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이하 ‘딸에게’)를 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지난 6월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났다. 자택 인근의 개인 연구소다. 아버지로서의 이어령도 궁금했지만, 이 시대 한국의 최고 지성이자 미래학자에게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묻고 싶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시국 속, 그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그가 쓴 시 ‘날개’가 ‘李御寧의 소원시(메르스의 환난 중에)’라는 부제를 달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타고 퍼지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메르스 관련 괴담을 광속으로 퍼 나르며 공포에 떨던 네티즌들은 같은 속도로 이 시를 퍼나르며 위안을 얻고 있다.

81세의 이어령 교수는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연구소 건물 1층에 들어서자 2층에서 대화 중인 그의 음성이 건물 전체에 울려퍼졌다. 열정과 활력이 넘쳤다. 인터뷰는 그의 서재에서 했다. 연구소 서재는 단출했다. 책상 하나와 3인용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책 ‘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질문할 틈도 없이 시작된 첫 얘기는 20분 동안 이어졌다. 말허리를 잘라 질문하면, “이 얘기만 하고 합시다”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머릿속에 기승전결의 시나리오가 꽉 짜여 있는 듯했다.

이어령 교수의 인터뷰는 딸 이야기로 시작해 본인의 삶, 한국 사회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문화적 의미, 메르스, 새 시대의 패러다임, 언론의 역할, 한국인의 속성, 외로운 천재로 살아가기, 80대 노학자의 꿈을 종횡무진 누볐다. 영화와 고전, 과학과 인류학을 넘나들면서 펼쳐진 그의 이야기의 향연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1시간 예정했는데 1시간50분이 훌쩍 흘러갔다. 녹취록을 풀어보니 200자 원고지 기준 192매였다.

8년 전 쓴 소원시 ‘날개’

그가 쓴 소원시 ‘날개’는 벼랑 끝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문 형식의 시다. 이 시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8년 전 일간지 신년호에 발표한 건데, 이 시가 지금 왜 다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도 어수선했다. 경제는 회복이 안 되고, 정치싸움은 치열하고. 그게 요즘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서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 같다.”

시는 ‘벼랑 끝에서 새날을 맞습니다. 추락을 이겨 낼 새 날개를 주소서’로 시작한다.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희망의 날개를 찾아야 합니까” 하고. 그는 주저없이 ‘생명’이라고 답했다. “잃어버린 날개는 생명이다. 생명성을 잃어가고 생명의식을 경시하는 것이 큰 문제다. 메르스는 결국 생명의 문제다. 인간이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다. 메르스 이전에 사람들은 생명의 중요성을 잊고 살았다. 생명을 늘 인식하고 살았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다.”

그는 지난해 ‘생명이 자본이다’(마로니에북스)를 냈다. 컴퓨터 기반의 ‘기술 자본주의’에 주력했던 패러다임에서 ‘생명 자본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가 말한 생명 자본주의는 새 시대의 패러다임을 읽는 키워드다. 새 시대는 기존의 후기 산업사회, 지식사회를 지나 생명 자본주의로 흐를 것이고, 흘러야 한다는 것. 그는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의료가 문제가 아니다. 문명전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머징 바이러스가 새로운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광우병, 에볼라, 메르스는 기존에 없던 질병이다. 21세기에 위험한 건 핵폭탄이 아니다. 이머징 바이러스다. 바이러스와 싸워서 이기려면 문명 읽기를 해야 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처럼 문명을 움직이는 하나의 팩트로 읽어야 한다. 방역대책, 병원시스템 같은 미봉책만으로는 안 된다. 거대한 문명의 문제로 인식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비극은 또 온다.”

그는 “이 경험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개인 차원의 교훈을 조언했다. “누구를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우뚝 서야 한다. 생명의 귀함을 알았으니 매사에 내 생명의 주인으로서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남이 부채질한다고 춤추지 않는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다. 살아있는 실체이고, 내 생명은 하나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 속 언론에 대한 질타가 거세다. 불안에 떠는 네티즌들은 검증되지 않은 괴담을 거름망 없이 퍼나르고, 언론은 속보 다툼을 하면서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망국 언론’이라는 표현까지 나돈다. 이런 혼란을 어떻게 뚫고 가야 할까. 언론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는 계몽기를 거치지 않고 현대화된 한국의 특수성이 이런 사태를 가중시켰다고 본다.

