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전남도당 위원장인 나는 최근 두어 달 도당의 당비 수입과 사용 내역 일체를 매월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언론과 여러분들이 관심을 보인다. “어떻게 그런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느냐”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극찬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기분은 좋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뭐 그리 대단하고 특별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한 얘기인데, 매월 1억원 안팎의 도당 경비 공개 결정은 전혀 어려운 일도, 심사숙고할 일도 아니었다. 전남도의 새정치민주연합 당원들이 낸 돈으로 당 살림을 하고 있으니 살림살이를 당원들에게 일일이 보고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뭐 어려울 게 있으며, 대단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지난 1월 18일 전남도당 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나는 그 선거에서 도당 재정 운용 내역 전체를 매월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공약했다. 당비를 낸 당원들에게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다고 알려드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당선되면 즉각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선되었고, 약속을 지켰다. 그뿐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정당도, 그 어떤 시도당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 대단하다는 거다. 나는 그게 이상했다. 이처럼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안 하고 못해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감출 게 뭐 있으며, 구릴 게 뭐 있단 말인가.

스스로 한 가지만 결심하면 되는 일이었다. 위원장인 내 자신의 사적 용도로는 1원 한 장 가져다 쓰지 않겠다는 결심과 각오, 그거만 있으면 됐다. 나는 그 입장을 밝혔고, 지금껏 그 입장을 지키고 있다. 도당 각종 회의의 의장 또는 위원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의 수당을 10만원씩 받게 되어 있지만, 도당 사무실이 있는 목포시로 오가는 경우 자동차 기름값을 청구할 수도 있겠지만, 도당 위원장으로서 추진해야 할 업무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월 100만원이라도 업무추진비를 가져다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걸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다. 국회의원으로서 상당한 월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따로 도당 경비를 가져다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거니와, 도당 위원장을 철저한 봉사직이라 믿기 때문에 내 시간과 내 몸으로, 그리고 때때로 내 돈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겠다는 가벼운 생각이었다.(솔직히 고백하건대, 한국 정치가 워낙 고비용 구조이기 때문에 위원장으로서 도당 당비를 정당한 명목으로 가져다 쓰고 싶은 충동, 정당한 용도로 가져다 쓰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 않으냐는 자기 유혹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결심을 굳힌 뒤, 해야 할 다음 일은 도당의 당직자들에게 간곡하게 그리고 엄하게 당비의 투명 사용을 지시하는 일이었다. “당을 사랑하기 때문에 매월 1000원씩 2000원씩 당비를 내주시는 당원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 어떻게 우리가 단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쓸 수 있겠느냐. 자기 돈처럼 아끼고 또 아껴서 가장 모범적인 도당 운영에 솔선수범해 주기 바란다”는 취지의 주문을 했다. 업무 수행상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 지출을 억제하는 건 아니지만, 지출을 절감해야 한다는 것, 문제가 있고 없고는 본인들 자신이 잘 알 것이기 때문에 각자 책임하에 잘 사용할 것, 문제가 발생하면 일벌백계로 문책할 것임을 경고했다.

지금까지 매월 내는 당보를 3회 발행했고, 거기에 월별 도당 경비 지출입 내역을 낱낱이 공개해오고 있다. 전남도당의 이 같은 시도를 비교적 새롭고 신선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국민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여의도 정치가 투명해지기를 바랄까, 아니면 불투명해지기를 바랄까? 두말할 것도 없이, 국민 여론은 한국 정치의 투명화를 절대 열망하고 있다. 그러면 그 길로 가는 거다. 이러저러한 구구한 특수함을 들어 어렵다느니 시기상조라느니 하는 변명은 그저 구차하다.

정치의 기준, 그것도 유일 기준인 국민은 한국 정치가 국민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 역시 증명이 필요 없는 ‘정치학적 공리’다. 결국 정치적 성패는 누가 더 잘 싸우느냐에 있지 않고, 누가 더 잘 속이느냐에 있지도 않고, 어느 편이 더 국민의 뜻을 따르려 했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얘기대로, 역사(국민)가 누구 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역사(국민)의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기 소설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라고 쓴 걸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정치란 뭘까? 어떤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속인다는 것, 그 허업(虛業)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 정치인 건 아닐까?

‘성완종·이완구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는 정치 세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아아, 저렇게까지 인간들이 비속해질 수도 있는 거였구나’ 하는 허무함과 쓸쓸함에 사로잡히게 됐다. 누가 정치를 ‘희망을 과학화하는 예술’이라 했던가? 여의도 정치에 입문해서 늘 스스로에게 묻곤 하는 질문이 있다. 정녕 박수 받으며 정치할 순 없는 것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정치권은 허구한 날 싸우고 또 싸운다. 그리고 속이고 또 속인다. 특히 여의도는 유난히 더 그런다.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될 ‘골든 타임’이라며 접점 없는 모순적 대립으로 황금 같은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정말이지, 부끄럽고 부끄럽다. 조선시대 때나 대한민국 시대 때나 이 땅의 조정과 정치판은 허구한 날 찍고, 속고, 속이고, 넘어지고, 부딪치며, 결사항전하는 이골과 저력이 늘 세계적이었다.

최근 들어 ‘한국 선진국 불가론’을 언급하는 이들을 꽤 만났다. 한국이 선진국 진입에 결정적 한계가 있어서 종당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말 거라는 비관론들이다. 우리 동시대 한국인의 문화와 가치규범과 질서의식과 정치적 조정능력과 사회적 연대감과 공동체적 신뢰 등과 같은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 너무 얕고, 가까운 장래에 그것이 눈부시게 개선될 가망도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와 같은 가치와 의식이 더 악화될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하기로는, 기존 선진국들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은 끝내 선진국이 되지 못할 거라는 요지다. 경제 자본 성장이 사회 자본의 낙후로 한계에 봉착할 거라는 얘기다. 요즈음 특히 여의도 정치의 고질적 한계 때문에 우리들의 조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늘 분루를 삼키고 말 거라는 우울한 결정론들을 더 자주 만났다.

이완구 총리가 국민 여론(민심)이라는 기준에 숨죽여 부합했더라면 오늘 저처럼 초라한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어 있진 않았을 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 여론을 좇아 겸허하게 파동을 대면하고 순리대로 수습해갔더라면 싸늘한 국민 여론 앞에 서 있는 수인(囚人)처럼 왜소해 보이진 않을 거다. 야당 의원으로서 하는 얘기이지만, 새정치민주연합도 성완종·이완구 파동을 국가적 악재로서 인식하고 어떻게든 빨리, 그리고 철저히 수습하지 않으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대처하는 것이 국민 기준에 합당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진심이고 철학이어야, 나아가 대선 전략이어야 마침내 집권도 이룰 수 있게 되는 거라고 믿는다. 국민 기준 없인 국민 감동 없고, 국민(유권자) 감동 없인 대선 승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권을 원하는가? 선거 승리를 원하는가? 국민의 박수를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국민의 마음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정치권이 국민 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그것뿐이다.

황주홍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 전남도당 위원장

황주홍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 전남도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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