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을 생산하는 김보규(36)씨.
곶감을 생산하는 김보규(36)씨.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간 지 2시간30분이 지났다. 차량이 경상북도 상주시에 들어서자 흰 구름이 걸려 있는 속리산이 보였다. 탁 트인 들판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 물결이 일었다. 창문을 내리자 향긋한 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차량은 들과 들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달렸다. 비포장도로 위에서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흙먼지가 폴폴 날렸다. 푸른 나무가 일렬로 들어선 흙길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날 폭염주의보가 발령됐지만 들판에는 밀짚모자를 쓴 농부들이 곳곳에 보였다.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한국의 명산 중 하나다. 속리산은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속리산이 있는 경북 상주는 전국에서 도시를 떠난 귀농인이 가장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지난 12년간 상주시에 자리 잡은 귀농가구 수만 무려 1275가구이다. 경북 다른 지역의 평균 누적 귀농가구 수(650여가구)보다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지난 7월 11일 상주시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귀농인 김보규·구지혜·지승호씨 3명을 만나 상주시로 귀농을 한 이유를 들어봤다. 3명 모두 30대의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귀농을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귀농은 도망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대기업 사원에서 농부가 된 김보규씨

김보규씨가 대기업 직장생활을 한 지 4년째 되던 2010년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막차에 올라탄 김씨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 일을 50살이 돼서도 계속할 수 있을까.” 스스로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늘진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이날 막차 안에서 본 다른 직장인들의 모습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때 그에게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설사 몸이 지치더라도 내가 평생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김씨는 당장 외가가 있던 경북 상주시에 1만㎡(3000평) 규모의 땅을 매입했다. 그가 처음부터 귀농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주말농장을 가꾸며 그곳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처음 3년간은 평일에는 회사 일을 하고 주말만 상주로 내려가 주말농장을 가꿨다. 그런데 상주 땅을 밟으면 밟을수록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신이 개운해졌다. 2013년이 되자 결국 김씨는 귀농을 마음먹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사원증을 벗어던졌다. 급작스러운 사표에 회사는 물론 가족들도 발칵 뒤집어졌다.

“높은 급여가 보장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물론 주변 지인들 모두 나를 말렸다. 서울 잠실에서 살며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는 내가 무슨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지인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건축학을 살려 거주할 집을 직접 짓기로 마음먹었다. 집의 디자인과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했다. 큰 기둥을 세우거나 철골 작업 등의 일부 작업에만 인부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1층 목조주택을 짓는 데 꼬박 5개월이 걸렸다. 김씨는 “회사생활 할 때는 살리지 못했던 전공을 활용해 나만의 집을 지으니 정말 뿌듯했다”고 말했다.

집을 짓고 김씨가 시작한 농업 아이템은 곶감이었다. 왜 하필 곶감이었을까. 곶감은 상주의 대표적 특산품이기도 하다. 상주에는 유독 곶감으로 만들면 맛있는 감이 많이 자란다. 물기가 적고 탄닌 함량이 높아 곶감 만들기에 좋다. 상주시는 전국 곶감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할 정도다. 김씨는 “농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귀농인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특산물로 주로 농사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귀농인들은 농사를 시작할 때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작물을 선호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역 특산품이나 대표작물이 농업지식을 얻기가 수월하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당시의 실수담을 들려줬다. 그는 처음 자신의 밭에 케일을 심었다고 한다. 몇 개월이 지나자 밭에는 푸릇푸릇한 싹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김씨는 이를 잡초라고 생각했다. 잡초라고 생각하고 모조리 뽑았는데 알고 보니 케일 싹이었다. 그렇게 케일농사를 허무하게 망쳤다. 생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그는 케일과 잡초의 생김새조차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가 교훈이었다. 김씨는 상주시에서 실시하는 농업 교육 프로그램을 들으며 곶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배운 정보를 바탕으로 김씨는 감나무를 심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보통 감나무는 3m 간격으로 심는 게 원칙이지만 김씨는 그 절반인 1.5m 간격으로 심었다. 감나무가 자라기에는 좁은 간격이었지만 병충해와 태풍에 죽을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실제 그해 태풍과 병충해로 감나무의 절반 가까이가 죽었다. 하지만 김씨는 감나무를 두 배로 심은 덕분에 농사를 망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감을 수확해 곶감을 만들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작 곶감을 판매할 유통망을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곶감이 주로 회사에서 명절 선물로 사용된다는 점을 떠올렸다. 그는 인근 대구 지역 CEO들이 자주 듣는다는 한 강의를 골라 등록했다. 함께 강의를 듣는 회사 대표들이 직원들 명절 선물로 자신의 곶감을 구매하길 바란 것이다. 이때는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자신의 회사생활 이야기를 매개로 동료 수강생인 대표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김씨의 이 같은 노력은 전혀 뜻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한 거래처 관계자가 김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처제를 소개해준 것이다. 결국 김씨는 소개받은 여성과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래서 김씨에게 귀농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농을 통해 내가 꿈꿨던 대부분을 직접 설계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하지만 무작정 환상만 가지고 귀농을 해서는 실패를 경험할 확률이 높다. 새로운 직업인 만큼 충분히 공부하고, 땀 흘리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퀴노아를 재배하는 구지혜(35)씨.
퀴노아를 재배하는 구지혜(35)씨.

