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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9호] 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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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70년]한국 생존피해자 2584명 당신들을 기억합니다

황은순  차장  / 강달해  인턴기자·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년  

▲ 합천 원폭피해자 1세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일본 히로시마시 저금국(貯金局) 2년차 여직원 이수용은 막 사무실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인이 금융공무원인 저금국 직원으로 취업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모범생으로 고등부를 졸업한 이수용은 다행히 학교 추천을 거쳐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만원 전철에 시달리다 보면 지각하기 일쑤였는데 이날은 다행히 사무실에 일찍 도착했다. 창문 옆에 있는 의자에 막 앉는 순간 불꽃이 번쩍했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시 시마병원 상공 580m에서 투하된 직후였다. 저금국은 시마병원에서 1.5㎞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날 폭탄 투하 지점에서 반경 0.5㎞ 이내에 있던 사람들은 96.5%가 사망했고, 0.5~1.0㎞는 83%, 1.0~1.5㎞는 51.6%가 목숨을 잃었다.
   
   같은 시각 히로시마 변두리에 살던 18살 새댁 김일조는 미쓰비시 공장에 다니는 남편을 배웅한 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처녀들은 정신대에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면서 집안에서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부모님은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곡식이며 야채를 주로 팔았다. 주변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근처에만 50가구가 모여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와 동생은 방에 있고 부엌에 있던 김일조는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쾅’ 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와르르 집이 무너졌다.
   
   16살 안월선은 히로시마에 있는 군인들 쌀 배급소에서 일했다. 아침부터 적색경보가 울리고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난리였다. 그 통에 전차가 늦어 지각을 했다. 여름인데도 머리에는 솜으로 누빈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공습에 대비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헐레벌떡 회사 정문에 들어서면서 모자를 벗는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건물이 무너지면서 자신을 덮쳤다. 시계가 8시15분을 가리키는 것을 막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수용(1928년생), 김일조(1928년생), 안월선(1930년생), 70년 전 원폭이 히로시마를 죽음의 땅으로 만든 순간 현장에 있었던 세 사람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살고 있다. 16, 18세의 꽃다운 청춘은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다. 복지회관에는 세 할머니를 비롯해 피폭 피해자 101명이 살고 있다. 이들 외에도 합천군 내에는 650여명에 이르는 피폭 1세들이 생존해 있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을 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티니안도 미군기지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폭에 피해를 당한 사람은 69만1500명, 사망자는 23만3167명에 달했다. 한국인 사상자는 7만여명(히로시마 5만명, 나가사키 2만명), 그중 사망자는 4만명(히로시마 3만명, 나가사키 1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폭으로 인한 전체 사망자 중 약 20%가 한국인이다. 전체 피폭자 대비 사망률을 따지면 일본인(30%)보다 한국인(57%)이 훨씬 높은 셈이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전역에 거주한 한국인 숫자는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된 1938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해 200여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피폭 생존자 3만여명 중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2만300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은 목숨 거둬 쫓기듯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들을 맞은 것은 멸시와 소외였다. 그중 90%는 가난과 싸우고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2015년 현재 한국에 생존해 있는 사람은 2584명(한국원폭피해자협회 등록 기준)이다. 특이한 점은 그중 25%가 합천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원폭피해자복지회관’(1996년 설립)을 비롯해 ‘합천 평화의 집’(윤여준 원장·2010년 설립),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한국원폭2세 환우회’(2002년 설립) 등 관련 단체도 이곳에 몰려 있다.
   
   지난 8월 3일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리는 합천을 향했다. 서울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꼬박 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먼저 고백하자면 취재를 하기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원폭피해자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합천에만 650여명에 이르는 원폭피해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합천이라는 지명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해인사가 전부였다. 주변의 반응도 하나같이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피폭자가 그렇게 많았나?”
   
   “합천? 합천과 원폭이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이 질문이 현재 우리나라 원폭피해자들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만큼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는 지난 70년 동안 외면당해 왔다. 정부 차원에서 지금껏 명확한 실태조사 한 번 한 적이 없다. 관련법은커녕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도 미미한 실정이다. ‘합천 평화의 집’은 잊혀진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2012년부터 ‘합천 비핵·평화대회’를 열고 있다. 올해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을 하루 앞둔 지난 8월 5~6일 합천읍 황강변과 원폭피해자복지회관 등에서 ‘원폭피해자,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주제로 제4회 합천 비핵·평화대회를 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지만 원폭피해자들에게는 ‘광복 70년’ 이전에 ‘원폭 70년’이다.
   
