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운데)와 유승민 원내대표를 만나고 있다. ⓒphoto 연합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운데)와 유승민 원내대표를 만나고 있다. ⓒphoto 연합

최근의 국회법 거부권을 둘러싼 당청 간 갈등은 한국 헌법이 갖는 근본적 한계에서 기인한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지만 국회 운영은 여야 합의에 의한 ‘연합정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흔히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함을 비유하는 말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꼽지만, 국회 선진화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대통령이 비교우위에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십수년 전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던 시절에는 제왕적 대통령이 제왕적 총재로서의 권한까지도 함께 행사했지만 제왕적 총재는 여야가 당청분리 제도를 도입하면서 2002년을 끝으로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인사권을 가진 강력한 여당 총재인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더불어 다수당인 여당을 통한 국회 지배도 종식되었다.

하지만 ‘제왕적 총재’ 종식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할 당청 관계는 지금의 국회법 파동에서 보듯 자주 파열음을 냈다. 이는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라 3김(金) 이후 첫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마찬가지였다.

당청분리 원칙에 따라 평당원 신분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노무현 대통령도 당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재집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새천년민주당을 측근들을 내세워 분당으로 치닫게 방조한 이가 바로 노 대통령이다. 내각제적 헌법을 활용하여 원내대표 선거에서 낙선한 측근(이해찬)을 한 달 만에 국무총리로 발탁한 것도, 현직 여당 당의장(정세균)을 곧바로 입각시킨 발상도 평당원 노무현이 한 일이었다. 최근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낙선한 측근(황우여)과 현직 여당 원내대표(이완구)를 입각시켰다고 비판받는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원조는 노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상반기 재보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참패하며 여소야대 국회를 맞았다. 훗날 노 대통령이 회고한 대로 대통령에게는 무척이나 갑갑한 시간이 찾아왔다. “중요한 법안의 대부분이 국회에서 발목 잡히며 혁신 관련 예산 등 대통령이 특별히 열심히 하려는 일의 예산이 대부분 깎이고 제때 통과시켜 주지 않아 전국의 행정이 새해가 되도록 계획에 차질이 생겨 버린다.”

그래서 그가 결심하고 추진한 일이 이른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다. 2005년 7월 28일 그는 여당 당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나라당이 주도하고 열린우리당이 참여하는 것”이라며 대연정의 성격을 제시했다. 제안을 받은 당사자인 한나라당의 거부로 실현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당 내부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신중식 의원은 공개 서신을 통해 “노 대통령의 편지는 과거 제왕적 총재 이상의 권능으로 당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내려보낸 칙령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또한 당 지도부를 향해서는 “의원총회 한 번 안 하고 ‘지당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며 꼬집었다. 당원들의 총의는커녕 의원들과도 전혀 상의 없이 불쑥 언론을 통해 대연정 카드를 꺼내들어 지지자들에게 한없는 좌절감을 안겨준 노무현 수석당원. 그 결과는 이후 여당의 재보선 44전 전패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급격한 지지층 이반으로 나타났다. 급기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빠른 ‘퇴임 1년 전 당적 이탈’을 결행하고야 말았다.