“언론은 전체 민중의 수준과 같다. 포퓰리즘이 그래서 생기는 거다. 똑똑하면 포퓰리즘이 안 생긴다. 현재 정치지도자, 언론, 대중의 수준이 똑같다. 혁명기 이전에는 계몽기가 있는데, 계몽기는 이성적이고 지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배우는 시기다. 그런데 우리는 계몽기를 거치지 않고 현대화됐다. 인터넷 보급은 세계 최강인데,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기를 건너뛴 거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 폭탄을 맞았고, 이 정보 폭탄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가 언론이 되고 인터넷이 되고 정치가 되는 거다. 누군가가 심어주는 생각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자기만의 생각을 정립해야 한다.”

방법을 물었다. 그는 “인터넷만 가지고는 안 된다.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보 처리에는 네 단계가 있다. 데이터, 정보, 지식, 지혜다. 데이터를 정보로,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확장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묻는다. “대한민국 대중의 정보 처리 수준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나?”라고.

메르스가 한국에서 전파력 높은 이유

이어령 교수의 자택 서재에는 컴퓨터가 6대 있다. 검색용, 필기용, 스캔용, 영상 감상용 등 용도가 다 다르다. ⓒphoto KBS 영상 캡처
이어령 교수의 자택 서재에는 컴퓨터가 6대 있다. 검색용, 필기용, 스캔용, 영상 감상용 등 용도가 다 다르다. ⓒphoto KBS 영상 캡처

메르스는 유독 한국에서 전파력이 높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전 세계 2위다. 이를 두고 한국인이 뭉쳐 다니는 데에서 원인을 찾는 시각이 있다. 이 교수가 그의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지적한 한국인의 ‘떼로 있는 운명’의 비극성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의 주사위와 한국의 윷놀이의 속성을 비교분석했다. 서양의 주사위는 하나를 던져서 판가름하는 ‘홀로 있는 운명’인데, 한국의 윷놀이는 네 개의 윷을 던져 판가름하는 ‘서로 있는 운명’이라는 것. 서로 있는 운명 때문에 당파싸움, 눈치보기, 뜬소문과 괴담이 판을 친다는 얘기였다. 이런 시국과 관련, 한국인이 홀로 있는 법,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고개를 든다. 그는 “이런 시기에 더욱 필요한 자세가 온리 원(Only one), 단독자로 우뚝 서는 거다”라며 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딸을 봐라. 아비라는 사람이 아픈 딸 옆에서 졸린다고 코를 골면서 잔다.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더 슬프다. ‘아무리 가까워도 너와 나는 각자 혼자 가는 거구나. 내 살을 주고 피를 줬어도 혼자구나’ 싶다. 혼자라는 건 외롭지만 자랑스러운 거다. 똑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면 이 세상에 나 대신 메울 수 있는 사람이 절대로 없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이다.”

그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과도기로 본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에고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것. 이 과도기에는 양면성이 있다. 주체적인 사고력을 가진 단독자로 우뚝 설 필요가 있지만, 이 또한 행복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타인지향적이다. 허세 부리고 허영심 강하고 간판을 좋아한다. 자아가 빈곤해서다. 서양은 남이 뭐라든 자기 식대로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우리는 반대다. 지금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에고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족 중심이 아니라 사회 중심의 개인이 생기고 있다. 그게 행복한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 다음 단계에 출현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그는 ‘초월적, 통합적’ 인간을 들었다. 개인과 사회, 아날로그와 디지털, 서양과 동양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진 유형이다. “지금 그런 세계의 인격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등을 보면 개인주의이면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 고독에서 혼자 살면서도 끈끈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들. 놀랍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나 ‘레인맨’에 그런 인간형이 나온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회적 개인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나쁜 의미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필요에 따라서 사회적 개인과 가족적 개인을 오가면서 불화를 만든다는 것. 그는 “아버지를 안 모실 때에는 서구적이고, 아버지가 자식한테 얘기할 때에는 한국적이다”라면서 웃었다.

1등을 죽이는 사회

이어령. 그는 20대에 신문사 논설위원을, 30대에 교수를, 50대에 장관으로 일했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시작으로 5개 일간지(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을 거쳐 이화여대 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노태우 정부)을 역임했다. 그가 거친 위원, 위원장 타이틀은 줄잡아 15개가 넘는다. 2000년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대표적이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다가 적잖이 놀랐다. 60개가 넘는 자잘한 타이틀 중 내세울 만한 이력이 많지 않았다. 문화부 장관, 이화여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고문 정도가 눈에 띄었다. 그는 “우리는 비극이 하나 있어”라며 말을 이었다.

