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8일 해군비리 내부고발자로 알려진 김영수(47) 전 해군 소령이 서울 용산에 ‘국방권익연구소’를 설립했다. 기자는 이날 국방권익연구소 앞 카페에서 이 연구소 소장을 맡은 김영수씨를 만났다. 김영수 소장은 서울 용산세무서로부터 막 발급받은 비영리 연구소 등록증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잘해 봐야죠. 군비리를 근절할 수 있는 연구기관을 설립해야겠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 꿈을 이뤘네요.” 오피스텔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지난 10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영관급으로는 최초로 해군 내부비리를 고발한 인물이다. MBC ‘PD수첩’에 공익제보를 했고, 그로 인해 계룡대 근무지원단 관련자 31명이 입건됐다. 그는 이후 군을 나와 국민권익위에서 국방분야 조사관으로 활동했다. 이후의 근황이 궁금해 몇 차례 연락했으나 “공무원 신분이라 언론인을 만나기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렇게 그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지워져 갈 즈음 그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권익위 국방조사관 김영수입니다. 저는 오늘부로 권익위를 사직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진정성과 열정으로 초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격려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그의 문자를 보고 바로 약속을 잡았다. 기자는 김 소장을 다섯 차례에 걸쳐 총 20시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주로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그의 사무실에는 국방부로부터 받은 보국훈장과 감사패가 여러 개 보였다. 하지만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10년간 축적해 온 군비리 추적기록과 증거자료였다. 2015년 8월,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속된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의 비리도 그가 처음 제기했었다. 군 재직 시절에는 정옥근 총장의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지만 김 소령의 고발이 단초가 돼 그의 고발 2년 후 구속됐다. 이 과정에 대한 기록도 2009년 2월 26일부터 2009년 12월까지 수백 페이지에 걸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8년째 비리조사에 사용했던 노트북에는 수십 기가 분량의 사건파일이 저장돼 있었다. 이 기사는 그가 미처 끝내지 못한 군(軍)비리 카르텔과의 투쟁기록이다. 20시간 인터뷰와 10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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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행함으로써 오는 고난을 감내할 수 있는가?’

해군 사관생도 시절 배운 이 사관생도훈(訓)의 진짜 의미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계룡대 근무지원단(이하 계근단)에 부임한 날은 2006년 2월 8일. 당시 계근단에서는 암투, 뇌물수수, 접대, 향응 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계근단에 부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묵묵히 협조하거나 좌천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선후배들 사이에서는 계근단 내의 군납비리에 대한 소문이 돌아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부임한 지 채 한 달이 안 됐는데 장부와 보고서에 고단가 수의계약 납품비리 정황들이 눈에 띄었다. 소요비품 구매·계약 관련 가짜 견적서를 만들어 특정업체를 밀어주는 식이었다. 내가 더 날카로워서도 아니고, 내가 더 꼼꼼해서도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어설픈 비리장부였다.

과거에 얼마나 해먹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전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A업체와 T업체로부터 TV, 냉장고, 책상, 캐비닛, 의자 등이 시중 유통단가보다 40% 이상 비싸게 납품된 사실을 알아냈다. 잘못을 바로잡아 보고자 상부와 헌병, 기무사, 감찰 기관에 수차례 보고했다. 하지만 보고할 때마다 묵살됐다.

처음에는 내 보고가 부실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체 조사팀을 꾸려 보고서를 보강했다. 매 주말 내 업무를 돕던 조 일병과 정 상병을 동원했다. 이들은 평소 내 업무량이 많은 것을 알던 터라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관련 업체를 방문해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동일 물품을 들고 시장을 돌며 가격조사를 했다. 견적서에 언급돼 있는 업체는 모두 연락해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한 달이 지나자 구체적인 개별 품목별로 업체·부대·연도별 분석자료가 완성됐다.

이 과정에서 계근단에서 총 9억4000만원 상당의 배임행위가 있었음을 알아냈고, 이 중 군과 수의계약을 맺은 A업체가 가짜 목도장으로 위조한 견적서를 제출한 정황까지 잡아냈다. 정황은 점점 더 확실해졌다. 하지만 다짜고짜 상관의 부정을 찌른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상사가 잘못을 바로잡으면 이전의 일은 눈감아 줄 용의도 있었다. 그래서 투명성을 이유로 제안을 했다. 조달청의 위탁조달사업을 활용한 구매시스템 조정과 제품사양서를 전면 재검토하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확인한 당시 관리처장 김 중령은 노발대발했다. 위탁조달사업 계획건의서를 삭제하는 한편 단가를 다시 상향 조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명백한 불법 업무지시였다. 나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정의감 때문이었지만 비리에 연루되기 싫은 이유도 있었다.

