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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호] 2016.05.23

이중섭 탄생 100년 그의 뮤즈 이남덕을 만나다

남편의 편지 한 장 내 손에 없어…

▲ 일본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이남덕씨의 자택. 침대맡에는 결혼사진과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일본 도쿄도(都) 시부야구의 한적한 주택가, 낡은 2층 연립주택의 실내는 좁고 어두웠다. 바깥세상과는 무관하게 이곳의 시계는 느리게 움직이는 듯했다.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을 겸한 주방과 침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방은 4인용 식탁이 자리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이 식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이중섭(1916~1956)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였다. 한국 이름은 이남덕(李南德),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에서 이중섭이 지어준 이름이다. 1921년생이니 95세이다.
   
   이중섭은 역사가 된 지 오래지만 부인 이남덕은 현재를 살고 있었다. 그와 마주한 순간 과거와 현재가 겹쳐졌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년이자 사망 60주기이다. 이중섭을 기리는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오는 6월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館)에서 이중섭 전시가 열린다. 이중섭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삶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남덕’은 핵심 키워드이다. 이중섭 앞에 ‘국민화가’라는 호칭을 붙이면서도 그의 뮤즈였던 부인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이남덕은 이중섭에게 아내이자 창작의 이유였다. 이중섭은 죽음 직전까지 아내를 위해 붓을 들었고,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편지에 쏟아냈다.
   
   ‘나의 최대 최미(最美)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最愛)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소.’
   
   ‘아고리의 생명이오, 오직 하나의 기쁨인 남덕군, 어서어서 건강을 되찾아서 우리 네 가족의 아름다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용감하게 행동하고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중섭이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백수십 통의 편지마다 이런 표현이 적혀 있다. 지난 5월 12일 기자는 이남덕씨를 만나기 위해 자택을 찾았다. 도쿄에서 가장 번잡한 역 중 하나인 시부야역에서 자동차로 불과 5분여 거리였다. 그가 어린 시절 이사를 와서 평생 동안 살고 있는 곳이다. 이중섭과 결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와 살았던 7년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서 80년을 보냈다.
   
   이중섭의 둘째 아들인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67)씨가 먼저 기자와 통역을 맞았다. 이중섭의 작품에 숱하게 등장한 아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다. 현재 태성씨가 주택 2층에 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태성씨는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어머니의 식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태성씨는 인사만 나누고 바로 자리를 떴다. “감기가 걸려 어머니에게 옮기면 안 되니 함께 자리를 할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태성씨는 현재 도쿄 세타가야구에서 ‘다이세’라는 표구점을 운영하고 있다. ‘다이세’는 태성의 일본어 발음이다.
   
   
▲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 서울미술관 소장

   10년의 추억으로 60년을 살다
   
   집안은 예상했던 것보다 초라했다. 낡은 가구들이며 살림살이는 주인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었다. 침실은 원래 거실용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던지 주방과 접이식 블라인드로 구분돼 있었다.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16.5㎡(5평) 남짓 공간이 그가 하루를 보내는 곳이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남편을 추억하는 액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결혼사진이었다. 1945년 5월 이중섭의 고향 원산에서 올린 부부의 전통 혼례식 사진이 눈에 띄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사모관대, 족두리를 쓴 신랑 신부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담배를 피고 있는 생전의 이중섭 사진과 눈부시게 젊은 ‘마사코’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가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남편의 묘역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사진 날짜는 1992년 4월 15일로 찍혀 있었다.
   
   그는 격동의 한·일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었다. 1945년 사랑을 좇아 홀홀 단신 현해탄을 건너 한국인으로 살다 1952년 다섯 살, 세 살 된 두 아들만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한·일 국교 단절로 이중섭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부부는 200여통의 편지와 엽서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랬고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이별의 시간을 견뎠다. 1956년 남편의 부음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짧은 사랑의 기억을 안고 그는 평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혼자 살았다.
   