   먼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를 찾아 합천과 원폭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었다. 원폭피해자협회는 1967년에 처음 결성됐다. 합천군 보건소 내에 있는 협회 사무실 벽에는 원폭 피해의 참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사진들이 죽 붙어 있었다. 합천 지부장을 맡고 있는 심진태(72)씨도 원폭피해자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피폭 당시 두 살이었다. 다행히 집이 원폭지로부터 3.5㎞ 떨어진 곳이어서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심 지부장은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중 부산·경남 출신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합천 출신이 많은 것은 합천의 척박한 환경 탓이라고 말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농지가 절대 부족한 데다 그나마 쓸 만한 것은 일본이 다 뺏어갔어요. 앉아서 굶어죽게 생기다 보니 살길을 찾아 히로시마로 건너간 거죠. 부산항에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가 있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사람이 야마구치현 바로 옆에 있는 히로시마로 많이 갔어요. 배급을 주니 굶어죽지는 않잖아요. 또 군수공장 등이 있어서 일자리가 많다 보니 고향 가족들을 하나둘 불러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또 그 사람들이 사돈에 팔촌까지 불러들이고, 그러다 보니 합천 사람들이 대거 히로시마로 몰려 간 겁니다. 그래서 합천 지역 원폭피해자들은 남이 없어요.”
   
   심 지부장에게 히로시마로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문젭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실태조사 한번 안 했습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7만명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일본 내무성 경보국 자료를 보니 한국인 피해자가 10만명이라고 돼 있어요. 그중 5만명이 죽고 살아남은 5만명 중 4만3000명이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어요. 일본은 수십 년 전부터 실태조사를 했기 때문에 그쪽 자료가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내에 있는 위령각에는 원폭피해자 1044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심 지부장은 9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원폭피해자였던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국전쟁 중에 34세로 목숨을 잃었다. 어린 소년가장은 먹고살기 바빠 원폭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1972년인가 핵병기금지조약기구협의회에서 일본 의사들이 합천에 원폭피해자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합천으로 왔습니다. 약을 한 보따리 싸와서 주는데 그냥 먹었지요. 그 후로도 와서 진료를 해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원폭이다 뭐다 알게 됐어요.”
   
   심 지부장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것”이 우리나라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라고 했다. 전임 지부장 일을 도와주다 협회 일에 엮였다는 심 지부장은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도 커졌다. 그만큼 쌓인 말들이 많은 듯했다. “전범인 일본도, 원폭을 터뜨린 미국도, 국민을 챙겨야 할 정부도 침묵과 무관심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 지부장은 미국과 일본에 사죄와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지난 4월 UN본부에 다녀왔다고 했다. “UN에 가서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10만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일본, 미국의 사죄를 요구하고 한국 정부에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원폭피해자와 한국인 피해자를 같이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왔습니다. 전범국인 일본의 희생자와 우리처럼 강제로 끌려가서 희생된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재물이었습니다. 국가가 힘이 없어서 국민들이 일본에 재물로 바쳐졌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껏 실태조사 한번 안 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가난하고 몸이 아픈 것이 힘든 게 아닙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현재 국회에는 새누리당 김정록·이재영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이학영 의원 등이 ‘원폭피해자 및 피해자자녀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이다. 17대(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 대표발의), 18대(조진래 한나라당 의원 대표발의) 때도 법안을 발의했지만 소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폐기됐다. 그나마 지난해 국회에서 ‘원폭피해자 증언대회’가 열리고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여는 등 진전이 있지만 19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원폭피해자 1세대 대부분이 80, 90대의 고령이다. 당시 태아였던 피해자도 70대가 됐다. 8월 5일 ‘비핵·평화대회’가 열리는 합천 황강변 공원에는 합천 원폭피해자들이 원폭 투하 당시 눈으로 목격한 참상을 그린 그림이 걸렸다.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어설픈 솜씨로 그린 그림 속에는 불기둥이 솟고, 버섯구름에서 검은 비가 떨어지는가 하면, 강에는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림은 ‘평화의 집’에서 지난해부터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심리치료의 결과물이다. 매주 한 번씩 그림을 그리면서 피해자들이 70년 동안 묻어놓았던 상처들을 조금씩 끄집어내고 치유하는 중이었다. 합천 평화의 집을 방문해 전시를 위해 준비한 그림들을 미리 볼 수 있었다. 합천 평화의 집은 원폭피해자 2세 환우들의 쉼터를 내걸고 민간단체들이 힘을 모아 2010년 만들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쉼터의 역할은 아직 하지 못하고 ‘비핵·평화대회’ 개최, 특별법 추진 운동 등 피해자들의 활동 지원을 돕고 있다.
   
