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의 옛 시베리아 횡단열차 앞에 선 이정면 교수, 이창식 전 우리은행 부행장, 서무송 고문(오른쪽부터).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블라디보스토크의 옛 시베리아 횡단열차 앞에 선 이정면 교수, 이창식 전 우리은행 부행장, 서무송 고문(오른쪽부터).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91세, 89세 두 지리학자가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기원을 찾아 시베리아 답사를 다녀왔다. 13박14일, 3000㎞ 대장정은 두 노학자에게는 ‘갈 수 없는 여행’이었다. 가족의 만류는 물론이고 여행사로부터도 ‘고령’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갈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두 노학자에게는 “꼭 가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만이 절실했다. 91세의 이정면 유타대 명예교수와 89세의 서무송 한국동굴학회 고문, 두 노학자의 꿈은 결국 이뤄졌다.

케이블방송 tvN에서 지난해 방영돼 화제를 불렀던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출연한 ‘꽃할배’들의 평균 연령은 78세다. 이정면 교수와 서무송 고문은 그보다 평균 열두 살이 많다. 평균 90세 ‘꽃할배’들의 시베리아 기행은 예능 프로그램보다 더 ‘버라이어티’하고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평균 90세인 두 노학자의 꿈을 현실로 만든 일등 공신이 있다. ‘꽃보다 할배’에서 짐꾼으로 나온 탤런트 이서진처럼 두 노학자의 짐꾼 역할을 자처한 사람은 이창식(60) 전 우리은행 부행장이다.

방송처럼 스태프들의 도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행은 ‘꽃할배’와 ‘꽃중년’ 세 명이 전부. 이들이 시베리아를 다녀온 것은 지난해 9월이었다. 대장정의 결과물이 지난 6월 5일 책으로 엮여 나왔다. ‘누이야, 시베리아에 가봐’(이지출판)이다. 제목 밑에 영문으로 ‘The Spirit of Arirang in Siberia(시베리아 아리랑의 정신)’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들은 책 수익금으로 고려인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 계획이다. 책이 막 나온 날 ‘의기양양’한 두 노학자와 ‘60대의 이서진’ 이창식씨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음식점 ‘지리산’에서 만났다. 우연찮게도 이정면 교수와 이창식씨가 2년 전 처음 만나 ‘시베리아의 꿈’을 이야기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인문지리학자인 이정면 교수와 자연지리학자인 서무송 고문은 50년 지기 지리학 동료이다. 두 사람 모두 이창식 전 부행장과는 생면부지였다. 두 지리학자와 전직 은행 부행장, 전혀 공통분모가 없다. 아리랑과도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들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두 노학자는 왜 배낭을 메고 험난한 시베리아 땅을 밟았는지,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찾은 것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정면 교수와 아리랑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리랑 박사가 된 지리학자

이정면 교수(왼쪽)가 부랴트족 사람들과 어울려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이정면 교수(왼쪽)가 부랴트족 사람들과 어울려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이 교수는 서울대 지리학과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해외 지리학박사 1호였지만 국내로 돌아와 모교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실력보다 인맥이 앞서던 시대였다. 1960년 경희대에 자리를 잡았다가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연구논문이 화제가 되면서 말레이시아대학,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을 거쳐 1970년 유타대 교수가 됐다. 1994년엔 유타대 학생들이 선출하는 ‘우수 교수상’을 수상하면서 은퇴 후에도 종신 명예교수로 이름이 올라있다. 지금도 유타대에는 이 교수의 연구실과 비서가 있다.

이 교수의 유타대 교수 은퇴식이 있던 날, 유타주의 한인신문인 코리아타임스 주필이 이 교수에게 신문 칼럼을 부탁했다. 몇 번을 고사하다 겨우 써보낸 글이 ‘아리랑’에 대한 글이었다. 왜 ‘아리랑’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막상 글을 보내 놓고 보니 아리랑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는 급하게 다른 글로 대체하고 한국에 들어와 정선, 밀양, 진도를 훑고 다니며 아리랑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에 빠져들었다.