당시 물품구매는 계근단장의 허가 아래 군수처장이 지시를 내리면 지원과장인 내가 사인을 하고 구매담당인 김 상사가 내 지시로 업체와 계약을 하는 방식이었다. 즉 내가 사인을 하지 않으면 물품 구매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였다. 군수처장은 지시를 따르지 않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보고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진척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더 윗선인 계근단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보고를 받은 계근단장은 보고를 묵살하고 한술 더 떠 나를 타 부대로 배치시키려고 했다. 이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왜 내 보고를 묵살하는지, 왜 뻔히 보이는 비리를 고치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나는 전반 근무평점 최하위인 0점을 받고 호봉승급에서도 6개월간 제외됐다. 이유는 ‘현역복무 부적격’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나는 다시 상급기관인 국방부 검찰단에 보고서와 조사한 자료, 녹취 등을 증거로 정식 수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3개월간의 수사결과가 ‘증거불충분’으로 나오면서 나는 ‘계근단 업무적응 미숙’이란 이유로 그해 9월 비편성직위인 해군본부 참모본부로 전출당했다.

군부의 보복, 자살을 생각하다

군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군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군내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아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남 장성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5남4녀 집안의 막둥이였던 나는 형편이 어려워 감자와 고구마를 먹고 컸다. 집안 형편상 광주 시내의 학교로 진학이 어려울 정도였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가 개교한 이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으니 그때 동네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사관학교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옷과 잠잘 곳, 먹을 것, 그리고 지식, 이 모든 것을 공짜로 주었다. 임관하고 나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들 딸도 낳아 키웠다. 조국과 군에 보은하려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계근단에서 전출되고 나서는 모든 게 바뀌었다. 첫날 8시 출근해서 보니 업무를 볼 수 있는 책상이 없었다. 아니 업무 자체가 없었다. 책상과 의자 모두 행정업무를 보는 사병과 같이 쓰라는 지시 외에 어떤 조치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인격적으로 모자란 사람, 부적응자로 낙인찍었다. 투명인간 취급이 견디기 힘들어 매일 출근하면 옥상에 올라가 줄담배를 폈다. 하루 세 갑은 기본이었다.

쉬쉬하려고만 하는 고위 인사들이 보기 싫어 점심도 늘 부대 밖 분식집에서 해결했다. 어후 5시에 퇴근하면 곧장 집 앞 술집으로 향했다. 생각이 많으면 잠을 못 잤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술의 힘을 빌렸다. 탁자 앞에 손목시계를 풀어놓고 시간을 재 보았다. 한 시간에 소주 세 병을 들이켜 보니 괴로운 생각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난생처음 ‘자살’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생활이 6개월 동안 반복됐다. 내가 다시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한 것은 2007년 해군대학 조교로 발령을 받으면서였다. 사관생도 출신 장교에게 해군대학은 사실상 진급과는 멀어진 좌천이었다.

