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서울의 한 자사고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는 40대 여교사 전모씨는 수업을 진행하기가 힘들다. 영어가 아니라 국어가 문제다. ‘offset’의 뜻을 ‘상쇄하다’로 해석해줬더니, 학생 대부분이 ‘상쇄’의 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전씨는 ‘상쇄하다’의 뜻을 한참 동안 설명해야 했다. 같은 학교 국어교사도 비슷한 상황. 영어교사가 수업 진행의 애로점을 털어놓자 국어교사는 “‘주옥 같은 글’에서 ‘주옥’의 뜻을 대부분 몰라서 한참 설명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사자성어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어휘를 몰라 난감할 때가 많다”며 “영어시간에 국어 단어의 뜻을 설명하느라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고 했다.

일반고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서울 성북구의 A고등학교 영어교사의 말이다. “고3 영어 지문에는 깊이 있는 내용이 꽤 나온다. 생각하면서 영어 읽기를 해야 하는데, 생각하며 읽기는커녕 단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 지문을 해석해줬는데도 이해를 못 하는 거다. ‘기인한다’ ‘본질적’ ‘관행’ ‘임의의’ ‘좌식’을 모르는 학생도 상당수다. 아이들이 거침없이 ‘그게 뭔 소리예요?’라고 물으면 숨이 턱 막힌다. 이런 기본적인 어휘를 모르니 수업을 정상적으로 이어가기 힘들다.”

서울 마포구 B고등학교의 과학교사 역시 상황이 비슷하다. “‘그을음’ ‘티끌’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과학책에는 한자어가 많기 때문에 단어 설명에 애를 먹는다. 물질의 상태변화 하나만 해도 ‘승화’ ‘기화’ 액화’ ‘용해’ ‘용융’ ‘융해’ 등 한자어를 기본으로 하는 단어 투성이다. 입시 위주의 공부를 하느라 학생들이 책을 잘 읽지 않은 데다 영어와 수학 공부에만 매달려 국어 공부를 소홀히 하다 보니 전 과목에 걸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어휘력 부족 심각 vs 단정 짓기 어렵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의 빈어증(貧語症)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빈어증이란 어휘력이 부족해서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증세를 말한다. 어휘력이 부족해 교과서의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초·중·고생이 많아진다는 지적이 교실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김승호 전 함평교육지원청 교육장은 학생들의 학력 저하와 어휘력 간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김 교육장의 말이다.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 내용이 어렵다는 학생들이 많다. 시험에서도 기대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문맥을 이해하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상당수다. 기본적인 어휘를 몰라 문맥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헐, 대박, 존x’ 같은 몇 개의 어휘를 유독 많이 사용한다. 웬만한 부사와 형용사를 이 세 개의 단어로 표현해버린다. 긍정과 부정의 뜻을 두루 품고 있다 보니 통용하기도 쉽다. 맛있어도 ‘대박’, 좋아도 ‘대박’, 큰 실수를 저질러도 ‘대박’, 사고가 나도 ‘대박’, 이런 식이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어휘력 빈곤 실태가 두드러진다. SBS 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헐’과 ‘대박’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불과 10여분 사이에 ‘대박’이 열 번 넘게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큰 물고기를 발견해도 ‘대박’, 물고기를 성공적으로 잡아도 ‘대박’, 물고기를 노릇노릇 잘 익혀도 ‘대박’, 그 물고기가 맛있어도 ‘대박’이다. 심지어 “대박”을 외치는 출연자에게 옆의 출연자가 “대박이지?”라고 묻는다.