“혼자 있을 수 없는 비극. 나부터도 그렇다. 진짜 혼자 외로웠다면 뭐 하나 큰 거 했을 거다. 내가 지극히 상식적으로 살아온 것은 가족 때문이다. 아내와 자식 때문에 열심히 직장에 나가고 돈 벌고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비범한 사람이 못 됐다.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철저히 외로웠다면 내 생은 외롭고 불행했겠지만 적어도 뭐 하나를 했을 거다. 나는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자잘한 것을 많이 했지만, 또 가만히 놔두지도 않더라. 허허. 남들은 나를 과대평가된 사람으로 안다. 내 개인은 진짜 외롭다. 내 결점까지 포함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별스럽지도 않은 내가 이렇게 외로운데 정말 대단한 천재들은 얼마나 외롭겠나.”

그는 한국 사회를 “천리마를 죽이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천리마에게 천리를 뛰게 하기는커녕, 천리마에게 짐을 지우고 그 무게에 짓눌려 죽게 하는 사회라는 것. 또 “1등이 될 때까지는 띄우지만, 1등을 죽이는 사회”라고 말했다. “한국처럼 잘 띄우는 나라도 없다. 풍선처럼 띄운다. 올라갈 때까지는 신난다. 그런데 떴다 하면 바로 떨어뜨린다. 롤러코스터 같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행복한 것은 취임식 때까지다. 그 다음에는 떨어지는 일밖에 없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1등 하지 말아라. 항상 2등 해라. 한국에서 일등하면 죽는다. 일등할 만하면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라. 산봉우리가 보이면 올라가지 마라. 내려와서 다른 산봉우리를 올라가라.” 그에게 “스티브 잡스가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벤처기업하다가 망해서 사회복지기금 타 먹고 있었을 거다.”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 ‘럭키한 세대’라고 말한다. 현 시대 대한민국 교육에 가하는 일침이다. “학교 교육을 거쳐서 수능시험 치렀다면 나는 바보가 됐을 거다. 일제강점기 때 노동자로 동원되고, 좌우익 싸움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녔다. 등록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고. 그게 내게는 행복이었다. 책 읽고 사회와 알몸으로 부딪히고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서 창의적 사고를 확장했다. 세상이 전부 교과서이자 강의실이었다.”

딸을 잃고 짐승처럼 울부짖다

딸 이민아 목사의 작고 1년 전 모습.(2011년)
딸 이민아 목사의 작고 1년 전 모습.(2011년)

이민아 목사(2012년 작고·당시 53세)는 정(情)이 많은 딸이었다. 받고 싶은 사랑도, 주고 싶은 사랑도 많은 딸이었다. 하지만 초보 아빠는 몰랐다. 좋은 학교에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딸은 아팠다. 마음도, 몸도 아팠다. 애정결핍에 시달리던 딸은 죽도록 사랑하던 남자와 결혼했다가 헤어졌고, 스물다섯 된 아들을 급작스레 잃었고, 한 아이는 자폐 판정을 받았다. 고통이 일상이 된 딸은 위암에 걸렸고 실명 위기에 처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딸에 집중했다. 딸이 원하는 사랑이 뭔지 알게 됐고, 뒤늦게 못다한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다. 그즈음 딸은 세상을 떠났다.

이 교수는 딸을 잃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딸의 잉태부터 죽음까지 한순간 한순간 더듬어가면서 기록한 회고록이자 절절한 사랑 편지다. 한편으론 참회록이다.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 소녀 시절 딸을 불러내 ‘굿나잇 키스’를 한다. 글의 호흡이 끊길까봐 딸의 간절한 인사를 본체만체했던 아빠는 편지 속에서 약속한다. ‘만일 지금 나에게 딱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글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펴고 너를 번쩍 들어올려 굿나잇 키스를 할 거다’라고.

그는 “다시는 읽고 싶지도, 공개하고 싶지도 않은 글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 목격한 사람이다. 자궁(Womb)에서 무덤(Tomb)까지 본 거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일부가 태어나 죽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은 아주 희귀하다. 내가 80년 이상까지 살고 이 아이가 도중에 비운(悲運)에 떠나버렸으니까 가능한 거다. 그런 특이한 경험을 통해서 출생과 사망에 관한 고전적인 테마를 말해보고 싶었다. 나의 체험이 딸을 잃은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면 좋겠다.”