해군정신을 다시 생각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곳이 ‘기회의 장소’였다. 다른 부서와는 다르게 혼자 사용 가능한 사무실이 주어져 군의 감시를 피해 군 비리를 연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강의 때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가진 해군대학 생도들을 가르쳤다. 이들이 내가 해군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나는 다시 비리와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2년 동안 헌법과 민법, 군인사법 등 580여개에 이르는 방사청 규정을 매일 8시간씩 공부했다.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비치면 많이 비친 정도였으니 아내와 가족에게도 할 말 없는 나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접촉 가능한 법조인과 시민단체, 군 내부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계근단에서 마치지 못한 조사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군인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의 제보도 큰 도움이 됐다. 관련 인물의 주변인이나 동료를 만나 취재하고 이들의 정보를 기록해 나갔다. 이렇게 정보를 모으다 보니 군 로비활동을 하는 사람을 몇 명 찾게 됐다. 해군 행정 서기관인 이씨가 핵심 브로커로 활동하며 지역 내 고위 장교와 본부의 장성들을 접대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다시 감찰기관에 투서를 보냈다. 육군헌병지원대, 해군헌병대대, 국방부 검찰단에 반복해서 보냈지만 답장이 오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기회가 생겼다. 혹시나 해서 국민권익위원회에 고발장을 보냈는데 이 고발장에 조사관 이병하가 응답했다. 그는 계룡대를 방문했고 조사를 통해 내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조사관은 국방부 조사본부에 정식 수사토록 의뢰했다.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이 나서자 국방부도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2007년 4~6월 계근단 군수처 및 해군본부 경리과를 방문, 자료와 관련자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9억4000만원의 국고를 낭비한 사실과 특정 업체와의 유착관계를 추가 확인하여 해당부대에 관련자 16명을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이때를 기억한다. 충남 공주시 동학사 근처 커피숍에서 내 비리조사 과정을 봐 온 검찰단 관계자를 만났다. 그가 말했다. “소령님, 이제 됐습니다. 말씀하신 8명에 대한 비리혐의가 확인됐어요. 이 사람들 곧 처벌받을 겁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얼마나 긴 싸움이었던가.’ 이제 2년간의 외로운 싸움에 종지부가 찍힐 것이고 내 억울함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커피숍을 나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만날 술 먹고 집에 들어오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던 딸의 화난 표정과 “해군의 진정한 모범이 되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후배의 격려, 포기할까 수백 번 고뇌에 빠졌던 내 모습이 뒤엉켜 해방감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감정이 엄습해 왔다. 그렇게 수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김영수 소장이 3년에 걸쳐 완성한 해군비리 카르텔 지도. 맨 윗부분의 ‘who?’는 정옥근 전 해군 참모총장.
김영수 소장이 3년에 걸쳐 완성한 해군비리 카르텔 지도. 맨 윗부분의 ‘who?’는 정옥근 전 해군 참모총장.

예상하지 못한 반전

하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군내 감찰 역할을 하는 헌병대대의 헌병단장이자 해군 수사단 수사단장이 정옥근 해군참모총장의 친동생인 정우근이었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비리의 정점에 정옥근이 있는 줄 모를 때였다. 따라서 보고서를 검찰에 넘기지 않고 해군수사본부로 먼저 넘긴 국방부 관계자만 탓했다. 국방부 조사본부의 수사 결과에 대한 해군수사단의 자체 확인 결과는 당연히 ‘혐의입증불충분’으로 났다.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군 수사단에서 무혐의 의견이 나오자 국방부 조사본부 역시 조사가 충분하지 못했다며 입장을 선회했다. 최초 문제를 제기했던 국민권익위원회 역시 “위원회에서 처벌의뢰를 했더라도 해당 부대장이 판단하여 처벌할 수 없다면 위원회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는 다시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이제는 주변에서 내가 진급을 위해 무고한 상사와 조직을 음해하려 든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나는 그제서야 조금씩 내가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답이 없게 되니 언론밖에 생각이 안 났다. 2008년 9월부터 이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계좌추적으로 수사 급물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2008년 12월 뜻밖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내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국군기무사령관 김중태 중장이 당시 이상희 국방부 장관에게 “지금 정확히 해 두지 않으면 추후에 문제가 될 사안이 있으니 확인을 요한다”는 보고를 올린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이 장관은 재수사를 지시하고 나에게 “이번 수사로 무혐의가 드러나면 다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재개된 수사는 이전과 달랐다. 이번에는 나에게 직접 계좌추적을 할 수 있는 수사권이 주어졌다. 수년간 워낙 치밀하게 이뤄진 조직범죄였고 나만큼 사건을 잘 아는 수사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 조사를 같이 진행했던 팀을 다시 꾸렸다. 두 명의 사병은 모두 제대한 상태였다. 조 일병은 내 부름에 응했고, 당시 대기업에 재직 중이던 정 상병은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해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셋에서 둘로 줄어든 조사팀은 다시 노트북과 담배와 컵라면을 쌓아놓은 채 밤새 조사를 이어갔다.