2005년 아리랑 조사차 한국을 방문했던 길에 아리랑 관련단체로부터 부탁을 받게 됐다. 유타에 돌아가면 미국 포크음악계의 대부인 피터 시거(1919~2014)의 한국 행사 참석을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피터 시거는 자신의 음반을 통해 아리랑을 세계에 알린 세계적 반전음악가이다. 어렵게 만난 피터 시거는 행사 참석은 못했지만 이 교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리랑을 더 알고 싶어 자료를 찾았는데 영문으로 된 자료를 찾을 수 없더라. 번역은 어려운 일이지만 아리랑 홍보를 포기해선 안 된다. 아리랑은 세계적인 노래가 될 것이다.”

그 후 아리랑 연구와 아리랑 영문판 출간은 이 교수의 소명이 됐다. 이 교수는 한국의 아리랑에 대한 기록을 모아 2007년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을 펴냈다. 이어 2009년 피터 시거의 바람대로 영문판인 ‘Arirang, Song of Korea’를 펴냈다. 영문판을 낸 것을 계기로 이 교수는 북한에도 다녀왔다. 영문판에 북한 아리랑이 빠져 있다면서 북한 당국이 초청을 했다. 2011년 10월 87세의 나이에 홀홀단신 북한에 들어가 열흘 동안 평양 고려호텔에 묵으면서 북한 학자들과 아리랑 이야기를 나눴다. 남북 공동 아리랑학 체계화와 아리랑 심포지엄 개최를 약속했지만 김정일 사망 등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교수는 북한 아리랑에 대한 자료를 추가해 2013년 개정 영문판 ‘Arirang of Korea- Han, Sorrows and Hope’를 펴냈다.

남북한 아리랑을 모두 묶어냈지만 이 교수는 부족했다. 중앙아시아에 흩어진 고려인의 아리랑이 남아있었다. 2012년 아리랑의 흔적을 찾아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그곳엔 어머니 등에 업혀 아리랑 노래를 듣고 자랐던 고려인 2세들이 살아 있었다. 이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아리랑까지 담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아리랑 완결판을 국문과 영문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아리랑이 맺어준 인연

이 교수는 이를 위해 중앙아시아 6000㎞ 대장정을 계획했다. 이 교수는 이 길을 ‘아리랑 로드’라고 불렀다. ‘아리랑 로드’는 1937년 소련에 의해 강제이주당했던 연해주 고려인들의 발자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화물열차에 실린 한인들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곳곳에 짐짝처럼 내던져지기까지 아리랑을 부르면서 생사를 넘었던 길이었다. 이 교수는 고려인 3세로 넘어가면서 점점 사라져 가는 아리랑 가락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이 교수의 이야기를 주간조선 2013년 8월 5일자(2268호)에 기사화했다. 이 교수와 이창식씨의 인연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교수의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방송국,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아리랑 관련 행사, 세미나에서 이 교수를 초청하기 바빴다. 이 교수의 아리랑 대장정을 다큐멘터리로 찍겠다는 방송사도 나타났고 동참을 원하는 독자들이 주간조선에 연락을 해왔다. 이창식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기사를 본 이씨는 내게 이메일을 보내 “이 교수를 돕고 싶다.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이번 시베리아 기행 책 ‘누이야, 시베리아에 가봐’에 이런 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이 교수의 대장정을 동행 취재하겠다는 방송국을 비롯해서 이 교수를 돕고 싶다던 사람들은 준비 과정에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한 달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더러 비용도 문제였다.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이 교수 옆에 남은 사람은 서무송 고문과 이창식씨뿐이었다. 이씨는 “나라도 따라나서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습니다. 세상에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1981년 우리은행에 입사해 본부장, 부행장으로 일하고 2011년 우리은행의 자회사인 우리펀드서비스㈜를 설립해 지난해 3월까지 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기아대책후원단체인 ‘천원의 기적, 희망의 우물’을 만들어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씨도 한국 땅 한민족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 깊었다. 한 달간 혼자서 800㎞ 국토종단 순례를 도보로 다녀오기도 했다. 2011년 1월 1일 30년 만의 한파를 뚫고 전남 해남 땅끝마을을 출발해 29일 만에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완주했다. 이씨는 그 경험을 담아 ‘길에서 답을 찾다’(2012)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지난해 시베리아 기행에 다녀오자마자 이씨는 홀로 2차 국토종단을 다녀왔다. 자동차로 전국의 100년 이상된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 기록을 담은 책이 곧 나올 예정이다. 고국 땅을 밟지 못한 디아스포라 고려인에 대해 관심이 많던 이씨에게 이 교수의 기사는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이씨가 없었다면 두 노학자의 시베리아 대장정은 무산됐을지도 모른다.

