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오롯이 보였습니다
남편도 세 아이의 아버지도 아닌 한 남자가…

47세 남자가 있다.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부산 사하구 다대포 근처가 고향인 그는 어린 시절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노는 걸 좋아했다. 여름이면 산을 넘어 바다에 나가 하루 종일 수영하며 담치, 고둥, 조개를 잡아 주전자에 삶아 먹었다. 가을이면 나뭇가지와 고무줄로 만든 새총으로 망개 열매를 쏘며 새총놀이를 했다.

남자는 공부를 곧잘했다. 외아들인 남자는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고,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난 한 여자와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친구 같은 부부는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아 알콩달콩 살림을 꾸렸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던 부부가 마을버스 종점에서도 한참 떨어진 언덕 꼭대기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10년 넘게 걸렸다.

남자는 성실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책임감 강한 가장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가장 노릇은 힘들었다. 늘어나는 세 아이 교육비와 부모님 용돈, 치솟는 전셋값과 고공행진하는 물가 속에서 점점 지쳐갔다. 아빠 노릇, 남편 노릇, 아들 노릇에 둘러싸여 공중분해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을 즐겨 읽으며 꿈꾸던 자연친화적 삶은 점점 멀어져 갔다. 남자는 가족에게 뒷모습을 자주 보였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서 있거나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아내의 카메라 렌즈에 남편이 들어온 것은 이즈음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쌍둥이 두 딸을 이해하기 위해 찍기 시작한 사진이었다. 아이들의 배경에 등장하는 사진 속 남편이 아파 보였다. 쓸쓸해 보였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남편의 괴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편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매일을 견디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남편은 늘 가족의 배경이었다. 주인공이 되어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적이 없었다. 늘 자기 자리에서 한결같이 자기 역할을 묵묵히 다하는 사람, 그래서 주연보다 조연에 익숙한 사람.

그때부터 아내는 남편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들 사진의 배경으로서가 아닌, 본격적 피사체로서의 남편을 찍었다. 말 없이 그저 웃으며 늘 괜찮은 척하는 남편의 아픔을 헤아리고 싶었다. 퇴근해 들어오는 모습을, 잠든 모습을, 오도카니 앉아있는 모습을, 딸들과 노는 모습을 수시로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아내는 장장 10년간 남편을 찍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리 두기를 통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그제서야 아내는 남편이 오롯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자 아빠의 역할을 훌훌 벗어던진 존재 본연의 한 남자가.

남편은 차츰 아내의 ‘카메라 놀이’에 익숙해 갔다. 얼굴 가리고 도망가기 일쑤였고, 찍지 말라며 소리를 버럭 지르며 카메라를 거부하던 남편은 이제 모델을 자처한다. “이렇게 햇살 좋은 날 왜 안 찍어?”라며 모델 포즈를 취하고 기다리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순간 부부는 서로를 응시했고, 응시한 시간만큼 서로를 깊이 이해해 갔다. 응시한 시간 6570일만큼.

연세대 88학번 동기 김종호·오인숙 부부 이야기다. 별을 좋아하던 남자는 천문학과를, 여행을 좋아하는 여자는 영문과를 나왔다. 명문대 출신의 마흔일곱 살 동갑내기 부부. 현업에서 한창 잘나갈 나이지만 부부는 남들과는 다른 삶을 택했다. 컴퓨터프로그래머 출신으로 대기업 부장이던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 생활에 발을 디뎠고, 중학교 영어교사이던 아내 역시 학교를 그만뒀다. 팀장으로서 구조조정 칼자루를 쥐게 된 남편은 그 칼날로 자기 목을 겨누었고, 서울에서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한 대안학교로 옮긴 아내는 교사로서 한계를 느끼고 선생 직함을 내려놓았다.