나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영영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 밤새워 조사를 한 뒤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브리핑을 했다. 최대한 브리핑을 충실히 해 검찰수사를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 많이 놀랐다. 계근단 비리 하나에 계좌로 연루된 사람이 30명이 넘게 나왔다.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던 군 관련자들이 감자줄기처럼 무더기로 엮여 나왔다. 당시 내가 사건의 실무자로 지목했던 해군 예산처 계약담당 A 상사와 계근단 비품담당 B 상사, 그리고 돈줄로 추정하던 핵심 브로커 이 서기관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었다. ‘이제는 됐구나’ 싶었다.

그런데 돌연 핵심 인물인 A 상사와 B 상사가 ‘자살미수’란 이유로 정신병원에 보내지면서 수사가 난관에 부딪혔다. 둘은 병원의 검사 결과에서 ‘몸에는 이상이 없으나 심리적으로 불안하다’는 진단이 내려져 수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사를 지휘하던 군 검찰 소속 부장검사까지 직위 해제되면서 수사는 잠정 중단됐다. 이 부장검사는 유일하게 내가 고발한 비리를 밝혀 내겠다고 물불 안 가리고 수사에 뛰어들었던 사람이었다. 2015년 합수단이 밝혀 낸 브로커 이규태의 불곰사업 비리도 이 검사가 처음으로 밝혀 내려 했었다.

나처럼 너무 의욕이 앞섰던 탓일까. 당시에는 큰 범죄조직을 잡으려다 역으로 당했을 거란 추측만 가능했다. 당시 비리의 정점 바로 아래서 비리조직을 비호한 인물이 해군 법무실장이었다. 군에서 법무실장이라고 하면 검찰총장과 법원장의 영향력을 합친 것과도 같았다. 그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택시기사, 공중전화, 부하 휴대폰 등을 이용해 비리 관련자 소환일지, 신병처리 관계, 동향 등을 파악해왔다. 나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부장검사도 견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부장검사가 직위 해제되자 수사는 당연히 공중에 떴다. 나는 이후 수사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두 상사가 차명계좌를 통해 9억원가량의 돈을 세탁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은 ‘범죄사실 소명 부족’이란 이유로 풀려났다.

여태까지 벌여온 투쟁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냐”며 말리던 동기의 얼굴이 생각났다. 보란 듯이 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데 내가 봐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반년에 걸쳐 수사 재개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의도 힘의 논리와 구조적 부조리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결국 내가 완전히 부서지더라도 충격을 가해야 반응이 오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에 진실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투서

결국 수사는 2009년 10월 ‘pd수첩’에 방영이 되고서야 재개됐다. 수사로 관련자 7명이 구속되고 15명이 입건됐다. 정옥근 전 해군 참모총장은 이후 2011년 5월 국정원의 특수활동비 10억여원 중 일부를 빼돌려 사용한 것이 밝혀졌지만 불구속 수사가 진행되다가 2012년 1월 19일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때까지 드러난 혐의도 공금횡령이 전부였다. 내가 2009~2010년 특별수사단에서 이미 밝혀 냈던 그의 비리를 5년 전 군 검찰은 무혐의처리 했었다. 하지만 2015년 합동수사단이 창설되면서 정 전 해군 참모총장의 여죄가 드러났다. 내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됐다. 정 전 참모총장은 2008년 STX로부터 7억여원의 뇌물을 받은 것 외에 해군 정보함 입찰에 특혜를 주는 조건으로 6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형을 살고 있다. 해군 장교 출신인 그의 아들 역시 본인이 소유한 회사를 이용해 정 전 총장의 뇌물수수를 도운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언젠가 한 기자가 내게 물었다.

“소령님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정 전 참모총장이 아들과 함께 구속됐는데 심정이 어떻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도 어떻게 보면 불쌍한 사람이에요.” 질문자는 대답이 예상과 너무 달랐는지 “예?”라며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는 정옥근 전 참모총장에게 나쁜 감정이 없다. 그는 비리를 저지른 수많은 군인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군 카르텔을 가능하게 만든 건 비리를 가능하게 한 내부시스템이고 비리에 협조하거나 방관한 모든 사람이다. 군 비리 카르텔과 맞서 본 나로서는 특정 인물이 밉다기보다는 조직 자체에 대한 회의가 컸다. 사실 난 그렇게 정의롭거나 영웅스러운 삶을 산 사람은 아니었다. 축구라면 환장을 하고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뱀을 잡아 술을 담가 선물한 적도 있는 아주 평범한 군인이다. 하지만 국가의 예산이 아무렇지 않게 낭비되는 모습을 봤을 때는 가슴이 쓰렸다. 나는 단지 세금이 엉뚱한 데 쓰이는 것이 싫어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PD수첩’에 보도가 된 이후 많은 사람으로부터 격려 메시지를 받았다. “김 소령님의 용기 있는 결단과 실행에 경의를 표합니다” “힘내십시오. 김 소령님 정의는 언젠가 승리합니다” 등. 아직도 이 메시지들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부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됐다. 다음은 기억에 남는 편지 중 일부다.