세 달간의 인연이 50년 우정으로

하바롭스크 리베라호텔 로비에서 답사를 나서기 전 장난을 치고 있는 두 올드보이.
하바롭스크 리베라호텔 로비에서 답사를 나서기 전 장난을 치고 있는 두 올드보이.

이 교수와 서무송 고문의 인연도 질기다. 두 노학자는 1966년 국토개발 기술용역회사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만났다. 과장으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서무송 고문이 당시 경희대에 있던 이정면 교수를 부장으로 초빙했다. 이 교수는 이곳에서 딱 3개월 근무하면서 제1차 종합국토개발(1972~1981) 용역의 기초를 만든 뒤 말레이시아 대학으로 떠났다. 두 사람이 함께한 것은 이 기간이 전부였지만 우정은 50년 동안 이어졌다. 두 노학자를 가까이서 지켜본 이씨는 두 분의 우정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했다. “서 고문께서 이 교수님을 어찌나 깍듯이 모시는지 놀랐습니다. 아침저녁 꼭 문안인사를 드리고 식사를 할 때도 먼저 수저를 든 적이 없으십니다. 3개월 인연이 이렇게 깊은 신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

서 고문은 중국 길림성 안도현 명월진이 고향이다. 평양종합대학 지리학부 출신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대학 동창이다. 한국전쟁 기간 남한으로 내려와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1956년 대위로 예편해 지리학으로 돌아왔다. 카르스트 지형으로 뒤늦게 경희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건국대, 공주대, 아주대에서 강의를 했다. 서 고문의 지리학 사랑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3남1녀 중 두 아들과 두 며느리가 지리 교사이고 손자 두 명이 지리학을 전공한 지리학 가족이다. 큰손자의 이름은 ‘지형’이다. 딸은 음악을 전공했는데 첼리스트 장한나가 외손녀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뒤를 따라 답사여행을 다녔던 아들들이 지리학을 전공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삼부자는 1988년부터 2002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국 대륙 7만5000㎞ 답사한 기록을 ‘지리학 삼부자의 중국지리 답사기’(2004·푸른길) 두 권으로 묶어냈다. 세 부자는 티베트고원, 쓰촨분지, 황하·양쯔·헤이룽강부터 쿤룬·톈산·알타이산맥 등을 찾아 혹한과 싸우며 빙하 지형을 탐색하고 고원과 분지를 누비고 다녔다. 배낭을 베개 삼아 정류장에서, 길 위에서 숱하게 밤을 새웠다.

서 고문은 50년 지리학 동료인 이 교수의 꿈에 꼭 함께하고 싶었다. 아리랑 연구는 아니지만 빙하가 만든 바이칼 호수의 지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60여년 답사여행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서 고문의 합류는 쉽지 않았다.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던 탓에 주치의와 상의를 했더니 “꼭 가시겠다면 유언장을 써놓고 가라”고 펄쩍 뛰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리학 동지인 셋째 아들은 가는 날 아침까지 “자식된 도리로 차마 보내 드릴 수 없다”면서 소매를 붙잡고 애원을 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을 서 고문은 한마디로 단념시켰다. “지리학자는 답사 중에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다.” 서 고문은 이 말을 전하면서 “학자가 하나라도 더 배우고 죽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갈 수 없는 여행

바이칼호 알흔섬에서 두 노학자의 나이를 듣고 놀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자며 달려들었다.
바이칼호 알흔섬에서 두 노학자의 나이를 듣고 놀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자며 달려들었다.

이 교수가 애초에 계획했던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 6000㎞가 3000㎞로 반토막이 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정을 맡은 여행사 측에서 “고령이라 여행자 보험도 안 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으로 회사에서 승인을 내주지 않아 일을 진행할 수 없다”는 연락이었다.

