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역에 정차해 있는 호남고속철 신형 KTX.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전북 익산역에 정차해 있는 호남고속철 신형 KTX.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월 15일 광주광역시(시장 윤장현)서구 치평동의 광주광역시청은 발칵 뒤집혔다. 이날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손병석 국토교통부 철도국장 주재로 관계기관 회의가 열렸는데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회의에서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국토부에 제출한 ‘호남고속철도 종합운영계획’ 내용이 밖으로 전해졌는데 ‘대외비(秘)’로 분류돼 회의 직후 회수된 ‘종합계획안(案)’에는 광주시에서 줄곧 요구해 왔던 호남고속철 KTX의 ‘광주역’(광주 북구) 진입이 제외돼 있었다. 되레 ‘종합계획안’에는 ‘호남고속철 전체 편수의 20% 서대전역(대전 중구) 경유’라는 문구가 삽입돼 있었다. 이날 국토부 회의에는 박남언 광주광역시 교통건설국장이 대표로 참석했다.

호남고속철 KTX 상당수 열차가 서대전역을 경유하면 ‘오송~공주~익산~정읍~광주(송정)’로 이어지는 신선(新線)을 달려야 할 열차 중 일부는 ‘오송~서대전~계룡~논산~익산’으로 구불구불 돌아가야 한다. 광주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광주시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호남고속철 분기역이 충북 오송역으로 결정된 후부터 줄곧 “당했다”는 생각을 해왔다. 광주시가 당초 주장한 노선은 충남 천안아산역에서 분기하는 노선. 건설비 등의 이유로 충북 오송역으로 돌아서 서울로 가는 것도 못마땅한데 서대전역까지 재차 돌아가야 하는 꼴이 된 셈. 광주 시민들은 1914년 호남선 개통 후부터 100여년간 대전을 돌아서 서울로 상경했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은 급기야 지난 1월 19일 이낙연 전남지사, 송하진 전북지사 등 호남지역 시도지사와 공동성명을 냈다. “호남고속철을 건설한 근본 취지는 수도권과 호남권을 신속하게 연결하여 고속철도를 통한 사회경제적 파급 효과를 확산시키는 데 있다. 이 효과를 좌우하는 것은 운행거리 단축 및 속도를 높여 운행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KTX 상당 편수를 서대전역으로 우회운행하려는 계획은 호남고속철 건설의 근본 취지에 역행하는 것으로 KTX의 서대전역 경유를 요구하는 대전 시민의 바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고속철도는 고속철도답게 운영하는 것이 상식이자 원칙이다.” 국토부, 코레일, 대전시 등을 싸잡아 강력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 대전광역시(시장 권선택)는 쾌재를 불렀다. 코레일의 ‘종합계획안’에는 호남고속철 KTX 전체 편수의 20%가량을 서대전역(대전 중구)에 정차시킨다고 되어 있었다. 3월 말 개통 예정인 호남고속철 운행 주체인 코레일이 서대전역 경유를 기정사실화한 것. 대전시가 당초 기대했던 ‘전체 편수의 50% 이상 서대전역 경유’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성과였다. 이날 회의에 박용재 대전시 교통건설국장과 함께 참석했던 전영춘 대전시 대중교통과장은 “우리가 요구했던 것은 60%였다”며 추가적인 언급은 아꼈다.

호남고속철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착공됐다. 착공 당시 계획대로라면 ‘오송~공주~익산~광주(송정)’로 이어지는 설계시속 330㎞의 고속신선(新線)을 따라가는 노선이다. 서대전역 경유는 언급이 없었다. 신선이 생기면 기존 호남선(구선)을 이용해 서대전역에서 정차해 왔던 KTX 운행은 중단될 처지였다.