“선배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선배님께서는 진정으로 해군장교가 가야 할 길을 후배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생도들이 교육과정에서 외치던 사관생도훈, 명예훈에서 알 수 있듯이 장교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해야 하며, 그 정의를 택함에 있어서 오는 어떠한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쉬운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가장 어려운 이 부분을 김영수 소령님께서 실천해 주셨습니다. 김영수 소령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부정과 부패는 반드시 세상에 밝혀져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디 김영수 소령님의 양심선언에 피해가 없길 바라며, 늘 건강하시고, 근무 잘하시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김영수 소령님께서 보여주셨던 행동… 끝까지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겠습니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필승!”

8년째 비리 추적에 사용된 김 소령의 노트북.
8년째 비리 추적에 사용된 김 소령의 노트북.

내부고발자, 그 이후의 삶

나는 편지를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힘들었던 시기가 생각나서였고 ‘그래도 내가 아주 헛짓을 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또 울었다. 밤늦게 술 먹고 들어온 아빠를 딸아이가 이제는 이해해 줄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억에 난 웃는 날보다 취하고 찡그린 날이 많은 아빠였다. 그 사실이 참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많은 걸 포기하고 내부고발을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공익제보 후 형사 처벌을 받은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복직을 했다. 돈줄 역할을 했던 이 서기관도 900만원 벌금형을 받고 파면이 아닌 명예퇴직을 했다고 들었다. 원래 군규정에 900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으면 파면이다. 그런데 그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가끔 동네에서 마주치기도 하는데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부인으로 보이는 옆사람에게 “쟤가 김영수야”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지나갔다.

‘PD수첩’ 고발 이후 나는 군 상부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보도가 나간 다음 날 나는 해군대학 교관직을 박탈당하고 국군체육부대로 전출됐다. 국군체육부대에서도 처음에는 나를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갈 데가 없는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김태영 장관의 배려로 국군체육부대에 둥지를 틀었다.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업무에 집중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장관상도 타고, 계근대 내부고발에 대한 치하로 보국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내겐 군복무를 더 이상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2011년 6월에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군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은 계근단 수사에 성실히 임해준 국민권익위원회였다. 나는 공개채용 접수 마지막 날 마감 한 시간 전에 원서를 제출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26명 중 가장 마지막으로 제출해서 뽑혔다. 당시 국민권익위에서는 국방 관련 부서가 없었다. 내가 들어오면서 국방 분야가 신설됐다.

나는 이곳에서 4년6개월간 공무원 생활을 했다. 국방전문가는 나 한 명이었기에 업무가 나날이 늘어 갔다. 이때 다양한 각도에서 방산비리 문제를 알게 됐다. 내가 맡은 업무는 민원을 토대로 방산부조리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업체들이 구제받을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일이었다. 예컨대 공개입찰의 불공정성으로 인해 낙찰에 실패한 업체의 손실을 되찾아 주는 일이었다. 나는 조사관으로 있는 동안 얼추 700건이 넘는 민원을 해결했다. 3년 동안 계근단에서 다져진 경험 덕인지 부조리한 정황을 밝혀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한 방산업체 관련자는 나를 “절망 속 한 줄기 빛”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들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래서 최대한 돕고 싶었다.

그런데 민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군납비리가 눈에 들어왔다. 특정 업체에 관한 입찰특혜를 준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국방 분야 공무원의 비리였다. 그 규모를 합치면 총 수백억원대에 이르렀다. 계근단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고 합수단이 창설됐지만 군 비리 카르텔은 여전했다. 예전의 방산비리가 뇌물수수를 통한 사업권 청탁이었다면, 최근에는 공개입찰을 가장한 수의계약으로 진화했다. 견적과 요구사항을 교묘하게 작성해 사전에 알려주는 등 특정업체를 밀어주는 것이 가능하다.

