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3일 밤 총선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각 당 지도부들. 위쪽부터 새누리당(122석), 더불어민주당(123석), 국민의당(38석), 정의당(6석). photo 뉴시스
지난 4월 13일 밤 총선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각 당 지도부들. 위쪽부터 새누리당(122석), 더불어민주당(123석), 국민의당(38석), 정의당(6석). photo 뉴시스

이번 20대 4·13 총선을 통해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쥐여준 것은 여소야대(與小野大)다. 여권의 무능과 오만을 심판하면서 국회의 틀을 확 바꿔버린 것이다.

이번 여소야대는 16년 만이라고 평가받는다. 즉 2000년 16대 총선 이후 다시 맞은 여소야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16대 총선 결과를 잠시 돌이켜보자. 당시 선거는 1998년 출범한 DJ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형식을 띠었다. 결과는 여당에서 야당으로 처지가 바뀐 한나라당의 압승. 무려 133석을 가져갔다. 반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115석에 그쳤다. 그러자 선거 이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여당의 파트너였다가 갈라진 자민련이 17석을 차지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자 여당이 ‘의원 꿔주기’라는 기발한 방법을 동원해 우군으로 만든 것이다. 결국 당시 여당은 의원 꿔주기와 무소속 영입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115, 자민련 20, 한나라당 133석’이라는 인위적인 의석 분포를 만들며 여소야대 물타기를 해버렸다.

정치권의 이런 표심 뒤집기의 역사가 다반사로 벌어졌지만 사실 여소야대는 우리에게 낯선 게 아니다. 지금과 같은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3대 이후부터 따져보면 13대부터 16대까지 모든 총선에서 여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1노(盧)3김(金)의 각축으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민정당이 125석을 얻은 반면 야당은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4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등 모두 154석을 가져갔다. 완벽한 여소야대 구도였다. 이어 14~15대 총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4대 총선에서는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탄생했지만 149석 확보에 그쳤다. 대신 신생 정당인 통일국민당이 31석, 민주당이 97석을 얻었다. 당시 선거에선 TK에 불어닥친 반(反)YS 바람 등으로 무소속이 21명이나 탄생했다. 15대 총선에서는 3당인 자민련이 약진했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는 데 그쳤고 새정치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통합민주당 15석, 무소속 16석 등으로 다시 여소야대 표심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때도 신한국당이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하면서 15대 국회가 개원할 때는 신한국당이 과반을 넘겨 151석으로 출발했다.

이처럼 역대 총선에서 여소야대는 익숙한 것이었다.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여당이 과반 확보에 성공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분 17대 총선 이후부터다. 그후 17대 대선 직후 치러진 18대 총선과 18대 대선 전초전으로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여소야대가 낯설어졌지만 13대 총선 이후 따지면 여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다.

여야 협상의 전설 13대 국회

역대 여소야대 국회 중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로 기록된 13대 국회다. 당시 의석 분포상 여당은 야당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대 국회는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생산성이 높고 일을 많이 한 국회로 평가받는다. 실제 13대 국회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입법 성과가 있었다. 지방자치법 제정, 집시법 개정, 국회법 개정을 통한 청문회 도입, 의료보험 확대 등 굵직한 성과들을 국회에서 만들어냈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원내총무는 허주 김윤환 의원. 그는 야3당 파트너인 김원기(평민당)·최형우(통일민주당)·김용채(신민주공화당) 총무 등과 막전막후의 타협을 이끌어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고, 5·18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을 물어 민정당 실세 정호용 의원의 사퇴를 이끌어낸 것도 여야 간 막후 타협을 통해서였다. 지금 같으면 엄청난 갈등으로 비화할 사안들이 여야 합의를 통해 처리됐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2013년 12월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당시 여야 협상의 이면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당시는 광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5공 청산 문제가 정치 현안이었다.… 전두환 전임 정권의 비리를 척결하고 반(反)인권-비민주 사례를 수습해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다. 지방자치제 부활, 행정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 부활, 전두환 시절 단행된 언론통폐합법 문제도 있었다. 이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야 했다.” “정국을 풀려면 민정당 실세를 쳐내야 했다. 당시 여권 2인자인 정호영 의원이 그 대상자였다.… 나는 정호영을 처리하지 않으면 광주 문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김윤환에게 요구했다. 광주 문제 해결 없으면 야당은 강경투쟁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파국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친구인 김윤환 총무에게 협상 전권을 줬다.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화 시대로 옮겨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은 점은 평가할 만하다. 나도 김대중 총재로부터 최종 협상권을 받았다. 우리가 합의한 게 각자의 당에 가서 비토당해 합의문을 다시 고쳐야 했던 일이 없다.”

3당 체제가 오히려 생산적

이런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태우’라는 비판을 받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원만한 야당과의 관계와 국회의 뒷받침을 받으며 민주화라는 큰 과제를 별 탈 없이 마무리한 측면이 있다. 또 KTX와 영종도 신공항 건설 등 대표적인 인프라 건설을 임기 내에 시작하는 성과도 거뒀다. 대통령이 야당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통일국민당과 자민련이라는 제3당이 활약한 14·15대 국회도 비교적 생산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4대 국회도 오늘날 복지제도의 기틀이 된 사회보장기본법 제정,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등 굵직한 입법 성과를 냈다. 15대 국회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등 적지 않은 입법 성과를 냈고, 특히 여야 합의로 특위를 구성해 한보사건 진상, IMF 원인, 조폐공사 파업유도 진상 등 국회 차원에서 대형 의혹들을 활발하게 파헤쳤다. 15대 국회는 1988년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가장 많은 23건의 국정조사 요구를 한 국회로도 기록돼 있다. 작년 ‘바보선거’라는 저서를 통해 “야당의 분열은 필패가 아니며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가 유권자의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펴온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은 “국민이 선택한 제3신당이 있어야 정치권의 막장 드라마를 끝낼 수 있고 국회의 생산성을 오히려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행 소선거구제하에서는 제3당이 살아남기 힘들지만 그래도 역대 총선 결과를 분석해 보면 우리 유권자들은 최소 13.5% 이상을 항상 제3세력에 투표를 해왔다”며 “이런 총선 결과를 인위적 양당 구조로 바꾸며 합의보다는 대결 구도를 형성해온 기성정치권에 이번 20대 총선 결과는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린 셈”이라고 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독선적인 국정운영과 불통(不通)을 심판받은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야당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이 기회에 우리 국회사(史)를 한번 되돌아보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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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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