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 한국 재벌사에 새 이정표가 하나 세워진다.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회장직을 동생인 박정구 회장에게 이양했다.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박 회장은 “65세가 되면 동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가 말을 실행에 옮기자 재계는 의아해 했다.

물론 그 이전에 구자경 회장이 아들인 구본무 회장에게 LG그룹 총수직을 물려준 적은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수직으로 물려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른다. 그러나 박성용 회장은 동생에게 바톤을 이어주는 수평이동이다. 명예회장이던 박 회장을 필자가 만난 적이 있다. 왜 65세에 회장직을 물려주었냐고 물어 봤다. 대답이 역시 그다웠다. “그룹 회장은 분 단위로 시간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의사결정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내려야 한다. 체력과 사고력 모두를 종합해 봤을 때 65세가 적절할 것으로 판단, 실행에 옮겼다”고 얘기했다. 이런 전통을 만들어 놓으면 다음 동생도 이어 갈 것이고 자연스럽게 회장 자리 다툼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회장의 이러한 용단을 재계에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2세로의 경영권 이양을 앞둔 몇몇 그룹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좋은 대물림 사례로 받아들여질 것이란 전망도 내놓았다.(실제로 두산그룹이 형제 간 그룹 총수직 이어 받기를 시작해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3대 회장에 취임한 박정구 회장이 65세가 되기 전인 2002년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바로 밑의 동생인 박삼구 회장이 그룹 대권을 물려받고 경영권을 행사하던 중 동생인 박찬구 회장과 재산 분쟁이 일어났다. 삼구·찬구 형제 간 분쟁은 재계에 숱한 뒷말을 남기며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재벌 총수들은 정년이 없는 종신직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한 얘기가 있다. 총수는 사망하는 날이 정년이다. 즉 죽을 때까지 권한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총수가 정정할 때는 괜찮지만 총수가 연로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가족 간 재산다툼이나 가신그룹의 폐단이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게 됐을 경우 ‘오너 리스크’가 올 수 있어 이 경우 해당 기업은 물론 재계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을 때 2000년 그 유명한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부친이 건강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총괄회장은 지난 1월 8일 장남을 경영에서 배제하는 인사를 전격 단행,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삼성그룹도 이건희(73) 회장이 지난해 5월 쓰러진 이후 오너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외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을 일찌감치 그룹 후계자로 점지했으나 갑자기 이 회장이 쓰러지면서 승계가 미완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 역시 정몽구(77) 회장이 건강에 이상이 없다지만 오너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봐야 한다. 80을 앞둔 고령인 데다 10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금액으로 낙찰받은 서울 삼성동 부지에 건설되는 대단위 프로젝트가 걸려 있어서다. 여기에다 외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주식 지분 이양이 아직까지 마무리되지 않았다. 최근 정 부회장이 최대 주주로 있는 글로비스 주식 매각이 무산되면서 이 같은 우려가 더욱 크다. 현재 정의선 부회장의 현대차그룹 지주회사인 현대모비스와 기아자동차 주식 지분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글로비스 매각 대금으로 승계를 위한 실탄을 마련하려던 계획에 일단 제동이 걸린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 정몽구 회장의 부재 같은 일이 생긴다면 심각한 오너리스크를 각오해야 할 것으로 재계는 분석하고 있다.

한국의 30대 재벌 총수 중 희수(77세) 이상 고령인 사람은 11명이다. 최고령 경영자는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이다. 호적에는 1922년생으로 돼 있으나 실제는 21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95세이다. 몇 년 전 고관절수술을 받은 뒤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3년 전부터는 한 번도 공개석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난 연말 장남인 신동주 부회장을 일본 롯데 계열사 경영에서 배제하는 인사를 전격 단행해 많은 말을 낳고 있다. 온전한 정신에서 한 인사냐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일본 롯데는 장남인 신동주 부회장이 경영을 책임지고 있었고, 한국 롯데는 차남인 신동빈 회장이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후계 구도 역시 그렇게 그려질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장남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 측이나 일본에선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일본법인) 부회장이 퇴진 전 쓰쿠다 다카유키 롯데홀딩스 사장과 경영 방침을 놓고 마찰을 빚어왔는데 신 총괄회장이 장남인 신 부회장이 아니라 쓰쿠다 사장 노선을 지지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쓰쿠다 사장은 일본 스미토모은행(현 미쓰이 스미토모은행) 출신으로 호텔 경영에도 몸담았으며 2009년 롯데홀딩스 사장이 됐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신 총괄회장이 후계자로 장남이 아닌 차남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룹 주변 인사들의 한결같은 해석이다.

