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는 여러모로 기존의 드라마들이 밟아보지 못한 경지에 오르고 있다. 군인 나오는 드라마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군복의 저주’를 풀었고, 다채널 시대에 넘사벽이라 여겨진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이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사전제작’ 시스템의 성공적 안착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쪽대본’이나 ‘밤샘촬영’은 피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시청률 추이, 여론의 향방에 따라 실시간으로 결론이 바뀌거나 조기종영되는 일도 빈번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오래전에 사전제작 시스템, 시즌제 드라마가 자리를 잡았지만 한국에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비천무’(2008), ‘로드 넘버원’(2010), ‘파라다이스 목장’(2011) 등 사전제작 드라마들이 연달아 흥행에 참패하면서 드라마 생방 시스템은 필요악이 됐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태양의 후예’가 해냈다.

차이나머니, 한국 드라마의 판을 흔들다

여기에는 차이나머니의 투입이 결정적이었다. 원래 ‘태양의 후예’는 김은숙 작가의 전작들인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등 대부분의 작품을 함께한 SBS에 편성될 예정이었다. 이미 ‘육룡이 나르샤’라는 대작을 선택한 SBS는 ‘태양의 후예’의 제작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KBS가 그 기회를 잡았다. 송혜교·송중기를 내세운 송송커플의 인지도와, 김은숙 작가의 이름값이 주효했다. 중국의 동영상 사이트인 ‘아이치이(愛奇藝)’는 회당 25만달러, 우리돈 총 45억원에 ‘태양의 후예’를 구입했다. 조건은,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방영되어야 한다는 것, 거기다 중국의 사전심의도 깐깐해졌다.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은 한류의 중국 콘텐츠 잠식을 막기 위해 2015년 4월 새로운 규정을 마련했다. 중국에서 드라마를 상영하려면 6개월 전에 프로그램 방영 계획을 보고하고 3개월 전에 작품 전체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인터넷에 올리는 모든 외국 드라마는 완결판이나 시즌별 전편을 들여와 중국어 자막을 입힌 다음 관할 당국의 사전 심사를 받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준에 한국 드라마가 몸을 낮췄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포화상태다. 중소기업청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중국이 한국의 32개 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3조원가량 된다. 이 중 절반이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들어왔다. ‘태양의 후예’ 제작사인 뉴(NEW)는 2015년 중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화책미디어와 손을 잡고 현지 법인 화책합신을 설립했다. 박상주 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국장은 “하루가 다르게 규제가 강화되는 중국 시장의 장벽을 뚫기 위해 제작사들은 중국 자본으로 합작 콘텐츠를 만들고, 현지 법인을 세워 좀 더 수월하게 진입하는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면서 “중국 시장에서 나온 성과를 다시 제작비에 투입하는 형태로 생존을 이어가는 전략”이라고 했다.

‘태양의 후예’가 만든 대박 상품은?

지난 3월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하나의 문화 콘텐츠가 경제적·문화적 가치를 낳을 뿐 아니라 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며 ‘태양의 후예’를 언급했다. 그중 드라마의 성공으로 많은 요우커(遊客)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3월 19일 오후 중국 상하이 도심 예술문화구의 한 카페에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주제로 한국 자유여행 소개행사가 열렸다. 한국관광공사 상하이 지사에서 주관한 이 행사는 150석의 좌석이 전부 메워졌고 대부분 20대의 젊은 여성들로 채워졌다. 중국 언론에서는 “중국 여성들이 ‘별그대’의 도민준(김수현)이라는 마약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더 강력한 마약(‘태양의 후예’의 송중기)에 중독됐다”고 보도했다.

가장 큰 수혜지는 태백과 DMZ다. 촬영지였던 태백시 황연동과 백산동 한보탄광 폐광지 일대는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두 곳 역시 ‘겨울연가’의 성공으로 남이섬이, ‘별에서 온 그대’의 성공으로 통영 장사도가 관광명소가 된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경기관광공사는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가 파병된 우르크의 본진 부대가 있던 파주 DMZ 캠프그리브스 체험관을 중국 상하이, 베이징 등 주요 지역 여행사들에 홍보하고 있다. 유진호 한국관광공사 전략상품팀 팀장은 “드라마가 종영되더라도 그 감흥을 잊지 못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한국을 찾을 것이고 강원, 경기 등 지방 관광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극 중 인물들이 착용했거나 사용하고 있는 제품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국에 문을 연 온라인 쇼핑몰 11번가는 ‘태양의 후예’ 방영 후 매출이 150% 늘었다. 송중기가 입었던 ‘톰브라운 3선 완장니트’(80만원 선)는 품절 임박, 송혜교가 사용한 ‘라네즈 BB쿠션’은 드라마 방영 뒤 매출이 지난 2월 같은 기간보다 10배 이상 늘었다. ‘라네즈 투톤 립스틱’도 판매를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품절됐다.

바이두는 중국의 네이버다. 중국인 10명 중 8명이 쓴다. 아이치이는 바이두의 계열사로 ‘태양의 후예’를 독점계약한 동영상 플랫폼이다. 현재 바이두의 TV 검색 1위와, 아이치이의 시청률 1위는 모두 ‘태양의 후예’다. 아이치이에서 동시상영 중인 ‘태양의 후예’는 3월 17일 방영된 8회까지 누적 조회 수 10억회를 넘어섰다. SNS 웨이보에서 ‘태양의 후예’가 언급된 수는 40억회다. 제작사인 NEW는 ‘태양의 후예’를 아이치이에 회당 25만달러(약 3억원)에 판매한 데 이어 중국 내 위성TV에도 판권을 판매 중이다. 3월 23일 현재 중국뿐 아니라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32개국에 판권을 판매한 상태다.

제2의 대만처럼 안 되려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국이 ‘제2의 대만’이 되리라는 염려다. 대만은 아시아의 손꼽히는 콘텐츠 강국이었다. ‘꽃보다 남자’의 원작인 ‘유성화원’은 2001년 방영될 당시 시청률 50%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자본에 잠식되면서 제작 노하우를 갖춘 PD, 작가 등 고급 인력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스타들도 중국 활동에만 매달렸다. 정작 대만 내수시장이 침체됐다.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자 차이나머니 투입은 중단됐고, 중국 기업은 철수했다. 대만 드라마시장에 ‘중국 거품’이 빠지고 불황이 찾아왔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현재 한국 방송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비슷하다. 쌀집 아저씨로 유명한 김영희 PD, ‘런닝맨’의 조효진 PD, ‘별에서 온 그대’의 장태유 PD도 중국으로 스카우트됐다. SM엔터테인먼트와 유재석이 소속된 FNC엔터테인먼트의 2대 주주는 현재 중국 자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태양의 후예’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하며, 황금에 욕심을 내 거위의 배를 갈라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태양의 후예’ 대박으로 한·중 합작 드라마는 더 늘어나는 추세다. 곧 방송될 이영애 주연의 ‘사임당’도 중국에서 150억원을 투자받아 사전 제작 중이다. 이렇게 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주인은 누구일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갖는 사태를 방지하려면 콘텐츠를 보호할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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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톱클래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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