   실내는 그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쓰지모토 다카유키씨와 통역, 기자가 앉으니 꽉 찼다. 애당초 사진기자가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전에 이남덕씨 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실내가 좁아 두 명 이상의 취재진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사진기자는 밖에서 대기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밖에 손님이 기다리면 신경이 쓰인다”는 이유로 거듭 양해를 구해왔다.
   
   갈색 염색을 하고 소박한 목걸이와 브로치로 단장을 한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8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였다. 인터뷰 직전까지 변수는 그의 건강이었다. 올 초에도 건강이 안 좋아져 언론사와의 취재가 취소된 적이 있다고 했다. 시부야 주택가로 들어설 때까지 조마조마했다. 행여나 건강 때문에 인터뷰가 어렵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다행히 요즘 그의 건강은 고질적으로 아픈 무릎 때문에 걸음이 불편한 것과, 밤에 잠을 못 자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했다. 매주 월·화요일마다 병원을 다닌다고 했다. 건강을 우려해 허락된 시간은 한 시간이었지만 인터뷰는 1시간30분가량 이어졌다.
   
   그의 기억력은 또렷했고 눈빛은 살아 있었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한 탓인지 가끔 기침을 했다. 1시간이 넘어가면서 그가 급격하게 피로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인터뷰 내내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답은 신중했다. 즐거운 추억을 끄집어낼 때는 웃음을 터뜨렸고, 남편의 이미지에 좋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에는 말을 아꼈다.
   
   
▲ 이중섭의 작품은 수십억원을 호가하지만 이남덕씨의 자택은 초라했다. 주방 겸 거실 옆에 침실이 있다. 이남덕씨가 그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쓰지모토 다카유키 PD(오른쪽), 통역 임정희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중섭은 분카학원의 스타였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로 돌아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일부 이중섭 관련 책에는 부인이 짝사랑을 했던 것으로 묘사가 되기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은 도쿄에 있는 분카학원(문화학원) 시절 미술반 선후배로 만났다. 193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 이중섭은 데이코쿠미술학교(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중퇴하고 다음 해 개방적인 분위기의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긴다. 그는 이중섭보다 두 해 늦은 1938년에 입학했다. 그의 회상이다.
   
   “내가 학교 2층에 있는 아틀리에에 있을 때였어요. 같은 과 친구로 나이가 많았던 이케다상이 나를 막 부르더니 창가로 와보라는 거예요. 창밖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리상이라고 하는데 잘생기지 않았냐’고 묻는 거예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배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잘생겼다고 둘이서 맞장구를 쳤죠. 그렇게 마음에 담고 있던 어느날 미술시간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붓을 씻고 있었어요. 내가 먼저 씻었나? 아고리상이 옆에 와서 같이 씻으면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죠. 그 뒤로 사귀기 시작했어요.”
   
   아고리는 턱이 긴 이중섭의 별명이다. 턱을 뜻하는 일본어 ‘아고’에다 성을 붙여 ‘아고리’라고 불렸다. 그는 여전히 남편을 ‘아고리상’이라고 불렀다. 첫사랑의 기억은 70년이 지나도,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말하는 중간중간 웃음을 보였다. 훤칠하고 잘생긴 데다 스포츠맨에 노래도 잘 불렀던 이중섭은 학교에서 인기스타였다. 미술 실력으로도 당시 이중섭은 두각을 나타냈다. 1938년 이중섭은 도쿄 화가들이 중심이 된 자유미술가협회 제2회 전람회에서 협회상을 받는다. 평단의 호평도 이어졌다. 그의 기억이다.
   
