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박상철
일러스트 박상철

이태 전 50대 초반의 나이에 생각지 못하게 실직한 내게 도서관은 몸과 마음의 구원처였다. 주로 언론사에서 그래픽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담당해 밥벌이를 하던 나는 이미 40대 중반 이후 몇 차례 실직과 취직을 되풀이했었지만, 그렇다고 갑작스러운 실직이 마음 편하게 여겨질 리는 없었다. 다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 빠진 많은 가장들이 찾는 공원이나 산으로, 혹은 방구석에 몸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앞선 몇 번의 경험으로 도서관이 실직자의 피난처이자 구원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내가 사는 경기도 분당 지역은 도서관 개수도 제법 많을 뿐더러 서로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서 시민들의 문화적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한다. 유명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본사 1층에 마련한 디자인 도서관과 항상 신간을 발 빠르게 갖춰놓는 교회 도서관까지 합치면 크고 작은 도서관이 여섯 군데나 된다. 그중 시에서 운영하는 네 군데는 쉬는 날이 서로 겹치지 않게 한다든지 한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다른 도서관에 반납할 수 있게 하는 등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나는 집 가까운 곳의 도서관 휴관일을 깜박 챙기지 않아 아침에 세 군데 도서관을 찾은 날도 있다. 여하간 쉬는 날 없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셈이다.

직장에 다니던 중에도 주말이면 아이들이나 아내와 함께, 혹은 혼자서도 자주 다녔던 분당도서관은 그래서 낯설지가 않고 구석구석 구조도 잘 알고 있다. 1층에 어린이 가족열람실과 연속간행물실 및 장애인열람실이 있고, 2층은 컴퓨터가 있는 전자정보실과 문화교실, 3층이 책을 열람하고 대여해주는 문헌정보실, 4층과 5층이 칸막이 책상이 있는 일반열람실이다. 지하엔 구내식당과 시청각실이 있다.

아침형 인간인 나는 직장에 다닐 때도 2~3시간을 앞당겨 출근하는 성실파(?)였던 만큼 도서관도 오픈 시간인 오전 7시에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편한 복장에 노트북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태블릿을 백팩에 챙겨 넣은 채 20분가량 걸으면 도착하는 분당도서관은, 이미 입구에 문 열기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대개 공무원 시험 등을 준비하는 분위기의 청년들이나 나와 비슷한 연배의 장년 남성들이다.

오전 7시 5분 전에 현관을 오픈해 입장하면 4층이나 5층의 일반열람실 좌석표를 골라 자리로 직행한다. 2층의 전자정보실이나 3층 문헌정보실 등은 9시에 문을 연다. 내가 뽑아든 4층의 제1열람실 좌석은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고 무선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노트북 전용좌석이다. 이런 좌석은 수가 많지 않아서 일찌감치 자리를 찜하지 않으면 곧 만원이 되어버린다. 집에서 도서관 좌석앱으로 빈자리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당연히 예약은 불가능하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쓸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왔다.

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린다? 예전 같으면 말이 되는 소리냐며 머리를 갸웃댈지 모르지만 이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온라인 시대엔 어떤 데이터든 입력엔 제한이 거의 없어지고 있는 중인 거다. 노트북 사용이 가능한 좌석에 마련된 콘센트에 노트북 전원을 꽂고, 그 노트북에 디지털 그림판인 태블릿을 연결해 디지털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검색하거나 휴대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자료 삼아도 되고, 손으로 스케치한 그림이라면 2층의 전자정보실에 있는 스캐너로 읽어 들여도 된다. 나는 이 도서관에서 노트북컴퓨터로 쓰고 그린 글과 그림을 유명 포털사이트의 포스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실직상태의 나와 도서관 생활을 소재로 삼은 것이었다. 이 포스팅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고 포털에서 상과 상금도 받았으며 나중엔 책으로 출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신기하다고 들여다보며 귀찮게 구는 ‘올드보이’들만 없다면 아주 충실한 몰입감으로 작업을 할 수 있다. 구경꾼들이 정 귀찮을 때는 이어폰을 귀에 꽂으라고 어느 책에서 충고해 놓았기에 해보았더니 과연 말을 걸어오는 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림으로 스물다섯 해를 밥벌이 해온 내게는 아무리 불황의 시기라도 그림을 의뢰해 오는 업체나 사람들이 있다. 사보나 잡지, 단행본이나 광고업계 등에서 그림 의뢰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는 항상 있어 이 역시 도서관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대기업 사사(社史)에 들어갈 그림이나 교과서 삽화 등으로 직장 다닐 때의 월급이 무색할 만큼 수입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도서관만큼 자료가 풍부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러모로 고마운 곳이다.

일전에 미국의 도서관협회 회장이 내한해서 가진 인터뷰를 보니 미국에서도 도서관이 실직자의 재취업을 위한 프로그램이 도서관 기능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구인이나 구직의 많은 정보를 이렇듯 도서관에서 온·오프라인으로 같이 연계하여 제공할 수 있으니 현재 세계적인 문젯거리인 청년실업의 해소 등에 도서관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내가 그림을 그리던 좌석의 좌우로는 노트북으로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시험 등에 대비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물론 이어폰을 낀 채 말이다.

오전 내내 집중적으로 글과 그림 작업을 하고 나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고 도서관 지하의 식당으로 내려가면 많은 이들이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반이나 돈가스를 저렴한 값으로 제공해 도서관 이용자뿐만 아니라 부근 주민들까지 아이들을 동반해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도시락을 싸갈 때도 많았다. 싸간 도시락은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먹을 수도 있지만 날씨가 좋을 때면 도서관을 나와 근처 소공원의 나무벤치에서 책을 보면서, 혹은 소풍간 기분을 내며 먹는 시간이 아주 즐거웠다. 식사 후 믹스커피를 타서 입가심을 하며 훗날 은퇴를 하더라도 도서관에서 이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나는 아예 도서관 옆에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20~30년 뒤에도 도시락을 싸 들고 도서관을 들락거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고 보면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 연배의 분들도 도서관에 점점 많이 보인다. 예전 종로거리를 지나치며 탑골공원과 종묘공원 앞에서 수많은 노인들이 햇빛 바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노년도 저렇게 우울할 것인지 걱정해 본 적도 있지만 도서관의 책과 프로그램들이 그런 걱정을 지울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을 도서관에서 보낸 나는 마침내 재취업이 됐고 정신없는 직장 생활을 이어가느라 전처럼 도서관에 자주 들르지 못해 아쉽다. 현재의 직장이 있는 서울 외곽 IT밸리엔 20만명이 넘는 젊은이가 출퇴근을 하지만 술집만 즐비할 뿐 도서관이 없다. 첨단 디지털 단지에서 젊은 친구들은 게임, 동영상, SNS를 즐기지만 어디에도 책이 주던 기쁨과 지적 향기가 없다. 우리에겐 문화적 허파가 필요하고 도서관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지식과 정보, 그리고 사람이 모이는 허브로서 도서관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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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 카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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