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소속인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 ⓒphoto AP
민주당 소속인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 ⓒphoto AP

최근 국내의 국회법 개정안 파동과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충돌을 보며 많은 사람이 미국을 떠올렸다. 세계 최초의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의 경우라면 대통령이 여당의 원내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 했다. 민주당 소속의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정당 소속 의회 원내대표인 펠로시 의원을 표적으로 삼아 그 거취를 압박할 수 있을까. 이는 과연 원론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을 구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임기를 1년 반도 남겨두지 않은 오바마 대통령이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국정과제는 2015년 말의 파리 기후변화회의에서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글로벌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과 함께,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11개국과 함께 추진해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Trans-Pacific Partnership)을 임기 내에 완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취임 첫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오바마 대통령은 정당 간 갈등이 심각한 국내 정치에서보다는 외교정책에서 자신의 업적을 축적해 가고 있다. 실제 이 두 가지 외교정책 과제를 무사히 달성할 수만 있다면 201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패배한 이후에도 레임덕을 겪지 않고 임기를 마치는 대통령으로 미국 정치사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체결을 위한 국내적 선행조치로 소위 ‘패스트 트랙’이라고 불리는 ‘신속처리권한(TPA·Trade Promotion Authority)’을 의회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11개 국가와 체결한 무역협정이 의회 내에서 수정 과정 없이 찬성과 반대만으로 표결되어 찬성이 많은 경우 즉각 비준되게 하는 권한이 대통령에게 부여되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대한 미국의 공약에 대한 신뢰를 배가시켜 상당한 난산 끝에 이제 협상의 막바지에 도달한 협정이 탄력을 받아 종착점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신속처리권한 법안의 의회 통과 과정에서 같은 민주당 소속이며 둘도 없는 정치적 동반자인 펠로시 대표가 지난 6월 12일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상원에서 패키지로 통과된 신속처리권한법안과 무역조정지원법안에 대해서 펠로시 대표가 모두 반대표를 행사함으로써 대통령의 의사에 정면으로 배치된 행동을 한 것이다. 펠로시 대표는 미국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에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노동계와 환경단체의 불만을 받아들여 과거 6년간 동고동락했던 오바마 대통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조치로 인해서 결국 6월 12일 신속처리권한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되면서 한동안 오바마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시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전망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자체가 좌초될 수 있다는 비극적인 관측이 회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비록 민주당 소속이지만 친기업 성향을 보여온 일부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혼신의 로비와 양원 다수당인 공화당 원내 지도부 및 의원들의 협력으로 약 2주가 지난 후 마침내 근소한 표 차로 신속처리권한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에 탄력을 받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최종적인 타결을 위한 오바마 대통령의 노력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을 둘러싼 오바마 대통령과 펠로시 민주당 대표 간의 대립은 비록 같은 정당 소속이지만 기본적으로 민주당 지원 세력인 노동계와 환경단체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친노동계 성향의 원내대표와, 국가적 차원에서 외교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퇴임 후 업적을 생각해야 하는 임기 말 대통령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간격이 만들어 낸 사태로 보인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이었을 때 하원의장을 지냈던 펠로시 현 원내대표는 오바마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의료개혁법안이나, 상원에서는 부결되었지만 하원에서는 통과된 기후변화법안 등 민주당 내에서도 보수 성향 의원들의 저항이 심했던 대통령의 국정 어젠다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추진해 왔던 인물이다. 펠로시 대표가 과거에 자신의 분신이 되어 원내에서 대통령에 반대하던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해온 핵심지원군이었다는 점을 회고하면, 이번의 반대표결에 대해서 오바마 대통령은 상당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6월 12일 반대표결 이후 오바마 대통령과 펠로시 대표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실망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의사에 반대하는 여당 지도부의 의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민주당 의원을 뽑아준 지역구의 경우 노동계와 환경단체의 영향력이 강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현실적 인식을 바탕으로 야당이지만 양원 다수당인 공화당 지도부의 협력 및 일부 보수 성향 민주당 의원들에게 적극적인 로비를 벌여 신속처리권한의 획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16년 대선과 함께 있을 총선을 앞두고 표밭을 관리해야 하는 친노동계 성향의 다수 민주당 의원들 및 민주당 내 다수의견을 대표해야 하는 펠로시 대표에 대해 임기 말에 접어든 대통령은 적극적인 협력에 대한 호소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런 한계를 잘 알고 여당 지도부를 압박하는 대신 우회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것이다.

따라서 한때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와 펠로시는 양자 간 이해 충돌에 대한 상호 양해가 가능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이후 6월 19일 펠로시 대표의 지역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선거자금 모금집회에 가서 “민주당이 지난 수년간 의회에서 성취한 업적은 펠로시라는 파트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그녀를 한껏 칭찬했다. 한때의 갈등이 다시 잠잠해지면서 민주당이라는 한 배를 탄 오바마 대통령과 펠로시 대표는 정치 고수답게 서로를 포용하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미국의 경우 원내에서 소수당에 머물러 있든지 혹은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든지 여당의 지도부는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여 그의 국정 어젠다를 최우선 과제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통령의 입법 성과가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호응을 얻으면 여당 소속 의원 역시 대통령 후광 효과에 의해 다음 선거에서 선전하며 재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로 대통령의 의지를 따를 경우 의원들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협소해지는 경우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미국 대통령은 결코 여당 총재처럼 원내 지도부와 의원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의 의사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법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정말 필요할 경우에는 그렇게라도 한다. 실제로는 찾아나서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회 내의 모든 잠재적 지원자를 대상으로 불철주야 로비를 벌인다. 이러한 대통령과 의회 및 원내 여당 간의 미세한 갈등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대통령과 여당이 협력은 하되 입법과 행정의 개별 영역 속에서 상호이익을 추구하고 개별 헌법기관의 권위를 존중하게 만들어온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손병권

중앙대학교 교수·정치학

손병권 중앙대학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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