기성세대들은 하나같이 요즘 아이들의 어휘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서울 목동에 사는 학부모 오모씨는 최근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어휘 수준에 충격받았다. ‘육성하다’의 뜻을 몰랐기 때문. 오씨 아이의 성적은 교육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목동의 초등학교에서 최상위권에 속한다. 오모씨는 “‘육아’는 알면서 ‘육성’은 모르더라. ‘기를 육(育)’ 한자를 알면 되는데, 한자를 배우지 않으니 기본적인 어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어려운 영어 단어는 줄줄 외우면서 쉬운 국어 단어를 모르는 것은 심각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초·중·고등학생의 어휘력 부족 실태는 어느 정도일까. 이와 관련, 초·중·고 교사들과 대학교수의 관점은 달랐다. 취재 과정에서 접한 교사들은 예외 없이 “학생들의 어휘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지만, 대학교수들은 “단정 짓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언어의 역사성 관점에서 보면 특정 어휘를 모른다고 해서 어휘력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요즘 아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졌다, 욕을 많이 한다’고들 하는데, 이런 얘기는 40~50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에는 과거에 비해 한자어를 덜 사용한다. 대신 고유어와 신조어들이 늘어나는 부분도 많다. 언어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집합의 원소 수가 줄어든다면 어휘력 부족과 연관이 있지만, 집합을 구성하는 원소의 수는 같으나 원소 자체가 변한다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그는 “표현어의 숫자와 수용어의 숫자를 점검해봐야 진짜 어휘력 부족 실태를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어휘력 부족’에 대한 심증은 널려 있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는 상황. 이와 관련된 논문이나 연구를 찾아보았다. 모국어 사용자가 성인이 됐을 때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수는 2만~10만개 정도라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의 어휘 수준은 어떨까. 하지만 관련 연구나 통계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초·중·고 어휘력 실태’ 관련 연구는 대부분 20여년 전의 논문이었다. 그것도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거나 수용자들의 태도를 조사한 것이었다. 어느 연구도 보편타당한 어휘력 측정을 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국가 차원의 난이도별 어휘 분류 절실

주간조선은 언어학자와 국어학자들에게 문의해 보았다. 신명선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빈어증에 대해 체감은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만한 연구가 없고, 통계로 도출해내려는 시도도 전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휘력 부족을 측정하려면 어휘의 난이도를 분류하는 작업이 필수다. 연령대별 자주 쓰이는 어휘가 분류돼야만 어휘의 난이도를 측정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학년별 수준에 맞는 어휘 학습을 진행할 수 있다. OECD 대부분의 국가는 이런 작업에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휘별 빈도수 조사 연구가 없다. 교육부, 심지어 국립국어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만 봐도 그렇다. 어휘별 빈도수를 반영해 별표로 표기한 외국어 사전과 달리,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는 그런 게 없어 안타깝다.”

대부분의 영어사전에는 어휘별 빈도수가 별표(*)로 표기돼 있다. 자주 쓰이는 어휘는 ***, 자주 쓰이지 않는 어휘는 * 식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야기책도 마찬가지다. 영문 이야기책을 어휘 수준별로 고를 수 있다. 시중에 파는 영어 스토리북에는 표지에 어휘 난이도가 표기돼 있다. 초보자용은 350단어, 중급자는 900단어, 상급자용은 1500단어 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표기가 전무하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자주 쓰는 어휘는 서로 다르다. 신세대는 인터넷 신조어를 많이 쓴다. 그렇다면 신세대가 기성세대가 자주 쓰는 말 대신 인터넷 신조어를 즐겨 쓴다고 해서 어휘력이 부족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신명선 교수의 의견은 부정적이다. 그는 “최근 학생들이 쓰는 신조어는 기존 신조어와 성격이 다르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회문화 전반의 유행이 언어로 유입돼 신조어가 탄생하는 현상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 유행어들은 상황별 쓰임새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쩐다’라는 단어는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동시에 혼용된다. 이는 자신의 기분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골라낼 줄 모른다는 방증이다.” 알고 있는 단어의 개수가 적다 보니 골라낼 수 있는 단어나 구사하는 문장 표현 또한 지극히 한정돼 있다는 말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박’이 긍정과 부정에 두루 쓰이는 상황과 통한다.

