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photo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photo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은 ‘한국의 빈센트 반 고흐’라고 불릴 만큼 치열한 삶을 살고 갔다. 짧은 생이었지만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국민화가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약 320여점으로 전해진다. 유화 60여점, 은지화 120점, 드로잉 150점, 엽서화 88점 등이다. 1940~1943년에는 주로 엽서그림들이 그려졌고, 나머지 230여점은 1951년 이후 그려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광복기,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삶은 고스란히 한민족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지만 이중섭은 불운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관적인 현실을 작품을 통해 ‘창의적 환희’로 극복해냈다. 시인 구상은 화가 이중섭에 대해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합판이나 맨 종이, 담배종이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도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그렸고, 슬퍼도 그렸다”고 증언하기도 했을 정도로 치열함 자체였다.

이중섭의 작품들은 군살과 기름기를 뺀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다. 아무 거리낌도 꾸밈도 없는 어린 아이의 선묘(線描)를 닮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또한 시 읽기를 즐겼던 평소의 습성이 그대로 작품에 전이된 결과로 여겨진다. 격렬한 필치와 강렬한 색감, 날카로운 선묘 등이 조화를 이뤄 특유의 조형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평가가 가능한 것은 단순히 서양화의 조형어법을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우리 향토적 정서의 숨결과 민족의식까지 담았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작품은 우리 민족이 지나왔던 발자취를 생생하게 담아낸 ‘생활일기 같은 서사시’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가족과의 이별, 견디기 힘든 그리움, 고단한 삶의 편린 등 그 안에 스민 개인적 아픔이 곧 우리 민족사의 대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에 그린 이중섭의 ‘소’는 단순한 소재주의 그림을 넘어 ‘한민족의 소’로 불릴 만하다. 5세 이후 어릴 적부터 고구려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이중섭. 초기부터 매료됐던 그의 ‘소 그림’에서 고구려인의 강인한 기상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 ‘흰소’를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쏜살같이 치고나갈 것처럼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마치 X-레이로 촬영한 것처럼 몇 가닥의 선묘만으로 충분히 황소가 지닌 특징을 실감나게 포착했다. 뼈대와 힘줄을 단 몇 획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이중섭의 조형어법이 태생적으로 얼마나 탄탄한 내공을 지녔는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정중동의 안정된 무게감을 동시에 표출함은 물론, 머리와 목덜미를 지나 생식기와 꼬리에 이르는 에너지의 흐름은 숨을 멎게 할 정도이다.

전통미에 빠지고, 은지화에 상감기법 옮겨

이중섭의 가장 큰 취미는 우리 전통미술품 수집이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도자기류나 골동미술품 수집을 즐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 속에서 전통미술품의 표현법이 자주 응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 그림과 함께 이중섭 작품의 양대 축으로 평가되는 은지화 역시, 도자기의 상감과 분청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은지화 제작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종이가 뚫어지지 않을 만큼 눌러 구상한 이야기에 따라 윤곽선을 그린다. 이어서 검정이나 흑갈색의 엷은 유화물감을 칠하거나, 먹물을 헝겊에 묻혀 문질러서 못으로 그린 선묘를 도드라지게 해 완성한다. 바로 흙으로 1차 완성된 도자기 표면을 뾰족한 칼로 깎거나 도려내고, 그 흠집 안에 백토를 넣어 유약을 발라 구워내면 서로 다른 색조가 어우러져 완성되는 상감청자 기법과 같다.

그러나 이중섭의 은지화는 홈을 포함해 화면 전체에 물감을 엷게 발라 완성하니, 오히려 1차 주조된 도자기를 ‘덤벙기법’으로 만든 분청자기와도 닮았다. 더불어 담뱃갑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겨진 주름마저 훌륭한 조형적인 효과로 승화시켰으니, 무명의 도공이 지닌 순박하고 고졸한 멋이 우연한 조형미를 발휘한 달항아리의 예술성과도 진배없다.

가족과 아이밖에 모른 진정한 휴머니스트

이중섭이 평생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화두는 ‘가족’이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삶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며, 창작의 열정을 유지해주는 에너지원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중섭은 화가이기 이전에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휴머니스트였다. 유화 드로잉 작품 ‘소와 새와 게’를 보면 등장한 주인공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싸안고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있다. 마치 ‘가족이란 이런 의미를 지녔다’는 그의 속마음을 비치고 있는 듯하다.

가족 그림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도 쉽고 간결하다. 행복이며 희망이다. 이중섭 그림에서 ‘부부’라는 제목의 작품들에서도 애절함은 영화의 한 장면 못지않은 깊은 여운을 전한다. 이중섭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 부인을 ‘마사코’라는 일본명 대신 직접 지어준 ‘남덕(南德)’으로 불렀다. 부인 이름에는 자신의 이상향을 ‘행복한 가정’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길 떠나는 가족’이란 제목의 가족도를 보면 이중섭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 가족과 어떤 삶을 살고 싶어했는지 잘 나타난다. 꽃으로 장식된 금빛 소가 이중섭의 가족을 달구지에 태우고 가고 있는 장면이다. 한바탕 잔치라도 벌이고 가는 것처럼 발걸음은 가볍다. 평화와 행복이 펼쳐질 이상향으로 곧 그의 가족을 데려다 줄 것만 같다. 가족을 소재로 한 그림에선 전쟁의 비극이나 굶주림, 가족과의 헤어짐도 극복한 극락도가 따로 없다.

“이중섭은 거의 매일 아이들과 바닷가로 놀러나갔다. 잡아온 게는 식량이기보다는 아이들의 놀이 대상에 가까웠다. 실로 다리를 묶어 놓고 놀거나, 종일 게와 물고기를 관찰하는 것이 일상의 반복이었다.” 피란 시절 이중섭의 서귀포 집에서 바닷가까진 걸어서 10여분 남짓 떨어져 있다. 그곳엔 작은 바위와 돌을 들추면 지금도 큼지막한 게들이 널려 있다. 어렸을 때 이중섭을 만난 경험이 있다는 동네 사람의 증언대로 이 바닷가에서의 단꿈 같았던 서귀포의 행복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아이 그림’으로 완성된다.

이중섭의 예술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단연 그가 36세이던 1951년 중후반의 ‘서귀포 시절’이다. 작품세계로 보면 민족적인 주제의식에서 점차 ‘자전적인 개인사’로 관점이 옮아가는 결정적인 시기이다. 또한 ‘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적 무게감에서 ‘아이’를 중심으로 경쾌한 서정성을 엿보이는 작품도 대거 제작되기 시작했다. 오로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이중섭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상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작품 ‘서귀포 환상’은 서귀포에 대한 단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제주도에서 그린 이 작품은 ‘따뜻한 남쪽나라’ 특유의 포근한 감성이 돋보인다. 과일(귤)이 주렁주렁 자라나고 아이는 그 과일을 따며 놀거나, 새를 타고 노닌다.

그 어떤 걱정과 근심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자유와 평화로움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이중섭의 꿈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족과의 조건 없는 영원한 상봉이자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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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섭 미술사 박사·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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