이명박 정권은 2007년 치러진 17대 대선에서 거둔 530만표 차의 대승을 바탕으로 당청관계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갖고 출범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4·9 총선에서 확실한 공천권을 챙긴 것이 그것이다. 공천실무를 챙기는 사무총장에 친이계 직계인 이방호 사무총장을 내세운 시스템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내뱉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라는 갈등 속에 친박계는 대거 공천에서 배제됐고 친박연대 결성과 무소속 출마를 강요당했다. 총선 결과 김무성·유기준·홍사덕·한선교 의원 등 친박 20여명이 생환했다. 여당은 정부 출범 초기 분위기와 뉴타운 광풍 속에서 당초 개헌선 확보까지 전망됐지만 개표 결과 과반의석에서 3석 초과에 그쳤다. 이후 한나라당은 2008~2009년 네 차례의 재보선에서 1승3패로 야당에 패배했고, 마침내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시도지사 16석 중 6석만을 건지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벽두부터 당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부부처의 세종시 이전 백지화를 골자로 하는 세종시특별법 수정안을 발표한다. ‘여당 속 야당’이던 박근혜 전 대표는 즉각 반발하였고, 지방선거 참패 한 달 뒤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이 안건을 직접 반대토론까지 해가며 여유 있게 부결시켜버렸다. 18대 국회는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불과 81석으로 개원했지만 이처럼 여당 내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이 충돌하면서 해머, 최루탄 등이 난무하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국회로 해외토픽에 가장 많이 소개됐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여당 원내대표 사퇴 요구는 어떤 맥락일까. 박 대통령이 자초한 일이지만, 현재의 국회 선진화법 체제 아래에서는 여소야대와 흡사해 야당의 도움 없이는 한 건의 의안 처리도 불가능하다. 19대 총선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공천을 주도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김무성·이혜훈 의원 등을 읍참마속한 것이 결과적으로 오늘의 화(禍)를 불러온 원인이 되었다. 지금 새누리당 안에서 대통령 편인 친박계는 소수파로 전락해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집권 초반처럼 인기가 높은 것도 아닌 데다 여당의 당론이 오픈프라이머리로 정해졌으니, 공천권도 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믿고 인사권과 법률안 및 예산안 의결권 등을 단단하게 지켜줄 수호신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남은 임기 국정에만 매달려도 모자랄 텐데 번번이 국회로부터 제동이 걸리자 여당의 협조가 부실했다고 인식한 사건이 바로 이번 거부권 파동이다.

사실 한정된 여권 내 인재풀 속에서 사람을 구하려다 보면 촘촘한 도덕성 검증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중립적인 인사는 국정철학이 맞지 않고 학자들이 거론하는 거국내각도 야당의 협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의혹 덩어리와 흠이 많은 인물을 계속해서 내놓는 것을 마냥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지난 5월 여야가 합의한 공무원연금개혁안도 박 대통령은 무척 불만스럽다. 야당의 요구라는 이유를 들어 국민연금법까지 빅딜한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전후사정을 감안한다면 국회법 개정안이 왜 박 대통령의 화를 돋웠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이후부터는 여당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새누리당 3차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대표가 선출되고, 올해 초 청와대가 염두에 둔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누른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실제 당의 투톱이 모두 비박으로 채워졌다. 윤상현·주호영·김재원 등 현역의원 3인의 대통령 정무특보 위촉은 바로 유승민 원내대표 선출 직후에 이루어졌으니 박 대통령의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비박계 정의화 의원이 더블스코어 차로 국회의장까지 차지한 형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회, 대여당 전략은 매우 난감했으리라. 지금 임기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부터 대통령 탈당이 거론되고, 자기 편이 돼줄 수 있는 유력한 여당 차기 주자는 별로 안 보이며, 사실상의 여소야대 정국이고 보면,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겪었던 상황과 흡사하다.