대전시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호남고속철도 분기역을 충북 오송역에 내주면서 줄곧 위기감을 느껴왔다. 대전 자체가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이 되면서 흥한 철도도시다. 분기역이 오송으로 옮겨가면서, 코레일과 한국철도시설공단(KR)의 철도기관 공동사옥이 대전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팽배했다. 코레일과 한국철도시설공단의 본사는 대전역 동광장 바로 앞에 있다. 익명을 요구한 철도계 관계자는 “고속철 분기역이 오송으로 옮겨간 마당에 코레일과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굳이 대전에 남아 있어야 할 명분이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대전시는 전임 염홍철 시장 때부터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지난해 4~5월부터 호남고속철 KTX 서대전역 경유를 목표로 ‘호남선 효율화 방안 용역 수행’을 실시했다. 권선택 현 시장 역시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호남선 KTX 서대전역 경유 추진’을 ‘교통건설 10대 공약’ 중 하나로 내걸고 당선됐다.

당선 직후에는 공약을 바탕으로 ‘국토교통부·한국철도공사와 호남고속철 KTX 운영계획 협의’(2014년 10월), ‘호남고속철 서대전역 경유 유지 후 단계적으로 정차 횟수 확대’(2015년)란 세부사업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임기 내 사업(2014년 7월~2016년 12월)’으로 분류해 대전시 교통건설국 산하 도시철도기획단에서 관할케 했다.

심지어 권선택 대전시장은 호남고속철 서대전역 경유가 무산될 것에 대비, 기존 호남선을 대전도시철도 3호선으로 활용한다는 ‘플랜B’까지 마련했다. ‘계룡~서대전~신탄진’을 잇는 35.2㎞의 기존 구선로에 5개 역을 추가해 도시철도로 바꾼다는 구상이었다. 2527억원이 투입될 이 계획은 ‘충청권 광역철도 착공’이란 이름으로 역시 대전시 도시철도기획단에서 주관해 왔다. 결국 대전시로서는 이 같은 계획이 나름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국토부와 코레일에도 비상이 걸렸다. 호남고속철 개통을 앞두고 대전과 광주를 비롯한 지자체와 지역 정치권, 언론, 시민단체들이 각종 민원을 쏟아내면서다. 인구 13만의 충남 논산시와 인구 4만의 전남 장성군(郡)도 호남선 KTX 존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국방부도 육·해·공 3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와 가까운 계룡역의 호남선 KTX 존치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해에는 “KTX 논산훈련소역을 신설하자”며 공청회까지 개최했다. 반면 신선이 통과하는 공주시, 정읍시 등은 “서대전역 경유 불가”를 외치며 발끈 중이다.

이에 맞서 권선택 대전시장도 지난 1월 20일 대전 코레일청사에서 열린 ‘2015년 철도인 신년교례회’에서 서승환 국토부 장관과 최연혜 코레일 사장과 동석해 “대전 인구의 3분의 1이 호남 사람이고, 서대전역 이용하는 사람만 하루 5700명”이라며 “KTX는 대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장관님(서승환)이 잘 판단해야 한다”고 공개 압박했다.