   “전람회에 출품해서 상을 받고 협회 회원으로 인정받았어요. 전람회 전시가 끝난 후에 평론가들로부터 ‘반도(조선반도) 사람으로 천재적인 화가가 그린 그림’ ‘천재화가가 반도에서 왔다’ ‘반도 화가의 활약이 눈부시다’는 평이 쏟아졌어요. ‘수화’(미즈에) ‘아틀리에’ 등 잡지에도 아고리상의 그림이 연재되고 아주 화제가 됐었죠. 평론가 중에서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기억나요. 당시 미술계는 러시아계 사람들이 주름을 잡고 있었어요. 그들은 주로 러시아 그림을 가져와 팔고 평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서 온 남녀 평론가가 아고리상 그림 앞에 서서 ‘천재적이다’라면서 박수를 쳤어요.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랬기 때문에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도 미술부 학생이었던 만큼 화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프랑스로 미술유학을 가려다 이중섭과 사귀면서 포기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유학을 꿈꿀 정도였다면 화가의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나는 사실 문학소녀이지 미술 지망생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미술부로 진학을 했느냐? 여고 때 미술 선생님이 분카학원을 소개해주고 미술부 입학을 권했어요. 그래서 들어간 거지 사실 나는 문학소녀였어요.”
   
   그는 ‘문학소녀’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 덧붙였다.
   
   “나보다 아고리상이 프랑스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아고리상이 프랑스에 같이 가자고 해서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미술을 꼭 해야 한다거나 프랑스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이중섭과 이남덕, 오해와 진실
   
▲ 왼쪽 그림은 이중섭의 둘째 아들인 태성씨의 아들이 세 살 때 그린 그림. 오는 7월 제주도 서귀포 미술관에서 열릴 ‘가족전’에서 전시될 계획이다.
그는 자신과 이중섭에 대해 한국에서 잘못 알려진 내용이 많다고 지적했다. ‘혼내(속마음)’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성격을 볼 때 입 밖으로 드러낸 것을 보면 불만이 많아 보였다. 이중섭의 죽음과 함께 그도 한동안 한국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이중섭의 삶과 사랑은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 전해진 것이 많았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각색되기도 하고, ‘비운의 천재화가’라는 수식어에 맞춰 윤색된 내용도 있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사랑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그려진 것에 대해 사실이 왜곡됐다면서 불편해 했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살 수 있겠나’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미쓰이창고주식회사 사장이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주택 한 채만 남았지만 원래 집터는 830여㎡(250여평)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임대수입을 위해 집을 쪼개서 여러 채를 만들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양재일을 하고 보험일도 잠깐 했다. 교회 목사들 옷을 만드는 일도 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옷이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교회의 집기류나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주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임원까지 지냈다.
   
   1945년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중섭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현해탄을 건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가 목숨 건 길을 나선 것은 이중섭이 보낸 전보 한 통 때문이었다. 1943년 이중섭은 전람회 관계로 귀국했다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시 원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패망을 앞둔 일본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주간조선에 귀한 자료를 공개했다. 1944년 12월 이중섭이 보낸 전보였다.
   
   ‘마사코도 게콩이소구 시사이후미다시다 소쿠다노무 후미구레(마사코와 결혼 급하다 자세한 내용은 편지로 썼다 바로 편지 줘).’
   
   암호 같은 전보의 내용은 집안의 허락을 받은 이중섭이 그에게 빨리 한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전보를 그는 70년 넘게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이 귀국길에 오를 때 그는 거꾸로 한·일 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다. 당시의 상황을 그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배표는 아버지가 구해주었어요. 쌀까지 지고 시모노세키항으로 갔죠. 후쿠오카로 건너가야 하는데 미군 폭격이 심하고 어뢰 때문에 건널 수가 없었어요. 여관에서 가져온 쌀로 밥을 해먹으면서 기다리다 천신만고 끝에 연락선을 탈 수 있었어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마지막 배였어요. 떠나기 전 아고리상과 전화통화가 됐는데 건너오기만 하면 친구가 부산항으로 마중을 나갈 것이라고 하더군요. 친구에게 부산에서부터 서울까지 안내도 부탁해놓아 서울 호텔로 와서 기다렸어요. 아고리상이 귀한 사과와 삶은 달걀을 양손에 가득 들고 왔어요. 사과는 당시 도쿄에서도 구경하기 힘들었어요.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는 이중섭이 가난 때문에 불행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도, 결혼 이후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전해진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중섭의 집안은 잘살았다. 땅도 많고 형 이중석이 성공한 사업가로 큰 재산을 모았다. 6·25전쟁 와중에 이중섭의 형이 지주 자본가로 몰려 세상을 뜨면서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원산에서 살면서 큰아들인 태현(야마모토 야스가다·1947년생)씨와 두 살 터울인 태성씨가 태어난다.
   