화학 연구원에서 여농이 된 구지혜씨

“나는 왜 유목민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일까.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 정착한 곳이 바로 농촌이었다.”

구지혜씨는 충남 서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군에 지원했다. 부사관 생활을 3년 마치고 퇴역한 뒤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2002년 구씨는 서울시의 한 대학교에 입학해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택과 대전에서 태양전지를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그렇게 5년간 회사생활을 하다 2013년 상주시로 귀촌을 하게 됐다. 가족 모두가 정착할 집을 찾았는데 그 조건에 부합한 곳이 상주였기 때문이었다.

구씨는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동생 내외와 어머니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상주시에서 발전소용 촉매를 만드는 직장에 연구원으로 취업하기도 했다. 구씨는 자신이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상주에 정착하기 전만 하더라도 10년간 떠돌아다닌 지역이 5곳이 넘었다. 하지만 구씨는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보자고 작정했다. “제 뜻과는 다르게 이상하게 한 곳에 잘 머무르지 못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지친 것이 사실이었고 상주시에는 정착해보자는 오기가 컸다.” 지난해 구씨는 2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던 상주에서 직장생활도 접고 드디어 농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농부로 변신한 구씨가 자신의 첫 수확물로 삼기로 한 것은 퀴노아. 이름부터가 생소한 이 작물은 잉카제국의 ‘수퍼곡물’로 불릴 정도로 단백질 및 칼륨이 풍부한 곡물이다. 퀴노아는 1㎏에 3만원 정도로 판매가격대도 높은 편이다. 구씨는 “어머니가 고혈압을 앓고 있었는데 퀴노아가 고혈압에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설사 농사가 망하더라도 우리가 먹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 퀴노아는 오메가3, 오메가9이 함유돼 콜레스테롤 수치와 혈당지수를 낮추는 데 효과적이다.

구씨에 따르면, 농사일은 자신이 하고 싶은 작물을 마음대로 키울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물론 농사 첫해에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는 방법을 우연히 시청했다. 식초와 소주를 섞어 분무기에 넣고 작물에 뿌려주면 병충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농사지식이 없던 그는 그것을 그대로 따라 실천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작물들의 잎이 모두 누렇게 변하며 죽어버렸다. 알고 보니 식초와 소주를 물에 희석한 뒤 뿌려야 했던 것이었다. 그는 “그 사건 이후로 TV나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정보를 그대로 믿는 습관을 버렸다”면서 “현지 농민들을 찾아가 직접 배우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씨는 현재 6611㎡(2000평)의 논밭을 임차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퀴노아를 중심으로 들깨·아마란스·옥수수·토마토·고추 등 다양한 작물을 기르고 있다. 그에게 농사는 단순한 수익창출뿐 아니라 자급자족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수익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 4000만원대였던 과거 직장생활 당시의 연봉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이 난 상태다. 하지만 구씨는 샐러리맨을 포기하고 농부가 된 데 대해 “후회는 전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구씨는 자신이 후회하지 않는 이유로 한 가지 얘기를 들려줬다. 올해 초 구씨는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구씨는 전날까지 농사일을 하느라 피로가 많이 쌓인 상태였다. 그런데 그를 본 동료들의 첫마디는 예상 밖이었다. “지혜씨, 왜 이렇게 얼굴이 좋아졌어?” 분명 구씨의 피부는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눈도 충혈된 상태였다. 하지만 전 직장 동료들은 구씨를 향해 한결같이 “직장생활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웃는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구씨는 “수확기에 한 번을 벌어서 한 해를 버티는 게 농부”라고 말한다. 그만큼 농부는 한 해를 버티기 위해 참아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다. 그는 주변에서 귀농을 했다가 결실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 농촌을 떠나는 샐러리맨 출신 귀농인을 많이 봤다고 했다. 1만6500㎡(5000평)나 되는 포도밭을 사고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도시로 돌아간 귀농인도 봤다고 했다. 구씨는 귀농인들은 인내심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씨는 “지역 농민들의 텃세를 극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며 “귀농을 고민하는 주변 지인들에게 반드시 농촌에서 몇 개월을 먼저 경험해보라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접목선인장 재배하는 지승호(31)씨.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접목선인장 재배하는 지승호(31)씨.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교사를 꿈꾸던 청년 농부 지승호씨

