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등산화 네 켤레였다. 분명 신발장에 반질반질한 새 등산화 네 켤레가 얌전히 앉아 있다. ‘가만있자, 내가 가장 최근에 산에 간 게 언제더라?’ 생각도 안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산과의 관계는, 회사에서 가는 단체 산행도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빠질 수 있을까 이 궁리 저 궁리 하다 묘안이 없어 겨우 가는 수준이었다. 그런 형편에 히말라야에도 신고 갈 수 있다는 고급 등산화를 몇 달 안에 네 켤레나 사들이다니. 등산화뿐만이 아니다.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옷이며 운동용품, 영양제, 뜯지 않은 택배상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정신적 허기 채우려 감정적 소비

쇼핑중독. 중독이라고 해도 대놓고 자랑스럽게 회고할 수준은 아니었다. ‘도도맘’ 덕에 잘 알려진 ‘럭셔리 블로거’들과도 한참 거리가 멀었고, ‘블랙프라이데이’ 때면 은둔을 깨고 출몰해 관세청을 놀래킨다는 무림 고수들과 자웅을 겨룰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의 쇼핑여왕 나카무라 우사기처럼 ‘샤넬에서 핸드백을 사왔는데 마침 돈을 못 내 전기가 끊긴 걸 알았어요’ 같은 문장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쓸 수 있을 정도로 결기가 있지도 않았다. 관점을 달리하면 쓰레기로 볼 수 있는 것들을 깨작깨작 사들이는 수준이었다. 주거비용이 상당한 서울에 사는 이에겐 그마저도 재정적 측면이든 물리적 측면이든 큰 타격이긴 하다.

그동안 미친 듯이 사들인 물건들을 살펴봤다. 영양제는 왜 샀더라. 몸의 상태가 안 좋다 싶으면 사들인 것 같다. 얼굴이 지나치게 못생겨 보이는 날에는 화장품 코너를 기웃댄 것 같다. 필요해서 산 게 아니다.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쉽고 짧은 시간이 걸리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생각해 보니 여행도 그랬다. 절실한 마음으로 타인과 나의 삶을 돌아보러 떠나야 했을 텐데 ‘보통 휴식하려고 여행을 한다니, 나도 떠난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별 추억도 남지 않았다. 정신적 허기를 단기간에 해결하려는 ‘감정적 소비’ 그 자체였다.

여기에 ‘가족력’까지 더해졌다. 저장강박증이나 쇼핑중독 같은 정신장애는 부모의 영향이 크다. 기자의 아버지는 우표를 수집했다. 장안의 우푯값을 올릴 정도의 수집가는 아니었지만, 자식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는 됐다. 초등학교 때 이미 나만의 작은 우표 컬렉션을 만들었을 정도니 말이다. 뭔가를 사들이고 정리하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데는 이미 익숙한 셈이다.

간소한 생활방식 다룬 책들

갑자기 등산화가 눈에 들어온 계기가 하나 있긴 하다. 대학 동기의 돌연한 죽음. 표면적으론 잠깐의 파문 후 잊혔지만, 의식 아래에서는 계속 신경이 쓰였던 듯하다. 어느 날 집을 나섰는데,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날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인의 임종 장소 중 73%는 병원이다.)

가족들이 나의 짐을 정리하며, ‘아이고, 에베레스트 등반이 꿈이었구나’ 혹은 ‘인생 2모작으로 다단계 사업을 시작하려 했던 건가’ 같은 말을 늘어놓는 장면은 상상도 하기 싫다. 결심했다. 딱 1년 동안 쇼핑을 끊자. 2013년 9월의 일이었다. 식료품이나 휴지 같은 필수적인 생활용품 외에는 일절 아무것도 사지 않기로 했다.

처음 느낀 건 엉뚱하게도 ‘한가함’이었다. 시간이 갑자기 많아졌다. 물건 하나 사겠다고, 디자인을 고르고 가격을 비교하는 데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쏟아왔던 게다.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게 되고서는 오히려 시간의 유한함을 실감했다. 소유욕과 함께 다른 욕심도 조금씩 옅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인정욕구’ 같은 것. 소비의 상당 부분이 ‘나의 필요’가 아니라 ‘타인의 평가’ 때문이었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없이 사는’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 로타르 자이베르트의 ‘단순하게 살아라’ 등 이미 대중에 잘 알려진 책 외에도 관련도서는 많았다. 정리정돈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엔 교과서처럼 되어 버린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곤도 마리에)은 실질적인 정리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설레지 않으면 과감히 버려라’고 조언한다. 마음의 즉각적인 움직임으로 물건과의 관계가 이미 유통기한이 끝났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자는 설렘의 문제가 아니라 울화통이 터져서 그동안 사모은 물건들을 차마 하나하나 살펴볼 순 없었다.