   ‘평화의 집’에서 심리치료 등을 돕고 있는 안재은씨는 “그 당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분이 많다”고 했다. “그만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거죠. 지난해 6월부터 시작해서 1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조금씩 마음을 여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기억하기 싫지만 후세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십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나마 과거를 증언해 줄 사람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폭 피해는 2세, 3세에 대물림되고 있다
   
   원폭피해자 문제는 1세에 그치지 않는다. 1세의 문제는 고스란히 2세, 3세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원폭피해자 2세는 1만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인된 사람은 ‘원폭2세환우회’에 등록된 1300여명뿐이다. 사회적 편견에 따른 불이익, 결혼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우려해 자녀들에게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원폭피해자 2세들도 밝히기를 꺼리다 보니 실태를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2004년 국가인권위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의뢰해 실시한 원폭피해자 1·2세에 대한 건강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세의 건강 문제는 심각하다. 원폭피해자 1092가구 자녀 4080명 중 7.3%인 299명이 사망했고 그중 52%가 10세 미만이었다. 사망원인도 불명·미상이 과반수를 넘었다. 우울증은 일반인의 71배, 심근경색·협심증은 89배, 빈혈은 88배로 나타났다. 2013년 경남도가 실시한 실태조사에서도 20.2%가 자녀에게 선천성 기형 또는 유전성 질환이 있다고 답변했다. 원폭피해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점은 출산, 자녀 건강 등 유전적 불안감이다.
   
   원폭피해자 1세의 경우 한국 정부로부터 월 10만원의 건강관리수당과 일본 정부의 재외피폭자지원대책사업에 따라 의료지원, 원호수당(1인당 1만6000~13만5000엔) 등을 지급받고 있지만 2세의 경우는 지원은커녕 피해자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폭피해자 2세의 문제는 피해의 범위를 확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간단치가 않다. 방사능의 유전적 영향을 인정한다는 것은 2세, 3세에 대한 책임을 무한정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원폭피해자 2세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2세 환우인 고 김형률씨의 피 맺힌 외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형률씨의 어머니는 히로시마 후나이리마치에서 태어나 피폭 당시 6살이었다. 김형률씨는 쌍둥이였다. 동생은 생후 22개월 만에 폐렴으로 죽고, 김형률씨도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한 채 줄곧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30살이 돼서야 한국에 2명 밖에 없는 희귀난치병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김형률씨는 자신이 원폭피해자 2세라는 것을 인식했다. 폐기능의 70%를 잃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김형률씨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2002년 3월 기자회견을 통해 국내 최초로 원폭피해자 2세 환우임을 밝히고 전국을 다니며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조직했다. 시민단체들도 이때부터 원폭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가 2004년 국가인권회가 실시한 2세들의 기초 현황과 건강실태조사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2세 환우들의 대책마련을 위해 뛰었던 김형률씨는 2005년 도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의 발표를 마지막 활동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도 피해자 1세다.

   피해자 1세들의 가난과 피폭 후유증을 그대로 물려받은 2세들의 사연은 숱하게 많다. 한국원폭2세환우회에 등록된 회원 중에는 5남매 중 3남매가 이유 없이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가족이 있다. 3남매 중 형과 동생이 자라면서 서서히 시각과 청각을 잃은 경우도 있다. 2세대에는 아무 증세가 나타나지 않다가 3세대에서 다운증후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한 환우는 30대 초반부터 근육이 마비되는 증상을 보이다 혀까지 굳게 됐지만 병원에서는 병명도 원인도 알 수 없어 치료를 할 수 없다는 말만 했다. 원인 모를 피부병으로 온갖 고생을 한 2세는 나중에야 아버지가 원폭피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2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11년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이후라고 한다. 방사능 후유증에 대한 인식이 퍼지면서 2세 문제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쉬워진 것이다.
   