지승호씨는 대학에서 지리교육을 전공한 후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는 석사논문 제출을 앞둔 2013년, 서울의 한 지도회사에 취업을 하게 됐다. 일과 학업을 두고 갈등했지만 선택은 생각보다 빨랐다. 청년실업 문제가 큰 요즘, 취업은 큰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씨는 석사학위를 포기하고 관광지도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취업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매일같이 야근이 계속됐다. 야근을 마치고 수원 집에 도착하면 자정을 넘기는 건 다반사였다. 직장인 시절 지씨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문득 귀농을 한 고모부가 떠올랐다. 그의 고모부 역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감리회사 이사를 지낸 촉망받던 기업인이었지만 돌연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귀농을 선택했다. 안정적인 직장생활 대신 자연 속에서 새로운 삶을 꿈꿨다고 한다.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 지씨도 고모부를 따라 귀농을 하기로 결심했다. 귀농을 위해 상주시에 내려왔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지씨가 상주시를 선택한 건 고모부 곁에서 농사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미 고모부는 상주에서 ‘접목선인장’을 재배하며 성공한 귀농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접목선인장은 ‘삼각주’라 불리는 녹색선인장 대목에 다양한 빛깔의 ‘비모’란 선인장 접수를 붙여 고정한 것을 말한다. 접목한 선인장을 하우스에서 6개월가량 키워 시장에 내놓는다. 이렇게 생산한 접목선인장의 수출가격은 개당 400원 정도. 현재 지씨가 키우는 접목선인장은 전량 네덜란드로 수출된다. 젊은 나이에 도시생활을 포기하고 귀농을 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을까. 이에 대한 지씨의 말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동료조차 경쟁자여서 연봉, 능력 모두 뒤처질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먹고살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농업은 경쟁이 아닌 협동이 중요한 일이라 스트레스가 적다.”

그런 지씨에게도 몇 가지 고민은 있다. 농촌에서 지내다 보면 문화생활을 즐기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상주시에는 그 흔한 극장 하나 없다. 도시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지씨는 지난해부터 청년농부모임을 통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상주시에는 청년농업인단체가 있다. 상주시에 거주하는 만 20~34세인 농부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이곳에 가입한 청년농부만 50여명. 1년에 최소 분기별로 4번 이상의 모임을 가진다. 모임에서는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하고 농사를 하며 쌓은 지식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는 농촌과 도시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도시는 시계를 보며 하루를 바쁘게 쪼개어 생활한다. 이에 반해 농촌은 해를 기준으로 하루일과를 보내기 때문에 시계가 필요 없다. 해가 뜨면 논밭으로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농촌에 있다 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여실히 느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재 지씨는 접목선인장 농사를 지으며 또 다른 꿈을 키우고 있다. 바로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농촌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전공한 교육학을 활용해 농촌교육 프로그램도 설계하고 있다. 지씨는 “반드시 전공을 회사일을 통해 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청년들은 자신의 꿈을 얼마든지 농업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나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상주 귀농 3인방이 말하는 귀농 TIP

1. 귀농 혜택은 도·시별로 다르니 꼼꼼하게 확인한 후 자신에게 맞는 지역을 찾는 것이 좋다.

2. 귀농할 지역을 선택했다면 먼저 정착에 성공한 귀농인들을 만나 충분히 경험담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게 좋다.

3. 귀농인을 경계하는 현지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인사만큼 좋은 것이 없다.

4. 농촌에 설치된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무료교육프로그램과 모임을 최대한 이용한다.

5. 지역 농민들을 먼저 찾아가 일도 도와드리며 친분을 쌓으면 유통망 확보 등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6. 땅이나 집을 구할 때 도시에 비해 값이 싸다고 무작정 구매하지 말 것. 여러 부동산을 돌아다녀 보고 현지의 농민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더 합리적인 금액으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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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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