   “경제적으로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고리상이 프랑스 유학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집이었어요. 당시 젊은층은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아고리상의 누나, 형과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었어요. 모두 잘해줬어요. 일본인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거나 싫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고생은 전쟁 때문에 피란 다니면서 했죠. 새벽에 시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중공군이 몰려오니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미 군함을 얻어 타고 부산으로 왔어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빈손으로 피란길에 나선 가족은 부산에 도착해 창고와 피란민 수용소를 전전해야 했고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급하게 피란을 나서면서도 남편은 그림도구만은 챙겨야 한다면서 붓, 팔레트 등을 보따리 속에 챙겨 넣었어요.”
   
   그는 그때 들고 나온 이중섭의 손때가 묻은 팔레트를 2012년 제주도 서귀포 미술관에 기증했다. 전람회에서 상을 받고 부상으로 받은 대형 팔레트였다. 몇 개 남지 않은 남편의 유품을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팔레트는 덕수궁관에서 열릴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볼 수 있다. 이중섭은 부두에서 짐을 나르기도 했다.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때리는 군인을 말리다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상처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제주도가 상황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1951년 가족은 제주도로 건너가 11개월여를 머무른다. 배급으로 연명하고 게를 잡아 부족한 배를 채웠지만 그는 제주도 생활을 피란 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꼽는다. 이중섭의 그림에서 게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 이중섭은 게를 많이 잡아먹은 미안함을 그림에 담았다고 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가 생각이 나서 물었더니 그는 “예?” 하고 놀라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제주도는 좋은 곳이긴 하지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가난했지만 아주 자유롭고 즐거웠어요.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대해 제주도에서 살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있습니다.”
   
   1952년, 제주도에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범일동 판자촌에 살고 있을 때 그는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한·일 국교 단절 상태가 이어지면서 건널 수 없는 바다가 부부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1953년 7월 말 이중섭이 친구를 통해 어렵게 구한 외항 선원증으로 일본에 건너와 눈물의 재회를 하고 1주일을 머물렀다.
   
   “배가 히로시마 항구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받고 마중을 나갔어요. 선원증으로 체류를 할 수는 없었어요. 엄마가 잘 알고 지내던 히로카와 농림장관에게 부탁을 했어요. 장관 보증으로 1주일을 허락받았죠. 여관에서 네 식구가 함께 지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어요. 아고리상 친구가 원양사업을 해서 다음 배가 올 때 다시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중섭은 일본에서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연줄을 총동원했고 비용 마련을 하겠다면서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결핍과 희망이 근육질의 황소 등 걸작을 탄생시킨 셈이다. 그러나 이별은 결국 이중섭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림을 판 돈은 가난한 동료 예술가들의 입으로 들어가기 일쑤였고, 일본행이 번번이 좌절되면서 괴로움을 술로 달래는 동안 이중섭의 간은 회복할 수 없이 딱딱해져갔다.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이중섭은 외로운 죽음을 맞았다. 무연고 사망자로 3일간 방치돼 있는 것을 친구들이 수습했다. 화장한 유골의 일부는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이중섭을 끝까지 지켜준 시인 구상(具常)이 일본으로 건너와 그에게 전해줬다. 구상 시인은 국제펜클럽 회원 자격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갈 수가 있었다. 그는 남편의 유해를 도쿄도 후추시와 고가네이시 경계에 있는 야마모토 가족 묘지에 모셨다고 말했다.
   
   
▲ 일본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이남덕씨 자택(왼쪽). 이곳에서 80년을 살았다.