그의 글은 이성과 감성의 극과 극을 오간다. 이민아 목사의 아버지로서는 시인의 감성이지만, 이 시대 아버지의 문화적인 코드를 언급할 때에는 냉철한 학자의 이성이다. 그는 이 시대를 “아버지 없는 사회(Fatherless Society)”라면서 아버지를 ‘여분의 인간’으로 규정했다. “어머니와 자식 간은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관계지만,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다르다. 하나의 문화이자 문명이다. 어머니와 자식은 의미부여할 필요없이 확실하지만, 자궁을 갖지 않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다르다. ‘성(姓)’을 이어받음으로써 문화적으로 맺어진 관계다. 아버지의 태도에 따라 더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고, 아예 타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아버지는 사회공동체에서 권위이자 질서이다. 요즘은 아버지 없는 사회다. 아버지는 분명 살아있으나 여분의 인간 같은 존재로 추락했다.” 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존재감과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 사실을 딸을 잃고서야 뼈저리게 깨우쳤다고 한다.

아버지로서의 이어령은 그 누구보다 여린 감성의 소유자다. 그는 딸을 잃고 네 발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슬픔 앞에서 고고한 학자의 품위는 무너졌다. “너무 슬프면 데굴데굴 구른다고 하지 않나. 나는 그게 야만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참고 참다가 폭발하면 네 발로 짐승처럼 포효하며 울부짖게 되더라. 나도 모르게 바닥을 막 기면서. 이게 2~3분간 지속됐다. 이게 길면 죽는 거지. 극한까지 가니 다운되더라. 동물적인 것이 영성적인 것으로 승화된 거다.”

이 광경은 아무도 못 봤고, 지금껏 말한 적도 없다고 한다. 딸의 죽음은 자기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딸의 죽음을 통해 그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자기가 없어지는’ 영적 죽음을 경험했다 한다. 그는 ‘spiritual(영적인) 죽음’으로 표현했다. “슬픔의 극치까지 가니 인간이 곤충이나 동물로 바뀌더라. 마음이 없어지는 거다. 마인드를 상실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동물적인 눈물이 터져나온다. 그건 슬픔이 아니다. 슬픔은 마음이 있으니까 슬픈 거다. 진짜 슬픔은 마음을 벗어난 거다.”

자동차 가진 문인 1호, 너를 위한 거였다

이어령 교수가 딸 이민아 목사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식 때 함께 찍은 사진.(1981년)
이어령 교수가 딸 이민아 목사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식 때 함께 찍은 사진.(1981년)

이민아 목사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바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종종 드러냈다. 딸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아버지 방에서 술도 먹고, 아버지한테 못 받은 사랑을 찾아 일찌감치 결혼했다고 했다. 그 사랑에서도 충족되지 않은 사랑은 하나님한테 구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 인터뷰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아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이었다. 이 교수는 “내가 딸을 귀여워한 건 유명하다. 소문이 다 났는데…”라더니 말을 잠시 멈췄다.

둘은 사랑의 방식이 달랐다. 충남 아산의 엄격한 유교 가풍 속에서 자란 아버지는 좋은 학교 보내주고 자동차 태워주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그래서 딸을 위해 자동차 가진 문인 1호가 됐다. 딸이 인도와 차도를 오가며 위험하게 논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샀다. 그는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속물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딸이 원한 건 물질이 아니었다. 밥을 굶더라도 “아빠!” 부르면 팔을 벌려 “아! 내 딸” 하고 안아주는 스킨십을 원했다. 이 전 장관은 “부잣집 아이일수록 아버지는 늘 바쁘고, 기준이 돈이더라. 지금 와 보니 물질적인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중에 오해가 풀렸다. 딸은 딸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후회했다. 서로의 사랑의 방식을 뒤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후회였다. 딸은 “내 방식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의 방식을 몰랐다. 오해였다. 그 오해가 풀려 마음이 편하고 아버지한테 너무 죄송하다.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늘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며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얼마 후 딸은 세상을 떠났다. 딸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어줄 준비가 돼 있는데 딸은 가고 없었다. 그는 “하지만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나기 전 몇 개월간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망막박리로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가 기적적으로 시력을 찾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성적·합리적 사고로 똘똘 뭉친 무신론자였던 이 교수는 당시 하와이의 작은 개척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 아이의 눈을 고쳐주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얼마 후 딸은 거짓말처럼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한국의 김안과에서 수술 후 완전히 시력을 되찾았다. 이 교수는 딸을 위해 학자적 신념을 버리고 기꺼이 교인이 됐다.