부부를 지난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부부의 날(5월 21일) 사흘 전이었다. 남편 김씨는 선배의 소개로 지난 4월부터 이 대학에서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몇 년간의 공백 후 밥벌이를 위해 생계전선으로 뛰어든 것. 이날 남편은 인터뷰는 하지 않고 사진 촬영만 하겠다고 했다. “피사체가 너무 노출되면 신비감이 떨어진다”는 농담 섞인 이유였다. 아내의 진솔한 심정을 담기 위해서는 남편이 계속 옆에 머무는 것도 무리가 있겠다 싶어 남편은 잠시 머물다 일터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교정에 나온 남편은 아내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표정이 꼭 닮았다. 남편은 “나는 눈이 작고 이 사람은 눈이 커요. 나는 말랐고 이 사람은 마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다들 점점 닮아간다네요”라며 눈가 가득 주름을 달고 웃었다.

서울 생활을 접으면서 두 사람은 복장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아내는 이날 청바지와 등산화 차림에 배낭을 멨고, 남편은 편안한 면바지에 면티를 입고 헐렁한 남방을 하나 걸쳤다. 촬영에 응하면서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았다. 부부는 매일 저녁 이렇게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한다고 했다. 언제부터 손을 잡았느냐고 묻자 남편은 이렇게 답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요. 속도를 맞추기 위해 손을 잡기 시작했죠. 따로 걷다 보니 걸음이 빠른 나는 앞서가고, 아내는 ‘천천히 좀 가요’라며 따라오기 바빠요. 손 잡고 걸으면 같은 속도로 걷게 돼요. 나란히 걷다 보면 대화를 하게 되죠. 같은 말을 하고 또 해요. 그래도 재밌어요. ‘백 번 한 말’이 우리 사이 유행어예요.(웃음)”

아빠가 늦은 날, 쌍둥이 두 딸은 이렇게 써두고 잠들었다.
아빠가 늦은 날, 쌍둥이 두 딸은 이렇게 써두고 잠들었다.

아내는 10년간 찍은 남편 사진을 묶어 사진 에세이를 냈다. 책 제목은 ‘서울 염소’(효형출판). ‘서울 염소’는 남편의 비유다. 남편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어릴 때 큰집으로 심부름을 가곤 했어. 작은 목장을 하던 큰집에 가서 우유도 얻고, 사촌형들도 만났지. 산모퉁이를 돌면 묵은 밭 같은 평지가 나오는데 거기 염소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거야. 염소는 동그라미 안에 있어. 쇠말뚝과 동그라미 중간쯤에 앉아 입을 우물거리면서. 그 모습이 어린 눈에도 무척 인상적이었어. ‘바깥 풀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구나. 불쌍하다.’ 그런데 커서 보니까 내가 딱 그 염소야. 목줄 길이가 회사 가는 거리인 거지.”

아내는 남편의 말을 그대로 적어 뒀다. 이런 말들을 사진 옆에 잔잔히 흘린 사진집에서는 10여년 세월의 내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빠의 목에 다리를 턱 걸치고 잠자던 꼬마 민경이, 민희는 훌쩍 자라 고등학교 2학년 숙녀가 됐고, 빤빤했던 남편의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깊게 잡혔다. 그 10년 새 아내의 카메라 앵글도 많이 변했다. 먼발치서 남편의 뒷모습을 찍던 앵글은 점점 남편 가까이 파고들게 됐다. 남편의 정면을 찍고, 얼굴 표정을 찍는다. 아내의 사진 속에서 남편의 웃음은 점점 늘어갔다.

꼬박 10년간 준비해온 사진에세이를 선물받은 남편의 심경은 어떨까? 남편 김종호씨는 쑥스럽게 웃더니 “저는 그렇게 슬픈 사람이 아닌데 너무 슬프게 표현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두 딸들은 엄마가 쓴 아빠의 사진집을 읽으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가족이 자랑스럽고, 엄마 아빠가 이렇게 섬세한 분이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됐어요. 우리도 엄마 아빠처럼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를 가슴에 새기며 살고 싶어요”라는 내용이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진에세이 속 아빠의 말을 깊이 새긴 편지였다.