   
   일본으로 추모하러 가야 하는 한국 피해자들
   
   일본에서는 원폭피해자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8월 6일은 히로시마 원폭의 날, 8월 9일은 나가사키 원폭의 날이다. 올해도 지난 8월 6일 히로시마 추모식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해 세계 100여개국에서 사절단이 참석, 사상 최대 규모의 추모행사를 치렀다. 반면 8월 5~6일 열린 합천의 비핵·평화대회는 원폭피해자들과 지원 활동가·일본 시민단체 등 300여명이 참석해 조용히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히로시마 추모행사에는 한국의 피해자들도 매년 참석하고 있다. “오늘 피해자 2세 2명과 1세 2명이 히로시마로 떠났습니다. 우리나라 원폭피해 사망자가 10만명인데 추모시설 하나 제대로 없어 일본까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 말이 됩니까.” 심 지부장의 핏대가 또 올라갔다. 원폭피해자들의 숙원 사업 중 하나가 추모공원 건립이다. 협회는 2008년 합천군청과 함께 세계평화공원을 합천에 조성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외부 용역을 통해 기본 설계안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을 이곳에 모셔야지 왜 일본에 둡니까. 한국의 히로시마인 합천에 자료관과 교육장을 만들어 놓고 세계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야 합니다. 사실 합천 학생들도 원폭을 모릅니다. 피해자 1세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자료로 남겨 원폭이 얼마나 무서운지 세계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정부는 뭘 하는지 세계평화공원 조성계획을 각 부처에 모두 보냈는데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공인배 관장도 “일본은 기념공원이다 추모시설이다 크게 지어놓고 자신들이 마치 피해자인 양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국인 피해자가 10만명이 넘는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문제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에 추모시설을 지어줘야 합니다. 핵에 대한 경각심도 불러일으키고 피해자들의 희생을 기렸으면 좋겠습니다. 정부는 일본의 사죄와 피해배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는 위령각이 있다. 이곳에는 1044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복지회관은 1990년 한·일정상회담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복지사업을 위해 한·일 양국이 각각 40억엔을 지원하기로 합의, 그중 일부를 투입해 1996년 개관한 것이다. 피해자들이 고령인 만큼 위패의 수는 빠르게 늘어갈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비극, 위안부의 눈물 뒤에 또 다른 눈물이 있다는 것을 그동안 우리는 잊고 살았다. 세상의 무관심, 정부의 무책임, 가해자의 침묵, 피폭의 후유증에 맞서 피해자들이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속절없이 70년이 흘렀다. 이제는 우리도 이들의 짐을 나눠 져야 한다. 그 첫걸음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원폭피해자, 당신들을 기억합니다.”


   
“1945년 8월 6일 8시15분 우리는 히로시마에 있었다”
   
▲ 김일조 할머니(좌) 이수용 할머니(우)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8월 3일 찾아간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는 비극의 현대사가 생생한 육성으로 살아있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11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에는 현재 원폭피해자 1세 101명(남 29명, 여 72명)이 살고 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80.4세, 최연소자는 71세이고 최고령자는 94세이다. 점심식사가 끝난 오후 널찍한 2층 휴게실에 할머니 수십 명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 경로당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지만 이날 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몇 차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켜야 했다.
   
   
   “명태 껍질처럼 피부가 벗겨진 사람들이 귀신처럼 걸어다녔어”
   
   조선인에게는 좀체 기회를 주지 않는 일본 저금국에 다니던 이수용(88) 할머니. 원폭이 떨어진 순간 평소 훈련받은 대로 책상 밑으로 몸을 던졌다. 얼마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세상이 지옥이었다.
   
