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증권사인 A사의 지점에 근무하는 최철 차장(가명). 증권사 14년차 차장이라고 하면 남들은 휘하에 부하직원을 우르르 거느리고 우아하게 근무하는 줄 안다. 현실은 전혀 아니다. 문서 복사와 생수통 나르기는 죄다 최 차장 몫이다. 우편물 배달과 빈자리 전화받기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일상 업무. 잘나가는 이 증권사의 차장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유는 부서 내 신입사원을 뽑지 않아 그가 가장 말단이기 때문이다. 이 증권사의 다른 부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부서 내 말단직원이 과장인 곳이 널렸다. 이 회사는 지난해 ‘차장님 천하’가 됐다. 2012년만 해도 평사원이 차장보다 많았으나 2013년 비슷해지더니 급기야 지난해 역전됐다. 차장의 수(710명)가 일반사원(669명)을 넘어섰다. 이 회사 측은 내게 보도를 하되, 회사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굴지의 대기업 계열 보험회사인 B사도 상황이 비슷하다.<표 1 참조> 기업 내 인력 구조의 고령화 속도로 보자면 A사보다 한발 앞서 있다. 2012년에 이미 차장 수(25.5%)가 사원(23.2%)을 앞질렀고, 8년 후에는 ‘부장님 천하’가 예고돼 있다. 2012년 구성원의 6.8%이던 부장 직급자가 2016년에 12.6%, 2020년에는 21.2%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원(17.2%), 대리(19%), 차장(21.1%)보다 많은 수다. 과장급 이상 시니어 인력이 무려 63.8%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두 회사의 인력구조는 깔때기형으로 치닫고 있다. 깔때기형 인력구조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아 청년 인력은 적고, 시니어 인력으로 채워진 구조다. <표 1>을 보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임직원을 거느린 대기업 C사도 2012년 이후 불과 8년 만에 깔때기형이 되는 게 뚜렷하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경제전문가 A씨는 주간조선에 “사회 구조가 전반적으로 깔때기형으로 가고 있다. ‘깔때기형’만으론 표현이 부족하다. 깔때기보다 아래 기둥이 긴 와인잔 내지 칵테일잔형으로 가고 있다”며 “깔때기형은 심각한 사회 전반적 위기를 초래한다. 다행히도 한국은 깔때기형 초기인데, 빨리 시스템 전환을 서두르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을 맞게 된다”라며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장상수 일본 아시아대학 교수(경영학과)가 느끼는 위기감은 이보다 더하다. 그는 지난 7월 21일 주간조선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의 현재 상황은 매우 위태롭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인구구조와 고용구조가 없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닮아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진행속도가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는 거다.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 전체의 인구구조가 역삼각형 내지 깔때기형으로 가게 되면 한국 사회 전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

대우증권 홍성국 사장은 자신의 책 ‘세계가 일본된다’(메디치)에서 “현재 한국은 골든타임에 진입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임금구조 및 인구구조가 유발하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해결하지 않으면 ‘전환형 복합불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 홍 사장은 “한국은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 금리, 물가, 투자의 하락속도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빠르다”면서 “준비되지 않은 채 전환형 복합불황에 빠지면 타격의 폭이 더 크다”고 개혁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박근혜 대통령, 노동개혁 강조