독일의 패션치료 심리학자 제니퍼 바움가르트너가 쓴 ‘옷장 심리학’은 기대보다 흥미로웠던 책이다. ‘즐겨 입는 옷과 옷장을 보면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주야장천 검은색 옷만 구입하는 사람은 내면에 깊은 좌절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식이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캐런 킹스턴)은 쇼핑중독과 저장강박을 약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본 책이다. 저자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으면 그 공간의 에너지가 제대로 흐르지 않아 그곳의 인간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정리정돈 문제를 일종의 샤머니즘 차원에서 다룬 셈인데, 읽다 보면 당장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는 청소를 한 후 먼 친척으로부터 수억원의 유산을 받았다는데, 가만히 앉아 있기가 쉽겠는가.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물건들 때문이었구나’ 하고 책임을 전가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 ‘청소력’(마쓰다 미쓰히로)도 비슷한 맥락의 책이다.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책은 마스노 슌묘가 쓴 ‘스님의 청소법’이다. 청소법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걸레질을 좌로 두 번 우로 두 번 하라는 식의 조언이 아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쌓아두면 피로도 쌓여 간다’ ‘물건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래와 돌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일본식 정원, 가레산스이(枯山水)를 디자인하는 승려답게 문체가 담백하다. 쇼핑을 그만둔 1년 동안 여러 번 읽었다.

개인의 소비에 대한 전 지구적 고민 필요

아무리 동서고금의 스승들에게 지혜를 구해도 습관의 힘은 무서웠다. 쇼핑을 멈춘 지 두 달이 되자 슬슬 ‘반발(Rebound)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좀이 쑤시는 차원이 아니었다. 친구의 쇼핑을 대신 해주겠다고 자처하거나, 게을러서 잘 안 챙기던 주변인들의 기념일을 갑자기 엄격하게 챙기는 등 과도하게 관대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선물을 위한 쇼핑은 금지하지 않았다.)

마침 그때 해외로 취재를 나가게 됐다. 키리바시(Kiribati)와 투발루(Tuvalu)라는 남태평양의 섬나라였다. 그곳에서 본 것은 (과장을 좀 보태면) 6대륙 곳곳에서 온 ‘헌 옷’의 향연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붉은 악마’ 티셔츠도 여러 번 봤다. 그 많던 헌 옷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끔 궁금했는데 답을 알았다. 여러 가지 옷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으니 그 나라 사람들에게 좋지 않느냐고? 한 곳 걸러 줄줄이 헌 옷 노점상이 늘어서 있는 거리를 상상해 보라. 투발루에는 새 옷만을 파는 가게 자체가 없다.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의 기치 아래, 저개발국가에서 저가의 임금으로 그 나라의 환경을 더럽히며 만들어진 싸구려 옷들이 제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마지막을 맞는 풍경. 개인의 푼푼한 소비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 목격한 셈이다.

‘돈 한 푼 안 쓰고 1년 살기’(마크 보일)도 같은 고민을 담은 책이다. 제목만 보면 ‘쇼핑을 안 한다면서 실은 주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빌붙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집에서만 읽긴 했지만, 환경오염을 줄이고자 불필요한 소비를 자제하며 보낸 1년이 상당히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소로의 ‘월든’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합쳐놓은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작은 생활’(이시구로 토모코), ‘타니아의 작은집’(가도쿠라 타니아)은 물건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두 사람 다 일본에 사는 주부들이다. 부엌용품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빨래는 어떤 식으로 하고, 살림은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조곤조곤 친근하게 알려준다. ‘작은 물건 한 개라도 쉽게 인연을 맺지 말고, 일단 맺었다면 소중하게 사용해주며, 인연이 다했다면 아낌없이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자’는 저자들의 가치관은 지금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반년을 무사히 보내자 그 이후는 쉬웠다. 겨울옷을 사고 싶어 안달했던 고비가 있긴 했다. 그때 미스코리아 출신의 취재원이 마침 자신이 입지 않는 겨울옷을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닌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물론 사이즈가 맞지 않아 입은 적은 몇 번 없긴 했지만 말이다.

가장 자주 들은 질문은 ‘그래서 돈은 얼마나 아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은 실례’라고 쏴주고 싶지만, 매번 슬픈 미소를 지으며 ‘전세금 폭등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파도에 휩쓸려 아무 의미 없어졌다’고 답할 뿐이다. 사실은 어느 시점부터 계산하지 않았다. 나는 돈을 아끼려 쇼핑을 중단한 게 아니므로. 삶을 정갈하고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세상과 타인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그만둔 것이니 말이다. 필요했던 물건을 받아들고 행복해하는 주변 사람의 미소, 나와 인연이 닿고 생활이 조금은 나아졌을 저 먼 곳 누군가의 삶, 그런 기억은 오래간다. 물건을 사지 못해 느낀 순간의 불편함은 금방 휘발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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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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