이 교수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한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앞이 캄캄하고 이해가 안 됐어요. 창덕궁 비원을 혼자 미친 사람처럼 빙빙 돌았어요. 내 돈 내고 가겠다는데도 티켓을 못 끊어주겠다니 어이가 없잖아요? 아직도 책을 내는 현역인데 무엇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하나 싶었죠. 생리적인 나이보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참고로 이 교수가 오랫동안 일본을 오가면서 연구한 내용을 정리해 지난해 8월에 펴낸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 일본 고대국가는 누가 만들었는가’(이지출판)는 2015년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서 고문도 한마디 했다.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책 읽고 글을 씁니다. 지금도 논문을 쓰기 위해 한 달 도서구입비로 50만원 넘게 쓰는 사람인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보험이 안 된다니 말이 되나요? 나이보다 도서구입비가 기준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출발 예정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이씨가 해결사로 나섰다. 여행사에 달려가 일정을 반으로 줄여 진행해달라고 부탁했다. 열차 타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비행기 이동을 늘려 일정 조정을 했지만 이번에도 여행사 승인이 안 떨어졌다. 여행사로서도 90세 고령의 장기 여행은 처음이었다.

이씨는 “실망한 이 교수님을 보니 큰일 나겠다 싶었습니다. 아리랑 완결판을 마무리 짓겠다는 목표로 버텨왔는데 꿈이 좌절되면 건강도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여행사를 압박해 다른 여행사를 소개받아 천신만고 끝에 대장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9월 14일 출발. 이씨는 막상 떠나려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휴대폰 연결도 잘 안 되는 두 어르신이 공항 약속장소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나 두 노학자는 답사의 고수였다. 무거운 배낭을 거뜬히 메고 공항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씨의 이야기를 들은 두 노학자가 말했다. “우리를 너무 모른 거지. 흐흐흐.”

이씨는 “두 분은 역시 프로였다”면서 출국장에서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출국 수속을 마친 후 이 교수님이 그러시는 겁니다. ‘이 회장(굳이 이 교수는 이씨를 이 회장이라 불렀다)이 리더를 맡아라. 우리는 모든 결정에 따르겠다.’ 사실 이런 여행이 친구로 갔다 원수가 돼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두 분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아셨던 거죠.“

서 고문이 말을 받았다. “이 교수님께 배운 답사의 3대 신조가 있어요. ‘등만 붙이면 아무데서나 잔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먹는다. 가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우회로를 이용한다.’ 사실 우리 나이엔 한 살이 10년과 맞먹어요. 이 교수님이 나보다 두 살 더 많으니 20년 차이나 다름없어요. 학자로서 자세를 지켜주고 이끌어주니 스승을 배우고 닮아가는 거죠.”

이 교수는 서 고문과 이씨를 가리키면서 “두 젊은이의 센스 덕에 갈 수 없는 여행을 다녀왔어요.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면서 웃었다.

