리는 눈물을 머금고 1965년 분리독립을 선포했다.

1965년 싱가포르 독립 당시 200만명에 불과하던 인구를 550만명까지 늘린 것도 과감한 이민정책이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주변국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민족들을 적절히 섞었다. 싱가포르국립대 신장섭 교수(경제학)에 따르면 공공주택정책 역시 추첨제와 함께 인종혼합쿼터제를 병용하고 있다. 또 이민자들이 공공주택을 받아 정착할 때도 적절히 섞여 살도록 하는 ‘소셜믹스(social mix)’를 실시했다.

중국계가 7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중국계의 독주를 방지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도 마련하고 있다. 일종의 대선거구제와 소선거구제를 혼합적으로 사용해 한 선거구에서 여러 민족 대표들이 골고루 나올 수 있도록 한 것. 이는 내각 구성도 마찬가지다. 주(駐)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의 김완중 총영사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현 총리는 중국계인 반면 외무장관 겸 법무장관은 인도계가 맡아서 이끌고 있다고 했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싱가포르는 영어를 비롯 중국어(베이징어), 말레이어, 타밀어(인도) 등 4개 공용어 체계를 택하고 있다. 1942년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낸 옛 시청사 인근 ‘일본 점령시기 사난(死難)인민기념비’는 4개 민족을 상징하는 네 개 석주로 세워져 있다. 네 개 면에는 4개 언어로 각각 설명이 적혀 있다. 싱가포르강 하구에 있는 싱가포르 발견자 래플스 경(卿)의 석상 역시 네 개의 언어로 설명이 적혀 있다.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은 세계 최고의 언어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싱가포르에 주재하는 다국적 식량 관련 협회에서 일하는 영국 출신의 매튜 코백씨는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하다. 코백씨는 “베이징에서도 근무해 봤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언어소통으로 인한 문제가 전혀 없다”고 했다. 중국계 택시기사들은 영어, 베이징어를 비롯 중국 방언인 광동어와 푸젠어까지 구사했다. 중국 방언들은 베이징어와 한자만 같을 뿐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별개 언어다.

택시운전을 하는 푸젠성 출신의 셰(謝)씨 역시 나이 70인데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했다. 셰씨는 “택시운전을 하면 한 달에 3000~4000싱가포르달러가량을 손에 쥔다. 집에서는 중국어로 얘기하는데 영어를 못하면 택시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지 못힌다. 또 서양인들을 태우고 돈을 받으려면 영어를 배울 수밖에 없다”고 영어·중국어를 섞어가며 얘기했다.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베이징어)’ 사용 환경은 최대 경쟁도시인 홍콩보다도 월등한 듯했다. 홍콩은 광동어를 쓰는 광동 사람들이 95% 이상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주류는 대개 푸젠성 출신들이라 광동 출신들보다 베이징어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고 베이징어에 더 익숙하다고 한다. 실제 리콴유 전 총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자신의 아들인 리셴룽(李顯龍) 현 싱가포르 총리 역시 집에서는 모친인 과걱추 여사와 영어로, 부친인 리콴유 전 총리와는 베이징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리셴룽 총리는 중국어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했다. 리 총리는 케임브리지대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영어도 유창하다.

이러한 편리한 언어환경 때문에 최근에는 한국계 싱가포르 이민자들도 급증하고 있다. 싱가포르한인회의 정건진 회장에 따르면, 1990년 싱가포르의 한국 교민은 1300여명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 교민이 1만5000명에 달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교민이 2만5000여명까지 급증해 일본 교민(3만여명) 수를 위협할 정도다. 특히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한국인이 많은데 미국계는 물론 일본계 기업 지사장을 맡는 한국 교민들까지 있을 정도다.

싱가포르 한인회가 있는 탄종 파가르에는 1963년만 해도 한국 식당이 2곳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한국 식당일 정도다. 한국 음식은 물론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 등 한국식 중국 음식을 간판에 내걸고 장사하는 한국 음식점마저 성업 중일 정도다. 차이나타운 끝자락에 있는 탄종 파가르는 리콴유 초대 총리의 지역구로 1964년 민족분규 당시 중국계와 말레이계 간에 민족충돌이 첨예하게 벌어졌던 곳이다.

특히 싱가포르의 한국 교민들은 동남아 다른 지역과 달리 학력, 직업, 연봉 수준 등도 상당하다. 한국으로서는 상당한 인력유출인 셈이다. 주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의 김완중 총영사는 “싱가포르의 각 대학에서 재직 중인 한국인 교수가 150명이고 이 중 이공계 교수만 100여명”이라며 “국내에서는 연줄 등 비학문적 요인을 많이 신경 써야 하는데, 싱가포르는 영어도 잘통하고 연줄 등으로부터도 자유로워 학자들이 싱가포르 대학에 많이 남는 편”이라고 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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