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훔볼트대에 소장된 독일군 포로 고려인 사진.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아 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독일 훔볼트대에 소장된 독일군 포로 고려인 사진.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아 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프로이센 포로수용소. 27살의 고려인 김그레고리가 구성진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른다.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자/ 아라랑 타령 정 잘하면/ 80명 기생을 다 거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자/ 아랑랑고개 집을 짓고/ 오는이 가는이 정들여놓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자/ 달은 밝아 내 몸을 비치네/ 님을 잡고서 낙루만 한다.”

당시 김그레고리의 아리랑은 SP 음반에 기록됐다 현재는 독일 훔볼트대에 디지털 음원으로 보관돼 있다. 어쩌다 고려인이 독일군 포로가 돼 낯선 이국의 하늘을 보며 아리랑을 불렀을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상대로 독일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는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탄넨베르크전투이다. 1914년 8월 28일, 바르샤바 북쪽 습지지대에 갇힌 러시아 1군은 독일군에 포위된 채 속수무책 무너져야 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1만명이었지만 러시아군은 13만명이 전사하고 9만명이 포로가 됐다. 이어 러시아 2군도 12만명의 병력을 잃고 6만명은 포로가 됐다. 두 전투로 러시아 북서전선군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사자, 포로 속에는 고려인 4000여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연해주 등에 살다 러시아에 강제 징집돼 러시아 군복을 입고 전투에 참가한 고려인들이었다. 김그레고리도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 언어학자 빌헬름 알베르트 되겐 박사를 중심으로 23명의 독일 학자들은 군 당국의 협조를 얻어 1916년부터 2년간 175개의 수용소 포로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 음악 등을 조사했다. 이렇게 작업한 총 1651개의 음반에는 251개 민족에 대한 기록이 담겼다. 이 중 고려인에 대한 조사기록은 음반 59개 분량이다. 김그레고리의 아리랑을 비롯해 불경, 독립운동가, 숫자 읽기, 주요 술어 등이 기록돼 있다. 포로수용소에 고려인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확인되진 않지만 이 기록에는 4명의 고려인이 등장한다. 김그레고리, 유니콜라이, 안스테판, 강가브리엘이다. 고려인 조사는 뮬러 박사가 담당했는데 관련 기록에는 이들을 시베리아에서 이주한 한국인 3세로 기록하고 있다. 출신지, 나이 등 이들의 신상명세를 기록한 카드도 남아 있다.

독일 학자들의 민속사 연구는 1923년 ‘이민족 신민속연구’라는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책에도 한국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김그레고리가 자신을 소개한 글이 포함돼 있다. 글에 따르면 김그레고리의 한국 이름은 김홍준.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출신으로 17~18세 때 러시아어를 배워 21살이 돼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다. 3년 반을 근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몇 개월 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전시 소집을 받아 러시아 군복을 입고 독일 전투에 투입됐다. 김그레고리는 참전 후 3개월 만에 포로가 돼서 포로수용소에서 3년째가 된다고 적고 있다. 그는 18세에 한국 여자와 결혼해 아들 ‘김복’과 딸 ‘김샛별’이 있다고 했다. 이들의 기록은 현재 문경 옛길박물관에 마련된 아리랑 특별전에 일부가 전시돼 있다. 독일 측으로부터 받은 김그레고리와 유니콜라이의 아리랑 디지털 음원도 있다.

그 후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고려인 3세임에도 민족의 대표 노래로 아리랑과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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