“딸을 위해 신과의 거래를 한 거지. 당시는 앞뒤 생각 안 했다. 그 큰 눈망울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거래는 남대문시장에서나 하는 거지. 하나님과 그러면 안 되는데 그때는 내가 워낙 급했다. 그 아이가 전화로 ‘아빠! 나 박리 아니래. 박리된 적도 없대’라며 좋아하는데, 한편으론 가슴이 철렁했다. 기뻐해야 하는 순간에 ‘휴~ 내 인생이 바뀌는구나’ 싶었다.”

딸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했다. 위암 투병으로 몸은 야위어가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뿌옇게 보이던 세상이 깨끗하게 보이고, 그토록 받고 싶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가 세상을 뜬 건, 아버지가 예약해준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서 아버지가 주문한 밸런타인데이 기념 꽃다발을 받은 이틀 후였다.

이 전 장관은 딸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가장 슬프면서 가장 행복한 이야기’라고 했다. “의사는 3개월 시한부라고 했지만

1년 반을 더 살았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오만도 자존심도 다 무릎을 꿇는데, 딸은 당당했다. 암에 당당히 맞섰고, 깨끗한 세상을 보고, 긴가민가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두 아버지(하나님과 이 땅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잘 유지했다. 땅끝의 아이들을 위해서 용기를 주고 강연을 하고 책을 3권이나 집필했다. 불행했던 삶을 행복하게 마감한 거다. 가장 불행한 순간에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삶과 죽음의 역설을 말하고 싶다.”

어느 소녀의 눈물

이어령 교수는 신 앞에 무릎 꿇고 “딸의 눈을 고쳐주시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어령 교수는 신 앞에 무릎 꿇고 “딸의 눈을 고쳐주시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81세의 노학자는 변심을 고백했다. 80세가 되면 살아온 것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요즘 마음이 바뀌었다. “정리는 무슨 정리, 써 놓은 것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잘못된 채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다. 살아있는 동안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다.

“인생에 정리가 어딨나. 은퇴가 어딨나. 오늘 하루가 나한테 새로운 건데 왜 과거를 돌아보나. 지금 아니면 못 쓸 새로운 것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새 책을 쓰기 시작했고, 방송도 다시 출연하려 한다. 오늘은 내 생애 중 처음 있는 날이다. 옛날에는 달력이 월 단위로 보였다. 그런데 차츰 일, 시, 분 단위로 쪼개져 보이더니 지금은 초 단위로 보인다.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그는 요즘 불면증을 앓고 있다. 하고 싶은 일,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잠이 안 온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벌떡 일어나 2층 서가로 달려간다. “서가에 가 보면 서론만 읽고 안 읽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 책들이 요염한 여자처럼 보인다. ‘이리 오세요~ 나 어때요~ 나 좀 봐 주세요’라며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막 손이 간다. 우연히 손 간 책을 폈는데 거기에 기막힌 문장이 나오면 ‘악!’ 소리가 절로 난다.”

그는 “한 소녀가 실망하지 않을 책을 쓰고 싶다”면서 3~4년 전 S여대에서 만난 여대생 이야기를 꺼냈다. “특강을 마치고 차를 타려는데 내 차 앞에 신입생처럼 보이는 앳된 여대생이 서 있었다. 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두 시간 동안 기다렸다고 하더라.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된다고요. 선생님이 살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하더라. 내가 들은 최고의 찬사였다. 그 소녀의 눈물을 보면서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는 “진짜 이 말만 하고 그만합시다”라면서 “오늘을 산다는 건 참 고단한 일”이라고 했다. “현실이라는 건, 오늘이라는 건 참 엄격하고 고단하고 에누리가 없다. 과거는 변명할 여지가 있고, 미래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산다는 건 다르다. 이 인터뷰도 그렇다. 안 하면 안 했지, 오늘, 지금 전 에너지를 쏟아서 인터뷰를 한다. 80이 지났는데도 20대 버릇을 못 고친다.”

그는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정말 이 말까지만 합시다”라면서 뛰듯 방을 나갔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했다.

김민희 기자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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