10년간 찍은 남편 사진은 도대체 몇 장인지 셀 수도 없다고 했다. 에세이 작업을 위한 사진 선별에만 3~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사진집을 내면서 아내는 ‘동그라미’에 집착했다고 했다. 사진집을 다시 펼쳐보니 염소가 매여 있던 땅도, 나무도, 축 처진 옥수수 잎도 동그라미 모양이다. “동그란 밥상은 우리 가족에게 행복의 상징이었어요. 동그라미를 통해 가족을 들여다보고 싶었죠. 이 나무들을 보세요.(같은 나무를 여름과 겨울에 각각 찍은 사진을 펼쳐 보였다.) 잎 무성한 여름나무는 제 형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이렇게 잎을 다 떨구면 비로소 자기 형태가 나와요. 그게 남편 같았어요. 여름나무가 가족의 역할에 둘러싸여 있는 남편이라면, 역할을 벗어던진 겨울나무가 남편의 참모습이에요.”

아내의 사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사진은 관계 개선과 소통의 결정적 매개가 됐다. 사진을 통해 서로의 참모습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이들 부부가 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고집이 센 부부는 종종 부딪쳤고, 말 없는 남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 한때 글을 택했다. 아내 오씨는 “글은 일방적인 소통이지만 사진은 쌍방향 소통”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제가 남편한테 남긴 글을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더군요. 화가 났을 때에는 글을 통해 소통하지 말라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두고두고 남아서 그때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글은 혼자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수단이지만 사진은 달라요. 화가 나거나 싸우면 상대방을 찍을 수 없죠.”

사진은 신비한 힘을 지녔다. 아내 오씨는 “사진을 통해 남편을 바라보면서 내 삶 역시 변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를 찍는 것은 결국 나를 바라보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남편을 찍으면서 느꼈어요. 너무 딱 붙어있으면 문제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약간 거리를 두니 내 감정을 섞지 않고 바라보게 되더군요.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화나거나 슬프거나 너무 기뻐도 그 순간에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요. 남편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라도 나는 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어요.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고 좌절하는지 알게 됐죠.”

부부가 회사와 학교를 각각 그만둔 시기는 아내가 남편을 찍은 지 7~8년 만의 일이다. 사진이 한창 물오른 시점이자 남편을 깊이 이해하게 된 시점이다. 아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남편에게 다가가자 말 없는 가장도 서서히 속마음을 열어 보였다. 아내 오씨는 남편이 겪은 ‘가장으로서의 형체 없는 아픔’을 이해하게 된 두 번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어느 날 남편이 에세이를 청탁받았다며 원고를 봐 달라고 했어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죠. 프로그래머로서 책도 내고 승승장구하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회사일에 치여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있더군요. 프로그래머는 35세가 정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열한 세계예요. 한번 프로젝트를 맡으면 밤샘작업과 주말근무가 예삿일이죠.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을 했는데, 프로젝트 오프닝 당일 실패로 끝난 거예요. 한 달 뒤로 오프닝을 미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남편은 전철 안에서 한강을 보면서 불현듯 스친 몹쓸 생각에 눈물을 흘렸더군요.”

아내는 그제서야 남편의 잦은 배탈과 설사, 치통이 이해됐다고 했다. 속 얘길 잘 안 하는 서울 염소는 훨훨 날아올라 시골 생활을 꿈꾸었던 거다. 머리가 아닌 몸을 쓰면서 두통이 아닌 근육통을 맛보고 싶어했던 거다. 하지만 남편에게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가장으로서의 족쇄는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아득해 보였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피터스 브뢰헬의 그림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과 관련된다.