시베리아 아리랑

3000㎞로 축소한 여행의 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하바롭스크, 바이칼호의 알흔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로 이어졌다. 이 교수는 이번 여행을 위해 몇 달 동안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도서관을 오고 갔다. 내가 2년 전 이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본 검정색 백팩을 이 교수는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는다.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느냐고 물어보니 이 교수가 “내 모든 것이 들었다”고 답했다. 한여름에도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도서관, 일본문화원을 순례하며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아직 남아있는 고려인들의 아리랑과 애환을 찾아다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고려인 3세 킴 콘스탄틴 바실리비치 러시아 극동대학 교수는 “고려인은 잔치, 결혼식, 광복절 행사 때면 모여서 아리랑을 합창한다”고 말하고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에 대해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193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머니는 하바롭스크에서 추방돼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났다고 한다. “러시아 내전 때 일본이 한국인을 잡아다 일본군 복장을 하게 하고 총알받이로 이용했답니다. 이를 두고 스탈린은 고려인이 일본군 첩자가 될 수 있다고 해 강제추방한 것입니다. 10~1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화물칸에 사람들을 밀어 넣었답니다. 양동이에 대소변을 보고 음식물도 부족해 중앙아시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사람이 열차에서 죽어나갔다고 들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2시간, 독립투사들의 혁명의 땅인 하바롭스크에도 우리가 알지 못한 역사들이 숱하게 남아있었다. 이곳에 사는 한인들은 1만5000여명. 1947년 북·러 협정 이후 건너온 북한 출신과 중앙아시아로 추방됐다가 돌아온 고려인, 사할린 출신 한인 등 세 뿌리가 있다. 중앙공동묘지 등에는 고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잊혀진 채 죄 없이 죽어간 고려인들의 숱한 사연이 묻혀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갔다가 차로 5시간30분을 달려 바이칼호 선착장, 다시 20여분 배를 타고 인류 샤머니즘이 시작됐다는 알흔섬까지. 도보 국토종단을 할 만큼 체력에 자신 있는 60세 ‘꽃중년’도 지쳐 떨어질 여정임에도 두 노학자는 거뜬했다. 특히 지형지리가 전공인 서 고문은 빙하 지형 연구에 신이 났다. 이씨는 노학자들의 체력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서 고문께서 알흔섬 샤라누르 호수를 꼭 봐야 한다는 겁니다. U자형 계곡을 보더니 수만 년 전 빙하가 녹아 흘러간 흔적이라면서 흥분을 하더니 언덕 위로 막 올라가시는 겁니다. 이 교수님도 뒤따라가는데 저는 체력이 바닥나서 주저앉았습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두 분을 뒤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휴~ 체력도 열정도 제가 두 분을 못 당하겠더라고요.”

이날 저녁 이씨는 자다가 난데없는 울음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한 방을 쓰는 서 고문이 너무 무리를 해서 아픈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이유를 물었더니 눈물을 닦으면서 서 고문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이 나이에 이곳까지 왔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감동이 북받쳤다네.”

동쪽에 있는 부랴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는 더 흥미진진했다. 몽골 계통인 부랴트족 사람들은 외모로는 한국인과 구별이 안 됐다. 그곳 사람들은 한국인을 먼 친척으로 알고 있었다. 부랴트 민속의상을 입은 이 교수와 부랴트 여인의 사진을 보니 꼭 오누이 같았다. 이 교수는 답사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면서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에 따르면 아리랑의 기원지는 바이칼 호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울란우데에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 동네 같았어요. 그들의 민속 노래랑 아리랑 가락은 비슷했어요. 다만 우리 아리랑보다 더 힘찼어요. 아리랑은 천의 얼굴을 가졌어요. 우리나라 아리랑만 5000수가 있어요. 왜 수많은 민요 중에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가 됐는지, 아리랑이 담고 있는 정신은 무엇인지 통합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시베리아의 꽃할배들은 그날 그들과 어울려 아리랑을 목청껏 불러 젖혔다고 한다.

시베리아 대장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는 10월 2차 시베리아 대장정 계획을 준비 중인 이창식·이정면·서무송  세  용사와 서용순 이지출판 대표(오른쪽부터).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오는 10월 2차 시베리아 대장정 계획을 준비 중인 이창식·이정면·서무송 세 용사와 서용순 이지출판 대표(오른쪽부터).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이번 여행에서 두 학자가 건져온 이야기들을 일일이 지면에 옮기자면 끝이 없다. 이날도 시베리아 여행 이야기를 하는 두 노학자는 신이 났다. 여행의 성과물은 두 노학자가 각각 책에 담아낼 예정이다. 이번에 나온 책 ‘누이야, 시베리아에 가봐’는 학술적인 이야기보다 세 사람의 여행기에 맞춰져 있다. 여행기를 쓰자는 아이디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졌다. 두 개의 조국을 가지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인으로 살아온 고려인의 애환을 듣고 이들을 돕기로 의기투합했다. 고려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 고려인 3세의 한국 유학을 지원하고 러시아 극동지역의 역사 발굴에 나서는 후학들에게 연구자금을 지원하자는 것. 이씨는 “장학재단 만들려면 우리 책이 많이 팔려야 합니다. 100만권쯤 팔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일단 책 수익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이 일도 이씨가 총대를 메야 하는 일이다.

