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혈액이 풍족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학생은 아는 단어의 수가 많아야 공부가 재미있다. 피가 부족한 병을 빈혈(貧血)이라 하고, 어휘력이 부족한 공부병을 빈어(貧語)라고 하며, 심한 경우를 ‘빈어증(貧語症)’이라고 한다. 빈혈을 방치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전신(全身) 허약자가 되고, 빈어를 그냥 두면 전(全) 과목 공부를 싫어하게 되고 결국에는 공부를 포기하여 사회적응 장애의 문제아로 전락한다.

이토록 무서운 공부병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학부모들은 물론 교육 당국도 이러한 증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한글 전용 교과서를 읽을 줄 알 뿐인데, 뜻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다 보니 빈어 증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육체의 병인 암(癌)과 공부의 암(癌)인 빈어증은 두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 초기(初期)에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렇고, 조기(早期)에 발견하면 얼마든지 완치할 수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빈어증 조기진단은 예상외로 간단하다. 먼저 학부모는 자녀들과, 교사는 학급 학생들과 함께 ‘애국가’ 1절을 불러 보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위의 표에서 음영으로 처리한 10개 단어는 ‘애국가’에 담긴 깊은 뜻을 아는 데 실마리가 되는 핵심어(키-워드)이다. 이 10개 단어가 각각 무슨 뜻이며, 왜 그런 뜻이 되는지를 주관식으로 쓰게 한 다음, 사전을 찾아 채점해 보자. 이를테면 ‘보우: (1)보호하고 도움. (2)지킬 보(保)와 도울 우(佑)를 쓰기 때문’이라고 쓰면 만점이다. 초등생들에게는 (2)번 항목의 답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10개 단어에 대하여 이렇게 해보면 어휘력을 금방 측정할 수 있다. 70점 이상이면 안심해도 되지만, 30점 미만이면 극심한 빈어증이다. 방치하면 공부와는 영영 담을 쌓게 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빈어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구름’ ‘바람’ 같은 고유어가 아니라 ‘운학(雲鶴)’ ‘풍상(風霜)’ 같은 한자어이다. 고유어는 사용 빈도가 높기 때문에 뜻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예가 상대적으로 적고 그 수도 많지 않다. 한자어는 그 반대다. 늘 세심하게 다루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애국가’ 1절 가사에 쓰인 핵심어휘 10개는 모두 한자어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과목 교과서에 쓰인 한자어는 총 1만2787개이고, 누적 출현 빈도는 총 22만3500회라는 통계가 있다.(한자어 노출 빈도가 6년간 매일 평균 102회에 육박) 학술도구어의 99%, 개념류 사고(思考)도구어의 98%가 한자어라는 통계도 있다. 따라서 한자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 잘 쓸 수 있는지가 학력의 관건이다.

이토록 질적으로 중요하고 양적으로 많은 한자어에 대하여 그동안 학교 교육은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일종의 직무태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자어가 한글로만 쓰여 있어 한자어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러한 은폐(隱蔽) 정책(한글 전용)으로 말미암아 한자어 어휘 지도와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학생들의 빈어증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 폐해와 폐단을 알게 된 교육부가 ‘교과서 한자어 선별적 한자 표기’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생의 한자어 노출 빈도가 6년간 매일 평균 102회에 육박(한자어 출현 누적 빈도 22만3500회÷6년÷365일)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매일 100번 이상 받는 학생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방치한 초등 교육은 무책임의 극치였던 셈이다. 늦었지만 너무너무 다행한 일이다.

그러면 빈어증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어휘 학습 전략은 기본적으로 ‘문맥 접근법’ ‘사전 활용법’ ‘형태 분석법’ 등 세 가지가 있다.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앞뒤 문맥을 보고 그 뜻을 추측하는 것이 문맥 접근법이다. ‘악어나 뱀 따위를 파충류라고 한다’는 문장에서 문맥을 아무리 살펴봐도 ‘파충류’가 뭔지 알 수 없다. 문맥 접근법은 임시방편일 뿐 완결책은 아니다. 그래서 사전 활용법도 병용해야 한다. 먼저 사전에서 ‘파충류’를 찾아보자.

A사전 파충류(爬蟲類): 파충강의 동물을 일상적으로 통틀어 이르는 말. ≒파충

B사전 파충류(爬蟲類): ‘기어 다닐 파’ ‘벌레 충’ ‘무리 류’ 땅을 기어 다니는[爬] 벌레[蟲] 같은 동물의 종류(種類). 거북, 악어, 뱀 따위.

위의 비교표를 통하여 우리는 중대한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두 사전 모두 표제 한자어에 대해서는 한자를 병기하고 있다. 이로써 한자 병기의 필요성을 여실히 증명할 수 있다. 둘째, (A) 같은 단순 한자 병기는, 한자 자의(字義) 지식이 부족한 학생에게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B)같이 형태소(形態素·morpheme) 의미, 즉 속뜻을 알려 주어야 비로소 그 진가(眞價)가 발휘될 수 있다. (B) 같은 방식은 ‘사전 활용법’과 ‘형태 분석법’이라는 두 가지 어휘 학습 전략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한자 자형(字形)이 아니라 자의(字義) 지식이다. 교과서 본문에서 한자를 병기(倂記)한 단어에 대하여는 반드시 동일 페이지 하단에 한자의 속뜻(자의 정보)을 부기(附記)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한자 표기가 학습 부담을 안겨준다는 지적을 무마할 수 있다. 그리고 사교육비 증가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불식시킬 수 있다. 따라서 한자 표기에 아울러 ‘속뜻 부기’라는 보완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빈어증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함에 앞서 미국의 성공 사례, ‘사전 기부 운동(dictionary project)’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마다 전국 초등학교 3학년생에게 종이사전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모든 과목 공부에 활용하는 이 운동으로 매년 240만명의 학생이 혜택을 받고 있다.(www.dictionaryproject.org 참고) 어휘력을 크게 향상시키자면 가장 강력한 학습도구인 종이사전이 꼭 필요하다는 점에 착안한 현물 기부운동이다. 현금 지급 방식의 장학제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도구를 주는 예지를 우리도 배웠으면 좋겠다.

종합하자면, 빈어증 예방 및 치료제는 ‘국어사전 활용교육’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올릴 수 있고, 시행에 따른 예산 장벽도 낮은 편이다. 교육 당국이 결단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시행 가능하다. 속뜻풀이가 되어 있는 국어사전은 한자 공부도 저절로 되기 때문에 사교육비 절감 효과도 누릴 수 있고, 한자 병기 반대론도 잠재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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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진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LBH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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