시간을 3김 시대로 되돌려 보자. 한국 국회사를 보면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고 다당 체제였던 13~15대 국회는 비교적 생산성이 높았다. 13대 국회의 경우 1노(盧)3김(金)의 지역 분할구도에 의해 성립된 왜곡된 다당제이자 여소야대였지만 많은 입법 성과를 남겼다. 예컨대 국회법을 개정하여 의정활동에 대한 중계방송을 허용함으로써 전 국민에게 입법부의 활약상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청문회제도를 도입하여 5공 비리와 광주학살의 주범들을 TV 화면에 세운 것도 바로 13대 국회였다. 16년 만에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를 부활시켜 강력한 행정부를 견제하는 일에 앞장선 것도, 독재정권 유지에 활용되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집회 및 결사의 자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여야 허니문 기간은 채 2년이 가지 못했다. 여소야대 정국 타개를 위해 노태우 대통령이 민정당 총재 자격으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함께 1990년 1월 3당 합당을 이끌어내 216석의 공룡 여당을 만들어버렸다. 노태우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대법원장(정기승) 동의안이 부결되고, 오랜 친구이자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문회장에 서면서 야권 3당을 견제하고자 비밀리에 보수 대연합을 추진했다. 3당 합당은 선거 민의를 왜곡한 명백한 정치 쿠데타였다. 이후 민자당은 2석을 더 늘리며 의석 점유율을 전무후무한 72.9%(218석)까지 늘렸으나 14대 총선에서 과반수 획득에도 실패하며 유권자의 심판을 받고야 말았다.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이 3강을 형성하여 또다시 여소야대를 불러온 15대 국회도 13대 못지않은 족적을 남겼다. 우선 1988년 국정조사 부활 이후 가장 많은 23건의 활발한 국정조사 요구 건수와 역대 최대인 청문회 개최 건수(44회·인사청문회 제외)를 기록하였다. IMF 외환위기, 한보사건, 언론대책문건 진상규명 등의 특별위원회를 여야 합의로 구성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옷 로비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미진하자 헌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제를 도입한 것도 바로 15대 국회였다. 여야 3당은 입법 활동에도 매우 의욕적으로 나섰는데 의원발의 법률안이 총 1144건에 가결안건만 461건이다. 생산성이 무척 높았던 13대 국회의 570건 발의, 171건 가결과 비교해도 엄청난 증가세이다.

그렇지만 15대 국회도 임기 중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큰 홍역을 치르게 된다. 15대 대선 전 신한국당은 민주당을 흡수,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꿨고 의석도 165석까지 불렸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열린 1998년 정기국회 때 한나라당 의석은 140명으로 크게 감소하였고 국민회의는 101명, 자민련이 52명으로 대폭 증가해 버린다. 이에 따라 공동 여당은 52.8%로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였다. 의원 빼가기 등의 무리수를 둔 덕분이었다. 여당 의석 증가가 무려 32석이었으니 사실상의 정계 개편이다. 하지만 국민회의·자민련 공동 여당은 16대 총선에서 133석을 얻은 한나라당에 패배했다. 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도 바꾸고 젊은 피와 시민운동가들을 대거 투입했지만 115석에 머물렀다. 한때 55석까지 갔던 자민련도 교섭단체에 미달, 17석에 그쳤다. 역시 민심은 따가운 것이었다.

어쨌든 제왕적 총재 체제이자 다당제였던 13~15대 국회는 역설적으로 의원입법의 가결비율이 30%(13대)~40.3%(15대) 수준이었고 정부입법도 80~90%대 통과비율을 보이며 생산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당청분리가 시행되고 양당체제가 고착된 17대 이후 국회는 우연히도 생산성까지 함께 낮아졌다. 최초로 양당체제가 성립된 16대 국회는 의원입법의 가결비율이 그래도 27% 수준에는 도달했지만 17대부터는 최악이었다. 비교적 젊고 전문가들이 대거 유입된 17대 국회는 이전에 비해 3배 이상의 의원발의 법률 건수를 기록했지만 고작 21.2%의 통과비율을 남겼다. 이는 개원 1년 만에 뒤바뀐 여소야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이 13~15대 국회에서 경험한 연합정치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탓이 가장 크다. FTA 비준동의안과 예산안 처리 등을 번번이 힘으로 밀어붙인 18대 국회는 야당의 빈번한 장외투쟁과 함께 더욱 낮은 생산성을 보였다. 무려 1만2220건의 의원입법을 접수했지만 가결비율은 겨우 14%에 불과했다.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도 41%만을 통과시켜 유일하게 50% 미만을 남긴 국회였다. 게다가 개원 전부터 시작된 여당 내부의 차기 권력다툼으로 인해 국정은 더욱 엉키고 말았다.

대한민국 국회사를 돌이켜보면 10월 유신의 한복판에서 자라며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정을 경험한 박근혜 대통령이 꼭 기억해야 할 대목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87년 이후 단임 대통령들의 여당을 통한 국회 지배, 즉 제왕적 시도가 모두 좌절했던 것처럼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쿠데타도 결국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7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버텼을 따름이다. 최후의 승리자는 오로지 ‘의회주의’뿐이다. 국회사가 남긴 교훈이다.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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