정부 측에서도 개혁의 시급성을 절감하는 분위기다. ‘노동개혁’이 박근혜 정부의 핵심국정운영 과제로 급부상했다. 지난 7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참석, 4대 개혁(공공·노동·금융·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특히 ‘노동개혁’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노동개혁을 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어둡고 특히 미래 세대에게 빚을 남기게 돼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힘들고 고통의 반복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표를 잃을 각오로 노동개혁을 추진하겠다며 노동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청년실업과 고령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첨단기술의 발달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로 출산을 꺼리는 건 전 세계의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한국이 당면한 중차대한 과제가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임금피크제 시행으로 불거지는 노동시장의 대혼란이다. 전문가들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게 됐다며 큰 우려를 표명한다. 이지만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주간조선에 “임금피크제 시행은 시기상조다”라며 “한국이 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시기는 2017년이다. 2017년에 임금피크제를 입법화한 후 2021년부터 시행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인구구조와 고용구조의 엇박자로 노동시장이 혼란을 빚고 사회구조적 갈등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얘기다. 퇴직이 예정된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가 임금피크제의 시행으로 퇴직이 늦춰지면서 기업 측은 고령노동자의 인건비 부담을 떠안게 됐다. 결과적으로 신입사원 고용을 더욱 기피하게 되고 ‘청년고용 절벽’ 현상은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근속연수만 채우면 임금이 확확 올라가는 ‘호봉제’가 기업에 인건비 부담을 떠안기는 큰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내가 깔때기형 인력구조를 취재하면서 접한 가장 충격적인 자료는 ‘각국의 근속연수별 임금격차’(한국노동연구원)였다.<표 2 참조> 한국의 초봉과 말봉의 임금격차는 무려 313.3%다. 세 배가 넘는 수준으로 세계 최고다. 30년차 시니어 인력 한 명의 임금으로 신입사원 세 명 이상을 채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가장 격차가 적은 나라는 110.8%인 스웨덴으로 신입사원과 30년차 장기근속자의 임금격차가 거의 없다. 프랑스(146.3%), 이탈리아(152.7%)도 초봉과 말봉의 격차가 적은 편이다. OECD 국가 중 호봉제를 택한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 전부인데, 일본(241.6%)과 비교해도 한국의 임금격차가 매우 크다. 한국보다 고령화 문제를 먼저 직시한 일본은 호봉제 위주였던 임금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중이다.

장상수 일본 아시아대 교수는 “한국의 호봉제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데 현 시점에서는 맞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호봉제는 고성장 중인 국가에서는 효율적인 임금체계다. 경제 성장속도와 맞물려 무리가 없고, 노동자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차원에서도 걸맞는다. 하지만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돌아서는 시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한국은 IMF외환위기 사태 이후에 문제가 생겼고, 일본은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노동연구원 정진호 박사의 의견도 비슷하다. 정 박사는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임금의 연공성이 현저히 높고 노동력의 고령화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크다”며 “기존 근로자의 임금체계 조정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제약요인을 완화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국의 경제 상황에 맞지 않는 호봉제를 폐지하고 성과에 따라 승진하고 연봉을 받는 ‘성과연봉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의하면 국내 기업의 임금체계는 연공급제(연봉제) 62.7%, 직능급제 17.7%, 직무급제가 13.2%의 비율이다. 임금의 연공성은 전문직과 사무직이 많은 금융업 및 공공 부문에서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직능급제 및 직무급제를 표방한 연봉제라도 현 상황에서는 ‘무늬만 연봉제’인 경우가 대다수다. 매년 연봉계약을 갱신하지만 호봉제 임금체계에 준한 인상률을 적용하는 것이다.

깔때기형 진행 속도, 전문가 예상보다 빨라

한국 기업의 인력 구조가 깔때기형으로 치닫는 속도는 매우 빠르다. 전문가들이 예상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다. 앞서 깔때기형 인력구조의 사례로 언급한 세 개의 기업은 2012년 당시와 같은 직원 채용이 향후 계속될 때 인력구조가 우려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2013년 이후 기업의 신규채용 규모를 보면 더 암울하다.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의 좋은일연구소가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매년 조사하는 ‘대기업 대졸 정규 신입직 채용 현황’ 자료를 보자.<표 3 참조>

