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친구가 한참 전에 겪은 얘기다. 힘겨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왔다. 식탁에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한 접시 놓여 있었다. 덥석 과일 하나를 집어 들었더니 어느새 다가와 손을 탁 치는 아내의 손길이 느껴졌다. 의아해 하면서 쳐다보는 친구를 향해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애가 오면 주려고 둔 건데.” 좀 서운했지만 속으로 ‘그래 내 아들 주려고 했다는데…’ 하며 참았다.

침대에 벌렁 누웠다. 아내가 또 질겁했다. 아들이 오면 좀 편히 쉬게 정돈해 둔 자리이니 눕고 싶으면 마루의 소파에 가란다. 욱하고 치미는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하루 종일 가족을 위해 일하고 지친 모습으로 귀가한 내가 과일 하나도 대접받지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 내 침대인데 내 맘대로 눕지고 못하고 쫓겨나야 하나.’ 하지만 꾹 참았다. 내색을 했다간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한 지인이 겪은 일이다. 아내가 친정에 가느라 며칠 집을 비웠다. 아들을 잘 보살피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아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아빠에게 “한 시간만 놀다 올게요”라고 했다. 아빠는 “더 놀다 와도 돼”라고 했지만 아들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아들은 ‘30분만 더 놀다 갈게요’라는 카카오톡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는 또 ‘더 놀다 와도 돼’라는 답을 보냈지만 아들은 딱 30분만 놀고 왔다. “왜 더 놀다 오지 그랬어?”라는 아빠의 물음에 아들은 의아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아빠와 다른데?”

자녀 교육의 주도권은 엄마에게 있다. 아빠는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스스로 가정교육의 주도권을 내려놓았다. 이러니 자녀의 기준은 엄마가 될 수밖에 없다. 지인의 경험처럼 모처럼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허용 범위를 넓혀도 자녀에게 있어 기준점은 엄마다. 아내가 친정에서 돌아오면 남편은 아마 혼날 것이다. 아들은 중간에서 엄마 말을 들어야 할지, 아빠 말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빠가 혼나는 것을 보고 ‘역시 엄마의 말을 듣는 게 맞아’ 할 것이다.

요즈음 아빠는 악역을 하지 않는다. 악역 역시 아내에게 일임하고, 자녀에게 잘 보이려 한다. 그러다 보니 아빠는 ‘신하’로 전락한다.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엄마들의 훈계는 아빠를 후광으로 삼았다. “아빠가 아시면…”이 최후의 수단으로 먹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후광은커녕 아빠를 자신의 교육관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로 여기는 엄마들이 많다. 30~40대 아빠가 겪는 소외감은 이런 식이다. 사회생활을 이유로 모든 자녀교육 문제를 아내에게 위임한 자업자득이다.

한때 나는 정신과 외래에서 많은 주부를 상담했다. 그때 당시 상당수 주부들이 “남편은 월급봉투만 열심히 가져다주고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위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실화다. 1970년대 중국에선 인구조절을 위해 한 가정에 한 자녀만 갖도록 강제한 적이 있다. 한 자녀이니 귀할 수밖에 없다. 그때 나온 유행어 중 하나, ‘자녀는 황제이고 부모는 신하이고 조부모는 종이다’.

이런 유행어가 곧바로 한국에서도 현실로 나타났다. 하루 종일 가족을 위해 일하다 퇴근한 가장이 과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고 내침을 받은 건 ‘신하가 감히 황제의 과일을 탐하다니’ 같은 정서다. 아버지의 낮은 위상을 말해준다. 그렇다 치고 왜 많은 부인은 남편이 돈만 주고 멀리 갔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했을까. 이는 남편의 낮은 지위를 말한다.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학원비 벌어다 주는 존재쯤으로 위상이 추락한 이 시대의 남편들, 참담하다.

그렇다고 혼자 좌절해 분노하거나 우울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사모님을 연구해야 한다. 우선 사모님의 언어를 연구해야 한다. “자기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 사고 싶은 게 있는데”의 속말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한다. “자기 날 얼마나 사랑해?”라는 한 단계 높은 질문을 받으면 “나 오늘 일 저질렀어” 정도로 심각한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알자. “쓰레기봉투가 다 찼네”라고 말하거든 “쓰레기 좀 버리고 와”라고 이해하고 얼른 버리고 와야 버림받지 않는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자리에서 이런 불안한 말을 듣는다면 “너 혼자 먼저 자니?”라는 뜻으로, 폭발 일보 직전이란 것을 눈치채야 한다. “나 화 안 났어요”란 말을 듣고도 정말 부인이 화가 안 난 것으로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남편이다. 결혼생활을 오래한 고수들이라면 이 말이 “당연히 열 받았지”라는 소리란 것을 알 것이다.

웃자고 하는 유머지만 내 임상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참 잘 지어낸 유머다. 아내의 특성을 기막히게 잘 짚어준 겉말과 속말이다. 아내의 숨은 뜻을 이해해야 부부 사이가 행복하다는 충고를 꼭 해주고 싶다. 좀 진지하게 주부의 속성을 짚어보자. 주부는 남성과 달리 다중역할의 선수다. 남성은 직장일과 전문 작업 등 한곳에 매몰되어 자기실현의 폭이 좁은 반면, 주부는 다중역할을 수용한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된 일 이외에도 곁가지 일들을 함께하는 능력이 있다. 외골수와 다중의 차이다.

결혼 초기에 아내는 신혼부부가 누리는 허니문 정서를 공유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허니문 정서는 자녀에게 향하는 모성애로 바뀐다. 내 친구처럼 이쯤에서 남편은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정에서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단계다. 주부는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다. 역동적으로 변하는 시대적 흐름에 잘 적응한다. 많은 정보와 사회교육 등을 통해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높인다. 남편이 전문 역할에 올인하는 동안 주부들은 잠재능력을 경계 없이 키워 나간다.

아내는 주도권도 늘려나간다. 결혼경력이 많아질수록 집안일을 주부에게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남편은 오로지 직장일에 올인할 테니 나머지는 모두 아내가 알아서 하도록 위임한 탓이다. 아내는 원군도 많다. 자녀들은 주로 엄마의 원군이다. 이런 변동돼 가는 아내의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길은 있다. 지금 결혼을 준비하거나 결혼경력이 짧은 남편에겐 “함께 나눌 것”을 팁으로 드린다. ‘사랑하니까’란 신기루를 좀 더 구체적인 실천 가능한 행동으로 약속할 필요가 있다. 배우자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징표, 그리고 배우자로부터 받고 싶은 행동”을 서로 구체적으로 약속해서 처음부터 나누어 실천하기를 권한다. 역할 분담이지만 부부에게 맞는 맞춤형 약속이다. 나누어 노력하고 그 결과를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혼경력이 많은 부부는 지금이라도 야금야금 습관을 바꾸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아내는 더 이상 결혼 초기의 사모님이 아니다. 내가 일에 올인한 동안 배우자는 격동하는 사회 변화에 발맞추어 자기성장을 이룬 사모님이 됐다. 업그레이드된 사모님이다. 그러니 일에만 열중하다 사회적 삶의 적응 기회를 놓친 우리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러니 야금야금 사회적 삶의 적응에 함께 동참해야 한다.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누는 습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신혼의 부부처럼 내가 배우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과 받고 싶은 내용을 합의해 보라. 약속해 보라. 실천해 보라. 가족 내의 우선순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신경정신과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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