이들의 시베리아 아리랑은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오는 10월에는 제2차 시베리아 아리랑 대장정을 떠날 계획이다. 이 교수는 이번에 반토막 다녀왔으니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나머지 3000㎞를 기어코 다녀와 아리랑 완결편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2차 대장정에는 원군이 한 명 더 붙을 예정이다. ‘꽃할배’의 ‘여신 짐꾼’ 최지우를 대신한 서용순 이지출판 대표이다. 서 대표는 이 교수가 첫 아리랑 책을 펴낸 2007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아리랑 대장정을 이어올 수 있게 힘이 돼준 숨은 공신이다. 이 교수의 아리랑 책은 출판사로서는 반가운 책은 아니었다. 팔릴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 대표는 “우리의 노래인 아리랑을 정작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리랑 연구는 이 교수님 혼자서 감당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생을 사서 하는 이 교수님을 보면서 출판인으로서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돈이 안 된다고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낸 인연으로 서 대표는 이 교수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서 대표는 서울지리에 어두운 이 교수를 모시고 라디오, TV 출연, 언론사 인터뷰, 강연 참석까지 안 모시고 다닌 곳이 없다. 이 교수를 찾는 사람들도 으레 출판사로 연락을 해서 서 대표와 일정 조정을 한다. ‘여신 짐꾼’ 서 대표까지 2차 대장정에 나서준다니 이 교수는 의욕이 충천했다. 돌아오자마자 백팩을 메고 자료 수집을 위해 또 도서관순례를 하고 있다. 서 고문은 시베리아에서 눈으로 확인한 지형 연구를 내년 책으로 펴내기 위해 한창 집필 중이다.

두 노학자의 열정과 건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14일을 함께한 이씨는 ‘호기심’과 ‘감사하는 마음’ 같다고 했다. “두 분의 호기심은 20대 젊은이들도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호기심이 생기니 궁금해지고, 궁금해지니 관찰하게 되고, 관찰하려면 움직여야 하니 나이 들 새가 없는 거죠. 또 두 분을 보니 매사에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갈 수 없는 여행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건강하게 다닐 수 있는 것에 대해, 매끼 식사에 대해 늘 감사해했습니다. 천국은 하늘과 감사에 있다고 하잖아요.” 이씨는 “이번 여행에서 두 분을 통해 돈으로도 책으로도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지혜를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게 건강 비결을 물었다. “사람들이 자꾸 묻는데 그럴 때마다 하심(下心)이라고 말해요. 목에 힘주지 말고 자기를 낮춰서 살면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없어요. 건강은 마음에서 오잖아요. 노자의 백인유덕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았어요. 뱉어내면 시원하겠지만 그러고 남는 것이 뭐겠어요. 참고 밑지는 것이 버는 것이다는 생각으로 살아보니 좋습디다. 꽃다발은 상대한테 줘버려요. 상대를 깎지 않고 인정해주고 나는 옆으로 비켜서면 마음이 편해요. 내가 잘났다고 상대를 막아서면 ‘너 죽고 나 죽고’가 되는 거지. 하하.” 서 고문은 “책 읽고 글 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잡념이 없다”면서 “명이 허락한다면 100세까지 연구하는 학자로 살다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시베리아를 보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연구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더라”면서 “시베리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면 124살까지 살아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대장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오는 10월을 기약한 두 노학자는 말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영혼은 늙지 않는다.”

인터뷰 | 러시아 하바롭스크 1호 가이드 한복순씨

“내 평생 90세 손님은 처음입니다”

한복순씨가 이정면·서무송  두 노학자와 호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복순씨가 이정면·서무송 두 노학자와 호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평균나이 90세인 이정면·서무송 두 노학자를 모시고 60대인 이창식씨가 두 번째 목적지인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한 시각은 밤 12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2시간 달려온 길이었다. 어두운 역사는 이미 인적이 끊긴 뒤였다. 두리번거리며 가이드를 찾고 있는데 한 노파가 불쑥 나타났다. 가이드를 맡은 사할린 동포 2세 한복순(76)씨였다. 이창식씨는 기가 막혔다. 구순 고개의 두 노학자에다 70대 가이드라니. 세 명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나이 든 일행이라고 나이 든 가이드를 배정했나 싶은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이씨는 다음날 아침 당장 여행사 측에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할 셈이었다. 이씨의 속도 모르고 두 노학자는 한 여사에게 “한창 일할 나이다. 아흔까지 일하라”면서 순식간에 친남매라도 된 듯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한씨는 하바롭스크 최고의 베테랑 가이드였다. 언론사 취재부터 정치인, 기업인 등 한국에서 오는 주요 인사는 물론 한·러 공식행사는 모두 한씨 담당이었다. 사할린사범전문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한씨는 역사, 문화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이씨로부터 한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난 6월 9일 하바롭스크에 있는 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노학자와 만난 이야기도 궁금했고 한씨에 대한 호기심도 일었다. 러시아 사할린 동포들의 애환도 듣고 싶었다. 한씨는 “한국에서 KBS팀이 와서 안내를 해야 한다”면서 바쁘게 전화를 받았다.