매출 순위 500대 기업은 2013년까지는 신입사원 채용을 늘려가다가 이후 2년간은 확 줄였다. 2014년에는 2013년에 비해 무려 30% 가까이 줄였고(2만1933명→1만5610명), 2015년에도 10% 이상 줄였다.(1만5610명→1만4029명)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신규채용 규모가 줄었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표 1>보다 더 깔때기형에 접근했다. ‘한국의 인구구조와 인력구조 변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우려한 두 전문가(장상수 교수, 홍성국 대우증권 사장)의 의견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금융사가 다른 업종에 비해 유독 깔때기형 구조가 빠르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자료를 보면 오히려 반대다. 깔때기형 구조는 ‘노동시장 고령화’와 통한다. 고용노동부의 산업별 고령화 지수를 보면 △광업 △운수·창고 및 통신업 △부동산 임대 및 사업 서비스업 △전기·가스 및 수도사업 △건설업 순이다. 금융 및 보험업, 제조업은 고령화 지수가 낮은 편이다. 종합하면 앞서 <표 1>에서 소개한 깔때기형 구조보다 한국 사회 전반의 깔때기형으로의 흐름은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깔때기형 인력구조는 얼마나 위험할까. 장상수 교수와 이지만 교수는 둘 다 ‘부양인구의 증가’를 가장 심각한 문제로 거론했다. 인력구조와 인구구조는 나란히 가는 부분인데,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의하면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6년 3704만명(전체 인구의 72.9%)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인구로 진입하는 2020~2028년에 급격히 감소한 후 2060년에는 2187만명(전체 인구의 49.7%) 수준으로 감소할 전망이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젊은층이 부양해야 할 노인인구가 증가한다. 장 교수는 “2060년이 되면 한국의 고령화율은 일본을 넘어선다. 현재는 5.6명이 한 명의 노인을 부양하는 구조지만 2060년에는 1.2명이 한 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며 “그렇게 되면 조세부담이 엄청나다. 번 돈의 절반을 노인인구 부양을 위해 내는 셈이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우수한 인력이 세금 폭탄국이 되는 한국에 있으려 하겠나”라는 날선 지적을 했다.

‘젊은 인력의 공백’은 회사 발전에 치명적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 트렌드에 민감하고 창의적 사고로 무장한 ‘젊은 피’는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꼭 필요하다. 특히 최근처럼 소프트웨어 위주로 흐르는 시기에는 더욱 젊은 인력이 중요하다. 시대 변화에 유연하지 못한 하드웨어식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1990년대 일본은 현재의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인건비 부담으로 청년 인력을 채용하지 않아 깔때기형 고용구조가 됐다. 그 결과 2000년 전후 고도로 성장하는 브릭스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대대적인 기회가 열렸음에도 준비된 인력이 없었던 일본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사내 고령인력 대부분은 어학과 의욕, 창의력 면에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브릭스 진출 실패는 장기불황으로 이어지는 결정타가 됐다.

깔때기형 인력 구조는 미시적으로는 기업 내부의 ‘인사 적체 현상’과 ‘조직의 활력 저하’를 초래한다. 고령자들이 은퇴하고 나면 그들을 대체할 인력이 없어 기업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현재 발등의 불을 끄느라고 재깍재깍 다가오는 미래의 위험을 돌볼 여유가 없어 예상되는 일이다. 또 고령자 인건비 부담으로 청년 고용을 꺼리면서 발생하는 ‘세대 간 갈등’, 이로 인한 ‘집단 불안’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분노 사회’의 씨앗을 만드는 셈이다.

경제전문가 A씨는 색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깔때기 윗부분을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가치관과 소비패턴에 주목한다. 이 세대는 사회적 부와 소득이 집중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소비를 줄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 결과 내수소비를 위축시켜 경제성장을 저해한다. 그 이유에 대해 “베이비붐 세대는 고성장·고물가·고금리 시대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다 보니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내 세대는 어려웠다. 나는 꽁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의식이 뿌리박혔다”고 설명했다. 돈을 가진 이들 계층이 돈을 풀지 않아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성장정체를 넘어 사회 전체가 축소지향으로 흐르게 됐다는 얘기다.

홍성국 대우증권 사장이 ‘세계가 일본 된다’에서 내다본 한국과 세계 경제의 미래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홍 사장은 “한국은 전 세계 국가 중 전환형 복합불황에 대한 인식이 가장 낮다”며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명한다. “한국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3~4년 사이 한국은 성장이 멈춘 갈등 공화국이 되었다. 방향성을 상실했다.… 일본은 25년째 장기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적 측면의 불황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사회로 진화하고 있다. 이른바 전환형 복합불황이다. ‘전환’은 성장시대의 종말이다. 독일은 전환형 복합불황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보여주는 사례다. 시간제와 임시직 근로자들의 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직업훈련제도를 개선하는 등 사회 전체가 효율적·합리적 소트프웨어를 갖추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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