교과서가 어렵다

교육부 등 국가기관 차원의 조사는 없지만, 사용 어휘의 빈도수를 분류한 사교육기관은 있다. 어휘 난이도에 따라 텍스트 난이도를 분류해 학생들의 수준별 독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낱말’이 대표적. ㈜낱말은 서울대 국어교육연구소 김광해 교수와 함께 총 21만9606개의 어휘를 인지발달 단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눈 어휘 등급 분류표<표1>를 개발했다. 이 표는 학년별 교과서 및 수준별 도서에 등장하는 어휘의 빈도와 난이도 등을 기준으로 했다. 가장 어려운 어휘는 9등급, 가장 쉬운 어휘는 1등급으로 분류된다. 이 표에 따르면 초등학교 5~6학년 수준에서는 등급에 상관 없이 2만2227개의 어휘를 알아야 교과서와 연령별 동화책 독해에 큰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실제 어휘력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를 알려면 독해력 지수의 개념을 먼저 짚어야 한다. ㈜낱말에서는 LQ(Lectio Quotient)라는 독해력 지수를 사용한다. LQ는 1984년에 개발돼 전 세계 약 450개 이상 출판사에서 도서별 텍스트 난이도를 분류하는 데 사용되는 지수다. LQ로 텍스트 난이도를 평가할 때에는 어휘 난이도, 어휘 빈도, 총 어휘 수가 기준이 된다. 단어가 쉽고 낯익게 느껴질수록 LQ 지수도 올라간다. 교보문고에서도 각 도서별 ‘리드지수’를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낱말과 손잡고 개발한 것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LQ지수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표2> ‘학년별 LQ 범위와 국어 교과서 독서능력 측정평가 결과 비교’를 보자. 2009~2012년 ㈜낱말에서 전국 초등학생 5만1030명을 대상으로 측정한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제 학생들의 LQ지수와 국어 교과서에서 요구하는 LQ지수의 격차는 꽤 큰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학생 1~2학년생들의 실제 LQ지수는 285~341점이지만, 국어 교과서에서 요구하는 LQ지수는 395~470점이었다. 이는 초등학생 3~4학년의 실제 LQ지수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현행 1~2학년 국어 교과서 수준은 3~4학년의 수준에 맞다는 얘기다. 초등학교 3~4학년과 5~6학년은 이보다 더하다. <표2>를 보면 고학년으로 갈수록 실제 독해력과 교과서가 요구하는 독해력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모르는 어휘가 많아서 교과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아쉽게도 이에 대한 연구 결과가 없다. 검인정 체제라 연구 대상이 워낙 방대해 조사에 한계가 있다는 ㈜낱말 측의 설명이다.

㈜낱말 김기형 대표는 LQ지수를 대대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LQ는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평가도구다. 미국 전역의 학력평가 시험의 표준 도구로 활용되고, 15개 주의 맞춤형 독서 프로그램에 활용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LQ 같은 도구가 없다.” LQ지수는 단순히 어휘력 측정 도구가 아니다. 어휘력 향상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수준별 독서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단계적으로 어휘력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식적·주기적으로 학생들의 어휘력과 LQ지수를 측정하려는 시도가 전무하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꿀맛닷컴’ 등 일부 시·도 교육청에서 무료로 LQ 자가진단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이는 자원자에 한해 제공되는 프로그램일 뿐, 전수조사 차원에서 널리 활용되는 도구는 아니다.

학생들의 어휘력과 독해력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현실은 교육 현장의 치명적 결함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의 어휘력 수준이 곧 교사의 눈높이가 되어야 하는데, 수준을 알 수 없으니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두고 수업을 해야 하는지 헤매는 것이다. 김승호 전 함평교육지원청 교육장은 “교사들 상당수는 학생들의 어휘력 부족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교과서에는 전문용어, 외래어, 한자어가 많다. 교사들은 이런 용어들에 익숙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느끼는 난해함에 둔감할 수 있다. 객관적인 어휘력 수준에 대한 지표가 제공되지 않아 교사들은 ‘감’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는 또 “어휘력이 약하면 학습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결국 학습 포기로 이어진다”며 “고학년으로 갈수록 이에 대한 지원 대책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신명선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역시 “어휘력 부족이 사고력과 독서력 부족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된 기정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빈어증 원인? 실태도 모르는데…

빈어증 실태를 제대로 모르니 빈어증 원인에 대한 연구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역시 심증은 있으나 물증, 즉 객관적 연구자료가 없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최근 빈어증의 원인으로 △활자매체에서 영상매체 시대로의 전환 △독서 부족 △한자 교육 부재 등을 든다. 독서교육학회 회장 이성영 교수(춘천교대 국어교육과)는 전화통화에서 “활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 전환하는 조류가 빈어증의 한 원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디지털 세대는 문자보다 이미지로 정보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장단점이 있다. 텍스트를 처리하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사고력 배양을 위해서는 만화보다 줄글을 권장한다.”

독서량과 어휘력이 비례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또 한자 교육의 부재가 어휘력 부족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 국어의 70%가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한자어가 무려 90% 이상이라는 통계가 있다. 한자를 모르면 국어 이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낱말 김기형 대표는 “한자어 등 개념어가 많은 책을 반복적으로 접할수록 어휘력과 LQ지수가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낱말에서 어휘 난이도 분류 시 한자 난이도를 활용해 한글 난이도를 분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어휘력 부족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이 먼저다. 정확한 실태를 알아야 원인과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김경수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 교과서는 어른들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라며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의 어휘 수준이나 어휘 사용 실태에 대한 분석 없이 나온 교과서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학습지도를 할 수 없다. 우선 학생들의 어휘력 수준을 명확히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한 후 폭넓은 조사와 측정이 행해져야 한다. 그래야 어휘력 빈곤 현상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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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 윤수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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