“남편이 밤샘작업 후 아침에 퇴근한 날이었어요. 자신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침에 회사를 나서는데 눈부신 햇살 속에서 사람들이 너무도 즐겁게 재잘거리면서 출근하더래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더군요. 자신은 어찌되든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잘만 돌아간다는 현실이 너무 아팠대요. 자기 신세가 꼭 그림에서 본 이카로스 같다고 했어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다가가다가 바다에 떨어져 죽은 그리스로마신화 속 인물 이카로스. 과욕에 대한 대가를 치른 이카로스처럼 남편도 과욕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고 말했다. 치통으로 밤새 뒤척이던 남편은 “돈이라는 미끼를 한번 문 이상 입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바늘을 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며 가슴을 치기도 했다.

그후 대기업 부장직을 내려놓고 백수가 된 남편. 아들이 대학교 2학년, 쌍둥이 딸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천문학적인 교육비가 들어가는 시기에 내린 ‘간 큰 결정’이었다. 주변에서는 대책 없이 그만둔 부부를 보고 “금궤짝이라도 숨겨놨냐”며 의아해했다. 설상가상으로 노후를 대비해 빚까지 내며 사둔 주식은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휴지조각이 됐다.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 하지만 부부는 그곳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보았다. 부부의 삶의 기준은 분명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 아내는 남편의 결정을 적극 지지해주고 남편이 꿈꾸는 삶을 현실로 하나하나 실현해갔다. 아내는 “그때는 그게 자연스러웠어요. 여차하면 시골에 가서 살면 되지요”라고 회상했다.

부부는 시골집을 구했다. 아이들 학교에서 가까운 안양집은 그대로 두고 언젠가 시골에서 살 때를 대비해 마련했다. 서울서 다섯 시간 달려야 닿는 전남 고흥에 있는 500만원짜리 빈집이었다. 목수가 된 남편은 틈 나는 대로 자기만의 집을 만들어 나갔다. 천장을 뜯고 나무를 톱질하고 벽에 시멘트를 발랐다. 매화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마당에는 옥수수와 취나물을 심었다. 틈틈이 여행도 갔다. 돈을 아끼려 비행기 대신 배를 이용해 중국을 갔다.

아내 오인숙씨와 남편 김종호씨. 부부는 손을 꼭 잡고 매일 저녁 동네 산책을 한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아내 오인숙씨와 남편 김종호씨. 부부는 손을 꼭 잡고 매일 저녁 동네 산책을 한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결혼 23년차 부부는 요즘 사는 게 소꿉놀이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연세대학교 동아리 ‘동주문학회’에서 만난 부부는 돌고돌아 꿈 많던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 그리던 ‘본질에 충실한 삶, 인간다운 삶’을 꾸리고 있다. 부부는 쌍둥이 두 딸들이 스무 살이 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때가 되면 부부는 단둘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노후 대비는 하셨냐?”는 질문에 아내 오씨는 이렇게 답했다.

“돈이 많으면 좋지만 돈이 없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잖아요. 다들 기본은 해야 한다지만 기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누군가에게 집의 기본은 서울 강남 아파트, 대학의 기본은 서울대니까요. 스스로 기본을 만들어 살지 않으면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게 돼요. 우리가 정한 삶의 기본 방식은 ‘적게 벌어 행복하기’예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부간에 ‘서로의 마음 알아주기’죠. 부부가 마음을 합치면 안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뭘 해도 인생이 외롭지 않고요. 이 세상에 내 마음 알아주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뭘 해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잖아요. 저기에 걸어가는 사람들도 한 명 한 명 다 외롭고 힘들죠.”

아내 오씨는 인간 본연의 고독을 노래한 릴케의 시 ‘그러나 저녁은 깊어만 간다’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고아와 같다’는 구절이 있는 시다.

그러나 저녁은 깊어만 간다/ 모두가 지금은 고아와 같아서/ 대개는 서로를 모른다/ 낯선 나라에서와 같이/ 즐비한 집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정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미지의 삶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손이/ 자신의 노래를 가만히 치켜들기를/ 정원은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러나 저녁은 깊어만 간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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