결국 신 총괄회장이 차남인 신동빈 회장을 선택함으로써 롯데그룹의 정체성까지 의심받을 수 있는 소지를 남겨두고 말았다. 신동빈 회장은 몇 년 전까지 일본과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이중국적자였다. 현재는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한국보다 일본 정서에 더 가까운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모친이 일본인일 뿐더러 부인(미나미씨)마저 일본인이어서 일본인 정서가 강하게 흐른다고 봐야 한다. 최근 단행한 장남 배제 인사가 롯데그룹 후계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국과 일본 재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다. 한국 롯데그룹은 국내 재계 랭킹 5위를 기록할 만큼 위상이 엄청나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을 때 몇몇 측근들이 정 회장의 아들들을 부추겨 ‘왕자의 난’을 만들었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이끌던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와 현대건설이 넘어졌다. 결국 정 회장 본인이 죽으면서 ‘왕자의 난’이 끝난 건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하겠다.

신격호 총괄회장 다음으로 고령인 총수가 이종환 삼영그룹 명예회장이다. 1924년 1월생으로 91세다. 이 명예회장은 1959년 한국의 첫 석유화학기업인 삼영화학을 설립하고 플라스틱 가공 사업으로 석유화학 발전을 이끌어왔다. 1970년대에는 일본에만 의존해 오던 송배전용 자기애자를 개발해 국내 전력 수급 안정화에 공헌했다. 2000년 이 명예회장의 호를 딴 ‘관정(冠廷)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했고 2012년 서울대 신축도서관 건립기금 600억원 전액을 출연하는 등 기업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 왔다. 최근에는 그룹 경영보다 자신이 출연한 장학재단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전 재산을 장학재단에 기증, 오너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해 둔 셈이다.

전경련 회장을 지낸 강신호 동아쏘시오그룹(동아제약) 회장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88)지만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부친(강중희)에 이어 2대 회장인 그는 서울대학교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에서 돌아와 동아제약 상무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동아제약은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 회장은 당시 독일로부터 각종 최신 제약기기 설비를 들여와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 의약품을 생산했다. 이어 독일 유학 시절 함부르크 시청 지하홀 입구에 있는 술과 추수의 신 ‘바커스’ 석고상의 이름을 따서 1961년 종합건강영양제라는 명목 아래 ‘박카스’를 출시했다. 박카스는 동아제약을 국내 최대의 제약업체로 성장시킨 일등공신으로 현재까지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강 회장은 박카스의 개발단계에서부터 판매계획까지 모든 분야를 총괄했다. 박카스는 출시 3년 만인 1964년 자양강장제 드링크제에서 1위를 차지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강 회장은 집안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뒷말을 남겼다. 동아제약의 후계자로 처음에는 차남인 강문석 사장이 될 것이라는 데 의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 회장 역시 차남을 곁에 두고 차분하게 경영수업을 시켰다. 그러다 2004년 12월 강 사장은 급작스럽게 대표이사 사장에서 해임되고 2005년 3월에는 동아제약 등기이사직에서 이름이 삭제돼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 간에 부자간 경영권 다툼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후계자로는 강 사장의 이복동생인 강정석 사장이 부상했다.

차남 강문석 사장을 후계자에서 배제한 이유를 놓고 여러 얘기가 있다. 강문석 사장의 생모와 강 회장은 법적인 부부일 뿐 오래전부터 따로 살았다. 강 회장이 두 번째 부인과 살림을 차린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강문석 사장이 부친 몰래 동아제약 주식을 매집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강 사장은 사장 취임 당시 1%대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취임 이후 동아제약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2004년 7월에는 2.83%까지 지분을 늘렸다. 이는 강 회장의 지분 3.85%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수치였다.