   편지는 어디로 사라졌나
   
▲ 이중섭은 편지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람회를 열어서 그림을 팔아 돈과 선물을 많이 가지고 가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photo 뉴시스
부부가 떨어져 지냈던 마지막 4년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편지의 행간에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넘친다. 고백의 단어들은 젊은 연인들보다 뜨겁다. 답장을 빨리 보내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는 내용도 있다. 두 아들에게 보낸 그림엽서에 ‘자전거를 사가지고 곧 가겠다’는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세상에 나만큼 아내에게 이토록이나 열광적으로 만나고 싶어서… 머리까지 머엉해버립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해서 가슴 가득 설레는 이 열렬한 사모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나만의 아스파라거스군에게 따뜻한 아고리의 뽀뽀를 전해주구려. 아스파라거스군은 아고리를 잊지나 않았는지요? 물어보고 답장을 써 보내주시오.’
   
   ‘발가락군에게 길고 긴 뽀뽀를 보내오.’
   
   이중섭이 그에게 보낸 편지들은 다빈치출판사가 ‘1916~1956 편지와 그림들’이란 책으로 묶어냈다. 편지의 내용에서 특히 ‘발가락군’ ‘아스파라거스군’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었다. 어찌나 진지하게 자주 발가락군에 대한 안부를 묻는지 웃음이 나왔다.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둘이서 자주 먹곤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그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이중섭의 편지는 현재 그의 손에 없다. 1970년대 전시 문제로 한국에 보낸 후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 바라는 것이 없냐는 질문에 간절하게 대답했다.
   
   “다른 것보다 편지를 돌려줬으면 좋겠어요. 남편의 유품인데,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내 손에 없어서…, 아주 서글퍼요. 빨리 돌려줬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소망입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쓰지모토씨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일정 기간 빌려주기로 했는데 돌아오지도 않고 여기저기 전시되고 팔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의 허가도 안 받고 유족들이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도 몇 장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00통은 되는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는 내조를 위해 애를 썼다. 책을 팔아 물감 값이라도 보태라고 수백만원어치 책을 사서 보냈다가 결국 큰 빚을 지기도 했다. 예술가가 아닌 경제적인 면에서는 무능하지 않았느냐, 남편으로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이냐 주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고리상은 그림만 그리면 행복해했던 사람이에요. 나도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 남편을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해줬어요. 사람들이 볼 때는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두가 좋아했어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결혼 기간 중 그와 이중섭이 함께 살았던 것은 7년이다. 그 기억으로 남은 60년을 살아낼 수 있을까. 기자를 떠나 인생의 후배로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는 애매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쟁만 없었다면 고생할 일도 없고 헤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아고리상과 사이에 싫은 기억이 없어요. 혼자 두 아이 키우느라 다른 남자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싱크대 위에 카네이션 꽃바구니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날’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고 있다. 큰아들은 실내인테리어 일을 하다 그만두고 직장에 다니는 부인을 대신해 집안일을 맡아왔다고 한다. 큰아들은 그의 자택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다. 그는 “아들이 목이 아파 최근에 수술을 한 것이 요즘 걱정거리”라고 답했다.
   
   벽 한쪽에 작은 액자 그림이 눈에 띄어 물었더니 태성씨의 아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그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자랑을 했다.
   
   “손주가 세 살 때 그린 그림인데 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상금으로 4만엔을 받았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2학년인데 피아노를 아주 잘 쳐요.”
   
   태성씨의 가족은 히로시마에 살고 있어서 태성씨가 오고가고 있다고 했다. 현재 이중섭 관련 대외적인 일은 태성씨가 맡고 있다. 이중섭의 유품 중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쓰지모토씨가 대신 답을 했다.
   
   “둘째 아들이 미공개 작품을 몇 점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해줄 수 없습니다. 오는 7월 서귀포미술관에서 가족전을 계획하고 있는데 거기에 일부 전시될 예정입니다.”
   
   작품의 소장 여부나 자료 공개에 대해서는 극히 말을 아꼈다. 2005년 미술계를 발칵 뒤집었던 이중섭 위작 사건 때문인 듯했다. 당시 사건 때문에 태성씨도 검찰 조사를 받은 터라 질문도 대답도 조심스러웠다. 피로의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더 이상의 질문은 가혹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만일 다시 남편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한참 망설이던 그가 수줍어하면서 어렵게 대답을 했다.
   
   “당신, 도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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