공개입찰의 다수가 계약률 90%가 넘는 ‘이미 주인이 있는 입찰’이며, 조달청 입찰공고 자료를 30분만 들여다봐도 비리 혐의가 예상되는 업체들이 보인다. 비리가 얼마나 만연한지 조사 과정 중에 특혜의혹을 받은 업체가 경쟁 업체에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갈 얹지 말라”고 협박하는 상황까지 종종 발생했다. 하지만 국민권익위에서도 내부비리 보고가 묵살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계근단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장답사와 전수조사를 한 자료를 토대로 국민권익위 조사부서에 보고를 했다. 하지만 신청인 정보보호 등의 이유로세 차례 연속 묵살됐다. 다시 계근단의 악몽이 떠올랐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세 차례 보고가 묵살된 이후로는 더 비리를 보고하지 않았다. 현재 공무원의 구조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방산 관련 조사관을 지내면서 또 한 번 느낀 점은 방산비리가 ‘조직범죄’라는 점이다. 나는 뇌물을 받는 것만이 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리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것도 비리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비리를 발견해도 고발하지 않는다. 내가 겪은 인사상의 불이익처럼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심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고발을 지향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련 법 제정이 필요했다. 예컨대 공무원법 부패방지법 56조를 보면 “신고의무 공직자는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다른 부패행위를 알았을 때 조사위원회에 신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강행규정)고 명시돼 있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의무사항이 따르는 법률에 벌칙이 따라오는 것과 다르게 56조는 위반해도 어떤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다. 한번은 내가 이 법령을 들고 조사처에 따지러 갔더니 “부정부패를 알고 있는데 신고 안 했다고 처벌을 받는 경우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현실적으로 부정부패 신고를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다. 조직 전체를 바꾸지 않으면 부패를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비리 고발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내부비리 고발에 초점을 두는 것은 감사기관으로는 방산비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조사관으로 있으면서 2015년 감사원이 9조원에 이르는 한국형 헬기 개발사업을 감사하는 것을 지켜봤다. 당시 방사청 관계자에 대한 징계가 이뤄졌는데 징계 이유가 회의 때 ‘적절치 않은 의견’을 냈다는 것이었다. 의견을 냄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국가예산에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다. 방위산업 장기프로젝트는 변동사항이 많다. 또 활발한 논의와 계획의 수정이 수시로 이뤄져야 한다. 의견을 냈다고 해서 트집을 잡으면 안보부재는 물론 사업 진행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방위산업 관련 전문가로 회의가 잡혀 가 보면 참석을 안 하거나 참석해도 의견 자체를 개진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진척 없이 보고서만 왔다 갔다 해서 이를 ‘핑퐁 보고서’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한 장의 공문으로 망하는 민간 방산기업도 숱하게 봤다. 민원이 들어왔던 B라는 업체가 부당이득을 편취했다는 혐의를 담은 공문을 받았다. 조사해보니 혐의가 없는데 행정 공무원이 6개월간 영업정지를 먹인 경우였다. 나중에 혐의 없음으로 밝혀지고 제재가 풀렸지만 B업체 1400명의 직원들 대부분이 해고됐고 회사는 망한 후였다. 나는 비슷한 여러 사례들을 겪으면서 강도 높은 감사만이 해결책이 아님을 느꼈다. 4년6개월의 공무원 생활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일개 공무원이 방산비리를 근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직장을 나왔다.

권익위를 그만두고 나서 며칠 전 계근단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를 만났다. 꼭 6년 만이었다. 그는 이제 변호사로 개인 사무소를 차리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내 도움에 응답한 몇 안 되는 검사였다. 하지만 나와 같이 군비리 카르텔에 맞서다가 검사직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생각에 연락할 엄두가 안 났다.

만남은 같이 알고 지내던 기자가 주선했다. 6년이 지난 지금은 만나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이 밝아 보였다. “영수야, 이제 우리 아등바등 살지 말자. 남의 비리를 캐면 나도 피를 보게 되더라. 이제는 비리고 뭐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겪었고, 그도 충분히 어려움을 겪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생각해 보니 나라도 나 같은 부하는 골치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성격이 그런 걸 어찌하겠는가.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중얼거렸다. 정의를 행함으로써 오는 고난을 감내할 수 있다고. 내 투쟁은 이제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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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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