강 회장은 강 사장의 지분율이 자신의 지분율에 근접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강 회장도 공격적으로 동아제약 주식을 사들이며 그해 말 5.03%까지 지분을 늘렸다. 부자지간 지분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롯데그룹 신동주 부회장이 지주회사인 롯데제과 지분을 늘린 것과 거의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 이후 강 회장은 차남 강 사장을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하고 자신의 둘째 부인 최영숙 여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4남 강정석 동아제약 메디컬본부장을 영업본부장으로 승진시키며 경영 일선에 전진배치했다. 이에 격분한 강문석 사장의 생모는 이혼 소송을 제기, 화제를 뿌렸다. 강 회장은 결국 이혼하고 강정석 사장 생모와 혼인신고를 함과 동시에 4남을 후계자로 정리한 상태다. 자신이 생전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형제 간 분란이나 ‘오너 리스크’를 제거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은 올해 만 80세다. 현재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 법정에 나서고 있다.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이 형제 간 의견충돌로 형 조현준 사장과 동생 조현상 부사장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발하면서 집안 싸움이 법정으로까지 비화된 상태다. 특히 조 회장은 담낭암을 앓고 있는 터라 그를 둘러싼 재판에 시선이 집중돼 있다. 조 회장은 2003년부터 10여년간 8900억원의 분식회계를 통해 법인세 1237억원을 포탈하고 2007~2008년 ㈜효성의 회계처리를 조작해 주주 배당금 500억원을 불법으로 취득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국내외에서 임직원이나 해외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수천억원대의 효성 및 화학섬유 제조업체인 카프로 주식을 사고팔아 1318억원의 주식 양도차익을 얻고 소득세 268억원을 포탈한 혐의다. 조 회장은 이러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기업 경영상 어쩔 수 없는 행위였지 개인적인 이득을 보려고 저지른 일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조 회장은 고령에다 불편한 몸으로 법정을 오가며 변론에 나서고 있다. 그런 와중에 자식들 간 분쟁이 겹쳐 어쩌면 ‘오너 리스크’를 어떤 기업보다 더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국내 건설면허 1호 업체 삼부토건도 지난해 7월부터 오너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조남욱(82) 삼부토건 회장이 고령인 데다 그의 차남 조시연 삼부건설공업 대표가 배임수재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당시 삼부토건 전무이자 부사장으로 일하던 조 대표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에 회사를 지급보증 세우는 대가로 2008년 7월부터 2012년 9월까지 시행사로부터 12억2500만원의 리베이트를 받았다. 삼부토건은 중견 건설사로서 위상을 잃은 채 자금난에 빠져 현재 워크아웃을 진행 중이다. 이런 와중에 삼부토건 노조가 사측의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에 조남욱 회장 등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노조는 최근 “조남욱 회장을 비롯한 2~3세들의 무능 경영에 따른 마구잡이식 PF사업 투자 실패로 사측이 대규모 부채와 이자, 지급 보증을 떠안게 됐다”고 밝히면서 족벌 경영인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회한 조 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삼부토건의 운명이 달려 있다.

이외에도 희수를 넘긴 재벌 총수들은 애경그룹의 장영신 회장을 비롯 농심 신춘호 회장, 동원 김재철 회장, 대림 이준용 명예회장이 있다. 이들은 아직도 재벌 총수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성한 자는 쇠하기 마련이다. 이는 역사의 이치다. 권력자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이다. 선발투수를 적절한 시점에 구원투수로 교체하지 않으면 패전투수가 되는 것은 야구 경기에서 다반사다. 이제 재벌 총수의 정년과 이에 따른 ‘오너 리스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 재벌이 잘못되면 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홍성추

서울신문사 기획취재부장, 산업부장, 서울신문 STV 대표이사 역임. 공저 ‘재벌가맥’(무한출판사·2005), 논문 ‘재벌가 분쟁이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성균관대학교 문학석사·1998)

홍성추 조선일보 객원기자·재벌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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