   “책상도 사람도 열폭풍에 날아가고 나는 맨발로 피바다에 누워 있었어요. 머리는 산발이고 얼굴은 유리에 찢기고 다리는 큰 유리조각이 박혀 피가 솟구치더라고. 여기저기 죽은 사람들이 엎드려 있었어요. 금방 인사를 나눴던 동료들인데. 기다시피 2층 사무실에서 계단을 내려와 방공호 쪽으로 갔더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오카상, 오카상(엄마)’ 울고불고 난리였어요. 공습에 대비해 대나무 꼬챙이로 찌르고 대피하는 훈련을 숱하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디다. 허벅지를 묶어 지혈을 하고 거리로 나와 보니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귀신들 같았어요. 그날따라 날씨는 얼마나 좋은지.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검은 비가 쏟아져 내렸어요. 시내는 온통 불이 타오르고 있고. 마치 명태 껍질처럼 벗겨진 피부가 손끝에서 덜렁덜렁해요. 머리는 번개를 맞은 듯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자기 몸에서 벗겨진 피부를 밟아 픽픽 쓰러지면 그 자리가 죽음 자리라. 강에 가보니 새카맣게 탄 사람들이 고개를 박고 있었어요. 독가스를 마신 사람들이 목이 타거든.”
   
   이씨는 근처 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부대의 중상자 후송용 배를 탈 수 있었다. 근처 섬에서 치료받으며 5일이 지나자 오빠가 수소문 끝에 찾으러 왔다. 아버지는 다리를 절고, 건설현장에 다니던 큰오빠는 건물이 무너져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독가스를 마신 둘째 오빠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62세에 고통의 삶을 마감했다. 그해 12월 ‘처녀들 다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한국으로 끌려왔다.
   
   “그때 한국에 안 나오고 저금국에 계속 다녔으면 이렇게 고생하고 살진 않았을 텐데….”
   
   이씨는 회한이 큰 듯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삶은 힘들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금국에서 엽서가 왔다. ‘2년 내에 돌아오면 복직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1995년 50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보니 직원들이 두 줄로 서서 이씨를 맞더란다. 오래전 선배에 대한 예의였다.
   
   “자기들이 사죄한다면서 억울하게 됐다고 고개를 숙입디다. 혹시 보증 설 일이 있으면 근무확인이며 필요한 서류 다 해주겠다면서. 억울하죠. 둘째·셋째 아들이 결핵이 오데요. 나도 자궁암이었어요. 자식들에게도 자세한 이야기를 안 했어요.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이씨는 겉으로 건강해 보였지만 두 발에 압박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당시 발에 입은 상처 때문에 두 다리가 온전하지 않다고 했다. 이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지만 미래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우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기념비라도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빨간 소독약에 물 타서 치료”
   
   김일조(88) 할머니는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였다. 김씨의 부모님은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장사를 하다 1930년 히로시마로 왔다. 당시는 조선인들이 히로시마로 한창 몰려들기 시작한 때였다. 1928년 교토에서 태어난 김씨는 일본어가 더 익숙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일본인이 돼서 살았을 것이다. 함석집에 살았던 덕분에 집이 무너지면서 온몸을 덮쳤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김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서 몇 번 눈물을 훔쳤다. “그때 집 뒷산에 있는 굴로 피신을 했는데 시내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시내 쪽은 벌건 불바다가 됐어. 불덩이에 맞은 사람들이 새카맣게 타서 오는데…. 불쌍해서 물이나 한 모금 떠줄까 하다가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죽을 건데 싶어 죽는 걸 지켜보면서도 물도 못 떠주고….” 김씨가 또 말을 잊지 못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간 치료 차별은 없었을까. “그런 말은 돌긴 합디다. 치료랄 게 있었나. ‘아카젱키’(소독약) 한 병에 물을 잔뜩 섞어 ‘바케스’에 담아 상처에 부어주는데 그게 무슨 약이야?”
   