국토부와 코레일 입장에서 지자체와 지역 정치권의 KTX 정차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요구를 거부할 경우 향후 국정감사 등에서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혀 자칫 ‘동네북’이 될 수도 있다. 급기야 국토부는 지난 1월 19일 “서대전역 경유, 광주역 진입과 관련해 입장을 밝힌 바 없다”며 차단하고 나섰다. 그리고 “지난 1월 15일 관련 지자체 회의에서는 코레일에서 호남고속철 개통에 대비해 지역별 KTX 수요와 운행효율을 감안한 KTX 운행 계획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것”이라며 “국토부는 앞으로 관련 기관, 전문가, 지자체 등의 의견을 수렴한 후 KTX의 안전운행과 수요, 운행효율, 건설부채 상환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운행 계획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토부 내의 기류는 서대전역 경유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신광호 국토부 철도운영과장은 주간조선에 “서대전역은 광주역보다도 철도 수요가 많다”며 “호남선은 지금도 승차율이 41%밖에 안 되는 만큼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면 (고속)신선을 통한 공급이 늘어나서 호남지역 수요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당초 호남고속철을 착공하면서 고속철은 여객, 일반선은 화물 위주로 운영해 철도 운행효율을 극대화하려 했다. “기존선을 화물 중심 운영으로 수도권~호남권 간 물류 문제를 해소한다”고 호남고속철 건설의 필요성을 강변한 바 있다. 이를 통해 도로건설 압력을 줄이고 친환경적인 철도의 물류수송 비중을 극대화한다는 복안이었다. 기존선의 수요는 ‘ITX-새마을’ ‘누리로’ 등 신형 열차를 통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같은 입장이 뒤바뀌자 철도계 일각에는 “대전 출신 철도계 고위인사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얘기마저 나온다. 국토교통부에서 교통을 총괄하는 여형구 제2차관(교통차관)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대전고를 나왔다.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충북 영동 출신으로 대전여고를 나왔다. 이들은 차기 총선에서 유력한 출마후보로도 거론돼 왔다. 최연혜 사장은 2012년 총선에서 대전 서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13년 10월, 코레일 사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새누리당의 대전 서구을 당협위원장을 맡아왔다. 또 여형구 차관(56회)은 권선택 대전시장(53회)의 대전고 후배다. 공교롭게도 호남고속철이 노선결정권을 가진 철도계 고위관계자들의 ‘고향역’(서대전역·논산역)을 우회하게 되는 셈이다.

반대로 철도계의 다른 한 축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강영일 이사장(전 국토부 교통정책실장)은 최근 호남고속철 시승식에서 “호남고속철이 서대전역을 경유하면 43분이 더 걸린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강영일 이사장은 호남고속철이 서대전역을 경유하면 돌아가야 하는 전북 익산 출신이다. 국토부 신광호 철도운영과장은 “지역구 운운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코레일 고범석 언론홍보처장도 “그런 것은 아니다”며 “수요가 있는 곳을 안 다닐 수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국토부, 코레일의 아리송한 태도로 호남고속철은 오는 3월 개통도 전에 ‘완행열차’로 전락할 조짐이 엿보인다. 이는 무려 8조3529억원(1단계 오송~광주송정)을 투입해 건설한 호남고속철의 당초 개통 목적과도 어긋난다. 새로 신설한 역사(공주역) 활성화마저 요원해질 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철도계 관계자는 “이러려면 호남고속철을 신설하는 것보다 서대전역을 통과하는 기존선을 개량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대전~익산을 제외한 나머지 호남선은 호남평야를 달리는 직선구간이라 8조원을 투입해 고속신선을 건설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서대전역과 광주역 인근 철로는 호남선에서 가장 위험한 ‘불량 선형’ 구간이다. 서대전에서 익산역까지 총연장 82.2㎞ 중 46.6%에 달하는 38.8㎞가 곡선반경 1200m 이하 구간이다. 이 중 곡선반경이 400m에 불과한 급곡선도 4.7㎞에 달한다. 호남고속철의 본선(本線)의 최소 곡선반경 설계 기준은 5000m다. 경부고속철의 최소 곡선반경은 직선에 가까운 7000m에 달한다. KTX 고속열차가 달리기에는 부적합한 구간이다.

특히 해당구간에 있는 계룡역~개태사역 9.5㎞ 구간은 철로가 90도 이상으로 꺾어져 돌아가는 소위 ‘마(魔)의 구간’이다. 급곡선이 심해 구간을 통과할 때는 귀를 찢는 듯한 선로 마찰음이 들린다. 탈선을 염려해 호남선 KTX가 이 구간을 지날 때는 엉금엉금 기다시피했다. 최소 곡선반경 400m 구간의 선로최고속도가 70㎞로 규정돼 있다. 호남고속철 최장의 7240m의 계룡터널을 뚫어 낸 것도 계룡~개태사 구간을 우회하기 위해서였다. 호남고속철 개통에도 불구하고 KTX 열차가 서대전역으로 진입하면 계속 이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광주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북송정~극락강역(광주 광산구) 간 4.5㎞ 구간도 90도 이상 두 번이나 휘어진다. 이에 KTX가 속도를 거의 낼 수 없고 37분이나 추가로 걸린다. 이런 급곡선 구간은 KTX 바퀴 손상의 주 원인이기도 하다. KTX 고속열차가 급곡선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 속도를 낮추려고 잦은 제동을 하다 보면 마찰로 인해 바퀴와 선로가 함께 손상된다.