한씨의 아버지는 경남 거제 출신으로 1934년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을 당했다고 한다. 한씨의 한국어는 유창했지만 사투리가 섞여 있어 알아듣기 힘든 말도 있었다. 한씨가 가이드를 하기 시작한 것은 한·소수교가 이뤄진 1990년부터였다. 한씨는 “2세들은 한국어와 역사를 잘 아는데 3세들은 한국어를 잘 못합니다. 이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많지 않아 한국어를 배워도 써먹을 데가 없다 보니 한국어 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여행사들이 한씨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였다.

숱한 사람들을 맞아온 한씨도 90대 손님은 처음이라고 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모시고 와 여권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분 다 90세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이렇게 나이 든 분들을 모신 것은 내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관광도 아니고 고려인의 아리랑과 애환을 수집하러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두 분에게 저도 새로운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허락하는 한 가이드 활동을 할 겁니다.”

한씨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두 노학자에 감동받은 한씨는 집에 있는 역사자료와 책자들을 싸들고 호텔로 와서 집에도 가지 않고 하나라도 더 설명해 주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한씨가 전화통화로 들려준 에피소드다. “이 교수님 부탁으로 80대 고려인 2세 교수와 인터뷰를 주선하기 위해 전화를 했더니 ‘내 나이에도 거동하기 힘든데 노인들이 제정신이 아니구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들 새장가 가도 될 만큼 정정합디다’ 하고 쏘아붙였어요.”

3박4일간의 하바롭스크 일정이 끝나고 한씨는 공항에서 두 노학자를 눈물로 보냈다고 한다. 여행사로 당장 항의를 하겠다던 이창식씨는 한씨의 열렬한 팬이 됐다.

두 조국의 주변인으로 살아온 한씨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말을 아꼈다. 이씨는 “워낙 한국 주요 인사들과 접촉이 많다 보니 러시아 당국도 한씨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사할린 동포들은 한동안 무국적 상태였다. 한씨는 “일제 때 끌려왔기 때문에 처음엔 일본 국적이었다가 광복 후에는 ‘비공인’ 신분으로 살았지요. 1974년이 돼서야 소련 국적을 받았어요. 허가 없이는 사할린을 떠나 이동할 수도 없었고 소련 국적이 없으니 명문대는 진학할 자격도 안 주어졌어요. 먹고살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사할린에는 의대도 없고 공대도 없어서 교육열 높은 한인들이 교육 문제로 애로가 많았지요. 어렸을 때 어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눈물 흘리는 것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고 말했다.

한씨는 한국보다 과거 러시아의 적국이었던 일본이 오히려 더 대접받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일본은 이곳에 진출한 기업도 많고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이미지 제고를 위해 투자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에 대한 인식도 아주 좋습니다. 인사성 바르고 약속을 잘 지키는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은 계룡건설이 들어와 아파트를 짓고 있긴 하지만 대기업은 1990년대 말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철수해서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러시아와의 교류에 더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한씨는 “고려인이 러시아 내전에도 참가하고 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너무 많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러시아에 와서 공부도 하고 이 땅에 숨은 우리 역사들도 발굴해 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일 때문에 한국도 자주 찾는다는 한씨는 “한국이 상상도 못하게 발전했다”고 말하고 “아직도 고려인들은 모임이 있을 때면 아리랑을 부르고 나도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아리랑을 듣고 자랐다”면서 두 조국이 모두 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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