   8월 6일 원폭이 모든 것을 앗아가고 가족들은 10월 무작정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은 신의 나라, 전쟁 안 일어나는 나라로 교육받았어요. 3월부터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매일 미군기가 날아다녔어요. 비행기 안의 사람이 보일 정도였다니까. 그래도 사람을 쏜 적은 없었는데 핵 한 방으로 날릴 줄 누가 알았겠어. 전쟁이 끝나고 조선인이 일본에 있다가는 일본 사람한테 맞아 죽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할 수 없이 합천이 고향인 남편과 밀선을 구해서 어렵게 나왔어요. 항구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배 타기가 힘들었거든. 밀선 타고 나오다 배가 뒤집혀 죽은 사람도 많았어. 합천에 왔는데 한국어도 서툴지, 먹고살 길도 막막하지, 고생 많이 했어요. 원폭 당시 집이 무너지면서 여기저기 다치고 머리에 구멍이 크게 났는데 나중에까지 거기선 머리카락이 안 나요. 머리도 아프고 위장약은 달고 살았어요. 결국 4년 전에 위암에 걸립디다. 어찌 이 나이까지 살았는지….”
   
   김씨는 한 아이를 잃고 4남매를 키웠다. 결혼할 때 지장이 있을까 싶어 피해자 등록도 않고 살았다. 자녀들 결혼시키고 나서야 뒤늦게 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을 하고 일본에 가서 피폭자건강수첩도 받았다.
   
   “우리들은 그나마 복지회관에 있어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거지. 국가에서 원폭피해자를 모른 체하니까 국민들도 모르고 국회의원들도 모르고…. 자료관이라도 하나 생겨서 우리들 이야기를 후손들이 알게 되면 좋겠어요.”
   
   
   “온몸에 세월로 덮지 못한 흉터가”
   
   안월선(86) 할머니는 굳이 사진촬영을 거부했다. 자식들이 싫어한다고 했다. 정확하게 8월 6일 8시15분 시계를 본 직후 원폭에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다 겨우 구출됐다. 깨진 유리조각에 온몸이 난도질을 당했다. 안씨의 왼쪽 얼굴 한쪽에 세월로도 덮지 못한 흉터가 주름에 덮여 남아 있었다. 팔에도 흉터 자국이 여러 곳 눈에 띄었다.
   
   “성형수술을 3번이나 했는데 이 모양이야. 40년이 지나 일본에서 얼굴에 박힌 유리를 빼내는 수술을 하는데 그때도 유리조각이 한 움큼 나왔어요. 여름이라 반팔 차림으로 일을 당해서 전신이 흉터야.”
   
   안씨는 온몸에 유리가 박힌 채 군인들에게 실려 섬에 있는 동굴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빨간 소독약 같은 것을 온몸에 줄줄 붓는 것이 고작인데 치료가 되겠어요? 일주일간 상처를 방치해 뒀더니 구더기도 생기고 흉터도 크게 졌지. 중상자들이 많아서 죽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바로 옆에 어떤 언니가 있었는데 ‘내일 집에 가자’고 약속하고 손을 꼭 잡고 잤는데 다음 날 죽었어요. 혼자라도 가야겠다 싶어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안 움직여요. 두 다리 모두 화상을 입고 유리가 박혔는데 내가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
   
   그동안 안씨의 아버지는 행방불명된 안씨와 동생을 찾아 온 시내를 뒤집고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는 피투성이 안씨를 발견하고 통곡을 하고 울었다. 일주일간 방사능에 노출이 된 안씨의 아버지는 하혈을 하는 등 온갖 후유증에 시달리다 한국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삼촌은 폭심지 옆에서 일을 하다 즉사하고 막내 동생은 집이 무너질 때 죽었어. 8식구가 살아남았는데 아버지는 아픈 몸을 끌고 우리를 한국에 보내려고 배편을 알아보느라 힘드셨어요. 조선 사람들한테 얻어맞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와 보복하느라 조선인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파다했거든. 작은 배를 겨우 구해 한국으로 오는데 파도에 뒤집어질 뻔하고 엄청 고생을 했어요. 히로시마에서 대마도까지 24일이 걸렸으니까. 다시 대마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10시간 걸려 부산에 도착했어요. 도둑 배를 탔기 때문에 야밤에 몰래 항구에 내리느라 또 간을 졸였어요.”
   
   안씨는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길을 가다가도 사람이 오면 다른 길로 돌아서 다니곤 했다고 한다. 안씨는 한국전쟁 중에도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세 할머니를 비롯해 원폭피해자들의 마음의 흉터는 외상보다 훨씬 깊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세 분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했지만 자신들의 증언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취재 도중 피해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한 이들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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