해당구간은 콘크리트궤도로 부설된 호남고속철 신선과 달리 자갈궤도 구간이다. 자갈궤도는 건설비가 저렴하지만 고속주행 시 자갈이 튀어올라 차축과 바퀴를 손상시키는 일이 잦다. 또 콘크리트궤도와 달리 선로틀림 현상이 일어나 자칫 탈선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1998년 101명의 사망자를 낸 독일 고속열차 ICE의 탈선사고 역시 바퀴의 미세손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론났다.

지난해 6월 전국철도노조에서 KTX-산천 열차의 대차균열과 바퀴의 이상마모를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KTX-산천은 호남선과 전라선에 집중투입된 열차로, 코레일은 현대로템 측에 사실상 ‘리콜’을 요청했었다. 호남선과 전라선은 모두 서대전역을 지나 계룡~개태사 ‘마의 구간’을 통과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삭정(削正)’ 작업을 통해 바퀴를 매끄럽게 갈고 선로의 자갈을 보충해야 하는데 이에 막대한 유지보수비가 들어간다. 한 철도계 관계자는 “포르쉐나 페라리를 타고 비포장 자갈길을 달리면 차가 어찌되겠냐”라고 말했다.

게다가 대전과 광주에는 KTX가 아예 정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서대전역(대전 중구)은 대전역(대전 동구)에서 불과 직선거리로 3㎞,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다. 광주에서 광주송정역은 직선거리 11㎞, 택시로 36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다. 대전역과 광주송정역은 각각 대전지하철 광주지하철과 환승할 수 있다. 대전시와 광주시가 추가 정차를 요구하는 서대전역과 광주역은 도시철도(지하철)와 환승이 안 되는 역들이다.

이 같은 지적에 국토부, 코레일, 대전시는 ‘광주~대전 간 KTX 수요’를 내세워 서대전역 정차를 주장한다. 하지만 광주~대전 구간은 지금도 KTX를 타나 새마을호를 타나 별반 차이가 없는 구간이다. 광주~대전은 KTX로 1시간52분, 새마을호(2시간12분)와 20분 차이다. 광주~대전은 거리가 178㎞에 불과해 고속버스에 대한 철도의 비교우위도 별로 없다. 광주~대전은 고속버스로 2시간30분으로, KTX와 30분 차이다.

호남고속철 개통을 계기로 차제에 KTX의 ‘1시(市) 1거점역(驛)’의 정차 기준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당초 KTX 도입 초기에 ‘1광역시 1역’ 정차 기준은 ‘1시 1역’으로 완화됐다가 지금은 수송수요가 부족한 군(郡) 지역에까지 세울 정도다. ‘1시 2역’ ‘1시 3역’도 허다하다. 인구 109만명에 불과한 경남 창원시는 창원중앙역, 창원역, 마산역 등 모두 3곳에서 KTX를 정차시킨다. 인구 29만명에 불과한 전남 여수시에도 여천역과 여수엑스포역(옛 여수역) 등 2곳에서 KTX를 정차시키고 있다. 인구 250만명에 달하는 대구광역시에서 동대구역 한 곳에서만 KTX가 정차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너도나도 KTX 정차를 주장하는 통에 “KTX가 코리안택시냐”(노회찬 전 의원)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다.

필요 이상의 정차역은 역사관리비와 역무인건비만 축낸다. 교통평론가 한우진씨는 주간조선에 “철도가 워낙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들이 많아 정차역을 없애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KTX와 일반열차의 연계운행을 활성화하고 향후 운영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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