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8일 파주시 목동동 해솔도서관. 이날 오전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인의 날’ 행사가 있었다. 도서관 이용자들과 도서관 직원들이 한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도서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금자녀씨는 4년째 해솔도서관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회원은 9명, 지금까지 읽은 책은 ‘핀란드 교육혁명’에서 ‘호모루덴스’ ‘총균쇠’까지 교육·인문·세계사 분야를 망라했다. 금씨의 말이다. “아이들 때문에 도서관에 왔다가 이젠 우리 책을 읽기 위해 온다. 집에서 모임을 하면 대화의 주제도 시댁 이야기나 아이들 문제를 벗어나지 않는데 도서관에서 모임을 하면 책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매주 모임을 하기 때문에 사회로 한발 나온 느낌이다. 도서관에 와서 누구의 아내, 엄마가 아닌 내 자신을 찾았다.”
경기도 파주시 산남면, 심학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7~8월이면 연꽃이 만개한 장관이 펼쳐진다. 1만3000㎡(4000여평)에 달하는 연 농장을 만든 사람은 이수안 대표이다. 이 대표가 연 농사를 시작한 것은 2007년이었다. 평생 자영업을 하던 이 대표는 농사 경험이 전혀 없었다. 막막하던 이 대표는 파주시에 있는 교하도서관에서 농사를 배웠다. 이 대표는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한 보따리씩 농사 관련 책을 대출해 특용작물에 대한 연구를 했다. 1인당 대출 제한이 있어 두 아이 이름까지 빌렸다. 특히 무농약 농법이 한국보다 앞서 있는 일본 서적은 귀한 공부가 됐다. 덕분에 심학산 연꽃 농장은 이 지역 명소가 됐고 연근 상품도 인기다.
여행책 13권을 펴낸 여행작가 최갑수씨도 도서관 예찬론자이다. 세 아이의 아빠인 최씨는 주말이면 온 가족이 집 근처에 있는 교하도서관 나들이를 한다. 각자 원하는 책을 읽기도 하고 도서관 옆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최씨의 설명이다. “사무실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 도서관만큼 좋은 공간이 없다. 필요한 자료 다 있고, 편의시설도 잘 돼 있다. 게다가 공짜다. 교하도서관에서 내 책 중 3권을 썼다. 도서관에서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업 강의는 거절을 해도 도서관 강의는 무조건 ‘OK’다. 문화강좌 수준도 굉장히 높다.” 최씨는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집을 구하는 조건 1순위가 도서관이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파주, 도서관 천국으로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으로 가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불과 20년 전, 서울 남산도서관 앞에서 책가방 들고 자리전쟁에 나선 새벽 도서관족은 우리나라 신문의 단골 뉴스였다. 남산도서관은 사실상 남산독서실이었다. 칸막이 열람실에서 입시전쟁 전사들을 키워낸 과거의 도서관이 ‘경쟁’이라는 족쇄를 찬 오늘을 만들었다면, 요즘 도서관에서는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도서관들이 바뀌고 있다. 열람실에선 칸막이가 사라지고, 천장까지 꽉꽉 채운 서가들은 키를 낮춰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공부방 대신 아이들이 뒹굴면서 즐겁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공간들이 등장했다. ‘엄숙’과 ‘정숙’을 강요하던 공간은 소통과 토론의 장이 되고 있다. 다양한 북콘서트가 줄을 잇고 도서관 로비에서 연주회가 열리는가 하면 영화도 상영한다. 동네 안으로, 주민 생활 속으로 들어간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문화 사랑방, 평생교육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도서관 생태계의 진화를 들여다보기 위해 주간조선이 주목한 곳은 경기도 파주시이다. 파주출판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도 하고, 2010년 ‘책 읽는 파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동네 도서관 짓기에 나서면서 파주시는 ‘도서관 천국’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취재하는 동안 “도서관 때문에 파주에 이사 왔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전해 들었다. 파주시는 2년마다 시행하는 경기도 시군 공공도서관 평가에서 2013년에 이어 2015년에도 우수지자체에 선정됐다.
인구 43만명의 파주시에는 공공도서관이 13곳, 작은도서관 55곳(공립 6곳, 사립 49곳)이 있다. 군부대가 많은 지역의 특성상 병영도서관도 13곳이 있다. 1월 개관하는 탄현도서관까지 포함하면 공공도서관 1곳당 인구는 3만700명이다. 독일(1만225명), 영국(1만5200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3만3000명), 일본(3만9000명)보다 낮다. 한국은 2013년 말 기준 5만9000명으로 선진국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2009년부터 1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과 함께 공공도서관이 크게 늘어 2009년 703곳에서 2014년 말 930곳에 이르고 있다. 한 달에 3.8곳꼴로 전국에 새로운 도서관이 세워진 셈이다.
여기에는 지자체들의 경쟁도 한몫하고 있다. 민선 4기 지자체장 선거에서 경쟁적으로 등장한 구호가 ‘책 읽는 도시’ ‘도서관 도시’이다. 군포, 김해, 용인, 고양 등 ‘책’을 정책 목표로 내세운 지자체가 50여개에 이를 정도이다. 작은도서관 운동도 전국으로 확산됐다. 1990년대 이후 문화사랑방 역할을 내세우며 아파트, 골목 곳곳에 생기기 시작한 전국의 작은도서관은 2014년 말 5234곳에 이른다.
2012년에는 작은도서관진흥법도 제정됐다. 작은도서관은 ‘면적 33㎡, 장서 1000권가량의 마을문고’를 지칭한다. 누구든 조건만 충족하면 작은도서관으로 신고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 독서인구 비율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9년 62.1%, 2013년 62.4%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다가 2015년에는 56.2%로 오히려 감소했다. 도서관 경쟁에 나선 지자체들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